상위 문서: 차범근/선수 경력
차범근의 선수 경력 | ||||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 → | 바이어 04 레버쿠젠 | → | 현역 은퇴 |
차범근 1983-1989 | |
▲ 83/84 시즌 차범근 | |
소속팀 | <colbgcolor=#ffffff,#191919>바이어 04 레버쿠젠 (분데스리가) |
등번호 | 11 |
기록 | |
185경기 52득점 40도움 | |
15경기 4득점 4도움 | |
15경기 7득점 6도움 | |
합산 성적 | |
215경기 63득점 50도움 | |
우승 기록 | UEFA컵: 1979-80 |
개인 수상 | 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베스트 11: 14회[1] 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MVP: 1회[2] Kicker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 1회[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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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차범근의 선수 경력 중 바이어 04 레버쿠젠에서의 활약상을 서술한 문서이다.2. 하이라이트
87/88 시즌 UEFA컵 우승 트로피를 드는 차범근 |
86/87 시즌 분데스리가 6R 함부르크 SV전 골[4] |
84/85 시즌 분데스리가 5R 묀헨글라트바흐전 골 |
83/84 시즌 바이어 04 레버쿠젠 시절 차범근 |
3. 상세
3.1. 입단
프랑크푸르트의 재정악화와 부동산 문제로 인해 당시 고 연봉자였던 차범근은 83/84 시즌 레버쿠젠으로 이적하게 된다.[6] 바이엘 주식회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던 바이어 04 레버쿠젠은 프랑크푸르트에 이적료 100만 마르크(당시 약 3억 2천만 원 상당)를 지급하였고[7] 차범근과 연봉 52만 마르크(당시 1억 5천6백만 원 상당)에 계약했는데, 이는 당시 레버쿠젠 구단 최고 연봉 및 분데스리가에서 6번째에 해당하는 수준이었으며, 구단 역사상 최초의 비유럽인 및 아시아 선수이자 세 번째 외국인 선수 영입에 해당한다.3.2. 활동
구단의 기대에 걸맞게 차범근의 이적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이적 첫 시즌인 83/84 시즌 분데스리가 순위 10위 권이 목표이던 바이어 04 레버쿠젠은 전반기에만 8골을 넣으며 맹활약하는 차범근을 보며 부랴부랴 목표 순위를 조정하기도 했고, 선수 개인으로서는 리그 12골을 기록하며 구단 역사상 첫 시즌에 10골 이상을 넣은 역대 세 번째 선수가 되었다. 이후에도 84/85 시즌 DFB-포칼에서 3경기 4골을 기록하며 포칼 득점 랭킹 2위, 85/86시즌 분데스리가에서만 17골을 넣으며 리그 득점 순위 4위에 오르는 등 수위급 활약을 펼쳤다.특히 85/86 시즌의 경우 선수 개인으로서 의미 있는 기록들을 수립한 시즌이었다. 우선 1985년 11월 9일 분데스리가 14라운드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전에서 개인 통산 분데스리가 200회 출전 기록을 세웠다. 후반 80분 리그 9호 골을 넣으며 팀의 극적인 2:2 무승부를 이끈 차범근은 이로써 분데스리가 200경기 77골을 기록하게 된다. 또한 분데스리가 진출 이후 본인의 역대 한 시즌 최다골인 시즌 38경기 19골(리그 34경기 17골)을 기록하였는데 당시 아시아 선수 유럽 4대 리그 최다골[8]이자 구단 역사상 한 시즌 분데스리가 최다골로써 현재까지도 역대 6번째 기록에 해당한다. 해당 시즌 라운드 베스트 11(Elf des Tages)도 6회 선정되었는데 이는 전체 선수 중 4위, 공격수 2위에 해당하는 횟수로 커리어 두 번째로 키커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으며 전후반기 랑리스테 IK(인터내셔널 클래스)를 받으며 최고의 시즌을 보내게 된다.
85/86 시즌 아벤트포스트 분데스리가 올해의 선수상 | 1986년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득표수 |
여기에 프랑크푸르트시의 최대 석간지 중 하나였던 아벤트포스트에서 선정하는 85/86 시즌 분데스리가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참고로 아벤트포스트는 독일 내에서 손꼽히는 신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국내에서 인식되는 것처럼 아류로 취급되는 신문은 아니었다.[11] 정치나 시사 관련 논조가 빈약해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진 않았지만 축구를 비롯한 스포츠 관련 기사의 경우 전문 기자들이 양질의 기사를 쓰다 보니 꽤 많은 축구팬들이 애독했다. 80년대 당시 서독 축구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던 축구 관련 매체는 단연 축구 전문 잡지였던 키커였고 스포츠 주간지 푸스발 보헤(fußball-woche)와 일간지 빌트[12]가 2순위였는데, 다소 격차는 있지만 이 뒤를 잇고 있던 스포츠 관련 언론지가 헤센주를 연고로 하는 오펜바흐지와 아벤트포스트였다.
차범근이 받은 아벤트포스트 분데스리가 올해의 선수상 역시 비록 정식으로 공인된 상은 아니었지만 소속 전문기자들이 해마다 매주 데이터를 조합해 점수를 매겨 연말에 선정하였던 상인만큼 당시 선수들에게는 자신의 활약을 인정받는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상이었다.[13] 수상자는 황금카드(goldene karte)라고 불리는 18K로 도금된 상패가 들어있는 액자를 받았다. 여담이지만 독일 eBay에 파울 브라이트너의 79/80 시즌 아벤트포스트 분데스리가 올해의 선수상을 2만 유로(약 2700만 원)에 판매한다는 글이 올라와 잠깐 이슈가 되기도 했다.[14]
87/88 시즌 UEFA컵 결승 2차전 RCD 에스파뇰전 골 |
1989년 4월 15일 1. FC 쾰른과의 분데스리가 26라운드 경기에서 분데스리가 역사상 최초로 비유럽 선수로서 리그 300경기를 치른 차범근은[20] 이후 여덟 경기를 더 뛰어 1989년 6월 17일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과의 분데스리가 34라운드에서 본인의 마지막 경기를 치르며 분데스리가 308경기라는 당시 아시아 및 비유럽 선수 최다 출전 기록[21]을 수립했고, 여기에 1989년 3월 11일 분데스리가 11라운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전에서 자신의 분데스리가 98번째 골을 넣으며 당시 분데스리가 역대 외국인 선수 통산 최다 골 기록과 분데스리가 역대 통산 득점 28위에 해당하는 기록을 수립하며 커리어 마지막 시즌을 영예롭게 마무리했다.
차범근의 3-5-2 포메이션 위치 | 88/89 시즌 미드필더로 출전한 차범근 |
또한 현대에 각광받는 컴플리트 포워드를 연상케 할 만큼 다양한 역할을 하며 팀을 보조하였는데 특히 구단에서의 존재감은 프랑크푸르트 시절보다 더욱 공고해졌다. 이는 차범근이 온전히 공격수로 활약했던 83/84 시즌부터 85/86 시즌까지의 레버쿠젠 리그 득점 비중을 살펴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이 기간 동안 레버쿠젠의 리그 득점에서 차범근이 넣은 골의 비중은 각 시즌마다 24%, 19.23%, 26.98%에 이르는데 해당 세 시즌 동안 구단에서 기록한 리그 득점의 23.63%에 해당하는 골을 넣었다. 당시 절정의 기량을 보이던 루디 푈러가 같은 기간에 SV 베르더 브레멘 득점의 20.88%를 기록했던 것을 보면 차범근의 레버쿠젠에서의 존재감은 절대적인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22]
분데스리가 8년 차에 접어든 86/87 시즌부터는 단순히 최전방 공격수 뿐 아니라 윙 포워드를 비롯해 미드필더를 겸하며 멀티플레이어로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물론 한 시즌 개인 최다 골을 넣은 85/86 시즌에 이미 만 33세의 나이었던 만큼[23] 어쩔 수 없는 노쇠화로 인해 레버쿠젠의 여섯 시즌 중 세 시즌은 공격수보다 미드필더로 출전하는 횟수가 이전에 비해 더 많아졌고 마지막 시즌에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하기도 하였지만 이런 포지션 변화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주전으로 출전했다.
1987년 6월 15일 레버쿠젠 구단 신문 메인 표지 | 1988년 5월 19일 Kicker 메인 표지 |
특히 레버쿠젠은 분데스리가에서 드물게 기업의 재정 지원을 받는 구단으로 80년대 재정위기가 찾아온 분데스리가 내에서도 충분한 자금력을 갖추고 있었던 몇 안 되는 팀이었다. 심지어 당시 분데스리가는 경기당 출전 가능한 외국인 선수를 두 명으로 제한하는 외국인 쿼터제를 운영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팀 전력의 중요한 요소인 외국인 용병 자리는 조금만 부진하면 다른 외국인 선수에게 자리를 빼앗기는 치열한 경쟁이 동반되는 자리였다. 그럼에도 대체자 영입 없이 외국인 용병 자리를 할애하며 끊임없이 기용한 것을 보면 레버쿠젠에서의 입지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 가능했던 차범근의 축구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차범근 역시 이런 믿음에 부응하며 젊은 선수들을 이끄는 팀의 리더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는데 당시 구단주였던 라이너 칼문트(Reiner Calmund)는 '외국인이었지만 젊은 독일 선수들에게 그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던 특별한 존재'였다고 회고했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87/88년 레버쿠젠이 들어 올린 UEFA 컵은 차범근과 레버쿠젠 간의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낸 성공적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차범근의 레버쿠젠 시절 교체 출전 기록 |
애초에 분데스리가 생활 내내 한국 언론으로부터 노장 소리를 듣던 차범근은 시즌이 끝날 때마다 국내 복귀를 예상하는 기사가 절정으로 쏟아지던 시기이기도 한데, 1983년을 기점으로 한국에도 프로 축구가 생겨나면서 유난히 외지인 취급을 받기도 했다. 국내 기사 역시 차범근의 활약상보다 국내 축구 선수들과의 기량 비교를 하는 내용에 초점이 맞춰져있었고 이 때문에 오히려 프랑크푸르트 시절보다 활약상에 대한 자료를 찾기 어렵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그랬지만 80년대 당시는 지금보다 훨씬 애국주의가 만연하던 시절이다 보니 국가 차원에서 자국 중심의 발전과 홍보에 주력했고 '제2의 차붐' 혹은 해외에 진출할 새로운 국내 선수들을 띄우기 위해 차범근은 좋은 매개체였다. 따라서 레버쿠젠과의 계약 당시 축구 협회를 통해 차범근에게 '반드시' 국내 프로팀 혹은 국가대표와 매해 친선 경기를 하는 조항을 넣어 계약하기를 '명령'하기도 했다. 특히 레버쿠젠과 화랑(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옛 명칭)과의 경기가 있을 때면 아예 외국인 취급을 받기도 했는데 화랑이 이기기라도 하면 '화랑의 통쾌한 승리', '차범근을 누른 국가대표 OOO'라는 식의 신문 타이틀이 쏟아지기도 했다. 또한 매 시즌이 끝날 때마다 차범근은 국내에 들어오면 반강제적으로 슈퍼리그 경기를 관람했는데 그때마다 기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독일에 비해 어느 정도 수준인지 평가를 물었고 이와 함께 언제 국내에 복귀해 한국 프로 축구 발전에 이바지할 거냐는 질문을 해댔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진출한 86년 월드컵 본선과 88올림픽에 모든 관심이 쏠렸던 만큼 이와 같은 상황이 계속 유지되었는데 86 멕시코 월드컵 대표팀에 합류한 차범근은 대표팀의 월드컵 대비 유럽 전지훈련에 활용(?) 되기도 하였다. 당시 축구 협회에서 친선경기를 제안한 유럽 7개 국에 모두 거절당한 상황이었는데 차범근과 크라머 前 레버쿠젠 감독의 도움으로 유럽 클럽들과의 친선 경기를 주선해 43일간의 유럽 전지훈련을 치른다.[24]
차범근의 영입과 함께 성적이나 스쿼드의 격이 이전에 비해 올라가긴 했지만 구단 자체의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지금이야 레버쿠젠이 분데스리가에서 우승 경쟁도 하는 강호이지만 그 당시에는 차범근이 기틀을 닦아줬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하위권 팀이었다.[25] 당시 레버쿠젠의 위상을 알 수 있는 일례가 있는데, 87/88 시즌 UEFA컵 FC 바르셀로나와의 8강전 바르셀로나 홈구장에서는 경기 포스터가 A4용지에 간단히 붙어있을 정도로 레버쿠젠을 가벼운 상대로 보았고 레버쿠젠의 홈경기에선 레버쿠젠 홈구장 규모가 작다는 이유로 FC 쾰른의 홈구장을 빌려 경기를 진행하는 굴욕을 당했다.#[26][27] 차범근 개인적으로도 당시 팀의 위상에 아쉬움이 있었던 모양인데, 2020년 포포투에서 진행한 인터뷰에 따르면 바이어 04 레버쿠젠 입단 후 2~3년간 본인 스스로도 만족할 정도로 활약을 했음에도 프랑크푸르트 시절에 비해 이상하리 만큼 평점도 낮고 라운드 베스트에 드는 횟수가 적었다고 말하며 구단이 프레스 즉, 기자들에게 영향력이 약해서 그랬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범근은 바이어 04 레버쿠젠에서 여섯 시즌 동안 분데스리가 시즌 평점 2점대 한 번과 3점대 초반을 꾸준히 유지했고, 주간 BEST 11(Elf des Tages)에 17회, 주간 MVP(Spieler des Tages) 1회에 선정되는 등 전반적으로 준수한 평가를 받았다.
차범근이 레버쿠젠에서 활약한 여섯 시즌의[28] 평균 평점은 3.183점에 이르는데, 이는 같은 기간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한 공격수 중 3위에 해당하며[29] 시즌 별 공격수 부문 평점 순위의 경우 6-9-5-13-5-1위를 기록했다.[30]
차범근의 시즌 별 평점은 당시 분데스리가 신인상과 득점왕,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상까지 휩쓴 위르겐 클린스만과 비견되는 수치로 정확히 따지자면 87/88 시즌을 제외하고 활동이 겹치는 모든 시즌에서 차범근의 평점이 조금 더 우위에 있다. 특히 레버쿠젠에서 뛴 분데스리가 185경기 중 1점과 2점을 받은 경기가 48회, 3점을 받은 경기까지 포함하면 111회로 60%에 해당하는 경기에서 최소 평균 이상의 활약을 보여 팀 에이스로서 활약했음을 알 수 있다.
83/84 시즌 분데스리가 네 경기 연속 득점 | 85/86 시즌 분데스리가 6-15 라운드 득점 기록 |
1985년 9월 18일 레버쿠젠 구단 신문 메인 표지 | 1986년 4월 18일 함부르크 구단 신문 메인 표지 |
포르투나 뒤셀도르프는 레버쿠젠이 79/80 시즌 분데스리가 승격 후 차범근이 영입되기 전인 82/83 시즌까지 상대 전적 1승 4무 4패, 분데스리가 이전의 전적 역시 4승 4무 10패를 거두며 절대적인 열세를 보인 팀이었는데[31] 차범근이 합류한 뒤 83/84 시즌부터 88/89 시즌까지 5승 1무 3패를 거두며 여섯 시즌 기준 처음으로 상대 전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차범근은 뒤셀도르프를 상대로 9경기 6골을 넣으며 강한 면모를 보여주었는데 이는 당시 두 팀 간의 경기에서 한 선수가 기록한 누적 득점 1위에 해당했다.[32] 또한 바이어 04 레버쿠젠 소속으로 출전한 분데스리가 100번째 경기 상대가 뒤셀도르프일 정도로 묘한 인연을 보이기도 했다. 86/87 시즌 1986년 8월 23일 3라운드에서 뒤셀도르프를 상대로 구단 소속 100번째 경기를 치른 차범근은 1골을 넣고 평점 2점을 받으며 맹활약하였고 팀의 5:0 승리를 이끌었다.
이 경기를 통해 차범근은 각기 다른 두 팀에서 분데스리가 100경기 출전 기록을 이룬 최초의 아시아 선수이자 비유럽 선수가 되었다.[33] 여기에 레버쿠젠 소속으로 분데스리가 100경기를 뛴 최초의 아시아 선수와 역대 두 번째 외국인 선수[34]에도 이름을 올렸으며 100경기 동안 40골을 기록하여 당시 레버쿠젠에서 100경기를 뛴 역대 선수들 중 최다 골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35]
뒤셀도르프 외에도 당시 유난히 레버쿠젠에게 강세를 보였던 함부르크 SV[36]와 VfB 슈투트가르트[37] 같은 강팀들에게도 상대 전적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함부르크를 상대로 79/80~82/83 시즌까지 1승 1무 6패를 거두었던 레버쿠젠은 83/84~88/89 시즌 동안 11경기에서 6골을 넣으며 맹활약한 차범근을 앞세워 5승 2무 4패로 근소 우위의 상대 전적을 거두었다. 특히 차범근이 기록한 6골은 당시 두 팀 간의 경기에서 한 선수가 기록한 역대 최다골 기록에 해당했다.[38] 이와 같은 활약 때문에 1985년 10월 8일 함부르크 SV 구단 신문에서는 레버쿠젠과의 분데스리가 3라운드 경기를 앞두고 '레버쿠젠의 차범근을 다시 만난다'라는 문구와 함께 차범근을 메인 표지 모델로 세우기도 했으며 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39]
슈투트가르트의 경우 79/80~82/83 시즌 동안 2무 6패로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는데 차범근 합류 후 2승 5무 2패로 팽팽한 균형을 이루어내었고 프랑크푸르트 시절부터 슈투트가르트에 강세를 보였던 차범근은 9경기에서 2골과 함께 평균 3점대의 평점을 기록하며 활약했다.
88/89 시즌 푸스발데어강 연수 시절 차범근[40] |
차범근과 데트마어 크라머 감독 | 차범근과 에리히 리베크 감독 |
리누스 미헬스 감독 | 위르겐 겔스도르프 감독 |
이후 크라머가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고 에리히 리베크가 부임하는데, 85/86시즌부터 87/88 시즌까지 세 시즌을 함께한다. 차범근은 이 기간에 자신의 분데스리가 한 시즌 최다골은 물론 두 번째 UEFA 컵까지 들어 올리며 영예로운 시즌을 보내게 된다. 리베크 감독 역시 자신의 감독 커리어 중 가장 훌륭한 성적을 거둔 시기였기 때문에 차범근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다. 특히 87/88 시즌 UEFA컵 결승전 이후 우승이 확정되자 차범근을 끌어안고 기쁨을 나누는 모습은 레버쿠젠 팬들에게 아직도 회자되는 장면 중 하나이다. 차범근은 리베크 감독과 함께했던 3시즌 동안 111경기 34골을 기록했다.[42]
UEFA컵 우승 이후 리베크 감독은 휴식이 필요하다며 사임하고 이후 바이에른 뮌헨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이 빈자리에 부임한 감독이 UEFA 선정 10대 감독 중 한 명인 리누스 미헬스이다. 요한 크루이프와 함께 토탈 풋볼을 완성시키며 AFC 아약스, FC 바르셀로나, 네덜란드 등의 전성기를 이끌며 세계적인 명장으로 대접받던 그에게 차범근 역시 큰 감명을 받았는데 단 한 시즌 지도를 받았지만 지금까지도 가장 존경하는 스승으로 미헬스를 꼽을 정도로 차범근 개인에게 영향을 많이 끼친 감독이었다. 미헬스 역시 마지막 시즌 쾰른 체육 대학에서 푸스발데어강(독일 축구 지도자 교육 코스)을 받던 차범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도 했다.[43]
88/89 시즌 후반기 미헬스 감독이 리그 9경기를 남겨 놓고 건강상을 이유로 급작스레 사임하고 당시 수석코치가 감독으로 부임하는데 바로 프랑크푸르트 시절 큰 부상을 안겼던 위르겐 겔스도르프이다. 차범근이 레버쿠젠으로 이적한 후 세 시즌을 함께 뛰기도 했는데 커리어 마지막 시즌엔 감독으로 만나게 되며 상대편 선수와 팀 동료, 감독으로 만나게 되는 묘한 인연이 되었다. 차범근과 선수 대 감독으로 함께한 건 불과 10경기에 불과했지만[44] 겔스도르프는 살해 위협까지 당하던 그를 용서해 준 차범근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이 있었던 만큼 커리어 마무리를 잘 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를 해주었다.
여담으로 바이어 04 레버쿠젠과 차범근은 유독 숫자 3으로 엮이는 부분이 많다. 이를테면
- 구단 역사상 역대 세 번째 외국인 선수
- 구단 역사상 한 시즌 분데스리가 득점 10골 이상을 기록한 역대 세 번째 선수
- 구단 역사상 데뷔 시즌 분데스리가 득점 10골 이상을 기록한 역대 세 번째 선수
- 구단 역사상 세 시즌 연속 분데스리가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한 역대 세 번째 선수
- UEFA 컵 결승전에서 득점한 세 번째 선수
- 개인 통산 분데스리가 300경기 출전 등이 있다.
4. 기록
바이어 04 레버쿠젠 시절 기록(1983.08.13~1989.06.17)[45]
4.1. 1983-84 시즌
1983/84 시즌: 35경기(선발 35경기) 12골 8도움풀타임 33경기(리그 2경기 교체 아웃)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분데스리가 | 34 | 12 | 8 |
DFB-포칼 | 1 | - | - |
합계 | 35 | 12 | 8 |
(1점 2회, 2점 11회, 3점 12회, 4점 6회, 5점 3회)
Kicker 랑리스테 전반기: 2.71
(K 리그 내 경쟁력 있는/외국인 선수 3위)
Kicker 랑리스테 후반기: 3.12
(K 리그 내 경쟁력 있는/외국인 선수 5위)
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베스트11: 3회 (14,17,27 라운드) # # #
팀 성적: 분데스리가 7위, DFB포칼 64강
4.2. 1984-85 시즌
1984/85시즌: 32경기(선발 32경기) 14골 2도움풀타임 27경기(리그 4경기/포칼 1경기 교체 아웃)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분데스리가 | 29 | 10 | 1 |
DFB-포칼 | 3 | 4 | 1 |
합계 | 32 | 14 | 2 |
(1점 0회, 2점 8회, 3점 8회, 4점 9회, 5점 4회)
Kicker 랑리스테 전반기: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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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cker 랑리스테 후반기: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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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MVP: 1회 (21 라운드) #
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베스트 11: 4회 (6,21,23,26 라운드) # # # #
팀 성적: 분데스리가 13위, DFB포칼 8강
4.3. 1985-86 시즌
1985/86 시즌: 38경기(선발 38경기) 19골 7도움풀타임 33경기(리그 4경기/포칼 1경기 교체 아웃)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분데스리가 | 34 | 17 | 6 |
DFB-포칼 | 4 | 2 | 1 |
합계 | 38 | 19 | 7 |
(1점 1회, 2점 9회, 3점 11회, 4점 9회, 5점 4회)
Kicker 랑리스테 전반기: 3.05
(IK 인터내셔널클래스/외국인 선수 2위)
Kicker 랑리스테 후반기: 3.33
(IK 인터내셔널클래스/외국인 선수 5위)
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베스트 11: 6회 (6,13,15,18,20,31 라운드) # # # # # #
85/86 시즌 Kicker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BEST 11) #
팀 성적: 분데스리가 6위, DFB포칼 8강
4.4. 1986-87 시즌
1986/87 시즌: 38경기(선발 38경기) 9골 15도움[49]풀타임 33경기(리그 5경기 교체 아웃)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분데스리가 | 33 | 6 | 13[50] |
DFB-포칼 | 2 | 1 | 1 |
UEFA컵 | 3 | 2 | 1 |
합계 | 38 | 9 | 15 |
(1점 1회, 2점 4회, 3점 10회, 4점 16회, 5점 1회)
※ 30라운드 부상 전반 26분 교체로 평점 X
Kicker 랑리스테 전반기: 3.00
(등급 X)
Kicker 랑리스테 후반기: 3.75
(B 눈여겨 볼만한)
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베스트 11: 2회 (7,9 라운드) # #
팀 성적: 분데스리가 6위, DFB포칼 32강, UEFA컵 32강
4.5. 1987-88 시즌
1987/88 시즌: 35경기(선발 34경기) 6골 12도움풀타임 30경기(리그 1경기 교체 출전, 3경기 교체 아웃/UEFA컵 1경기 교체 아웃)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분데스리가 | 25(24) | 4 | 9 |
DFB-포칼 | - | - | - |
UEFA컵 | 10 | 2 | 3 |
합계 | 35 | 6 | 12 |
(1점 0회, 2점 6회, 3점 9회, 4점 7회, 5점 2회)
※ 3라운드 부상 전반 16분 교체로 평점 X
Kicker 랑리스테 전반기: 3.31
(B 눈여겨 볼만한)
Kicker 랑리스테 후반기: 3.09
(K 리그 내 경쟁력 있는/외국인 선수 12위)
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베스트 11: 1회 (23 라운드) #
팀 성적: 분데스리가 8위, DFB포칼 64강, UEFA컵 우승(구단 역사 최초·유일)
4.6. 1988-89 시즌
1988/89 시즌: 37경기(선발 35경기) 3골 6도움풀타임 32경기(리그 1경기 교체 출전, 5경기 교체 아웃/포칼 1경기 교체 출전)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분데스리가 | 30(29) | 3 | 3 |
DFB-포칼 | 5(4) | - | 3 |
UEFA컵 | 2 | - | - |
합계 | 37 | 3 | 6 |
(1점 0회, 2점 6회, 3점 13회, 4점 9회)
※ 11라운드 후반 82분 교체 출장, 33라운드 부상 전반 30분 교체로 평점 X
Kicker 랑리스테 전반기: 3.14
(등급 X)
Kicker 랑리스테 후반기: 3.07
(K 리그 내 경쟁력 있는/수비형 미드필더 8위)
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베스트 11: 1회 (28 라운드) #
팀 성적: 분데스리가 8위, DFB포칼 4강, UEFA컵 64강
[1] 1983-84 시즌 14,17,27R / 1984-85 시즌 6,21,23,26R / 1985-86 시즌 6,13,15,18,20,31R / 1986-87 시즌 7,9R / 1987-88 시즌 23R / 1988-89 시즌 28R[2] 1984-85 시즌 21R[3] 1985-86 시즌[4] 2014년 분데스리가 선정 한국 선수 역대 Top 10 Goals 3위[5] 당시 바이어 04 레버쿠젠 감독[6] 레버쿠젠 이적 비화[7] 차범근 본인은 이적료 130만 마르크(당시 약 4억 원)였다고 하는데 이는 기본 이적료에 레버쿠젠이 지불한 약 30만 마르크의 부동산 융자금이 합산된 총액이다. 공식적인 금액은 100만 마르크였으며 당시 서독 내에서는 최고 수준의 이적료였다. 유럽 축구 통계 매체인 트랜스퍼마크트가 2020년에 차범근 이적 1년 뒤인 84/85 시즌의 세계 이적료 순위를 발표했는데 1위는 마라도나가 바르셀로나에서 나폴리로 이적할 당시 기록한 700만 유로였고 2위는 루메니게가 바이에른 뮌헨에서 인터밀란으로 이적시 기록한 550만 유로이다. 독일 내의 최고 이적료는 마테우스가 묀헨글라트바흐에서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며 기록한 120만 유로인데 이는 84/85 시즌 발생한 이적료 중 세계 7위에 해당했다.(트랜스퍼마크트는 단위를 유로로 통일해 발표했다.) 좀 더 비교하기 쉽게 83년 당시 서독의 화폐단위인 마르크로 환산한다면 마라도나의 이적료는 840만 마르크(당시 약 27억 원 상당), 루메니게 650만 마르크(당시 약 21억 원 상당), 마테우스 146만 마르크이다.(당시 약 4억 6천만 원 상당) 참고로 마테우스 이전 바이에른 뮌헨 최고 이적료는 78년 분데스리가 여름 이적 시장에서 기록한 브라이트너의 110만 마르크였다.(당시 약 3억 5천만 원 상당) 이것을 보면 알 수 있듯 80년대 세계 축구 시장 중 재정 규모는 당시 무섭게 성장하던 이탈리아 세리에 A가 압도적이었다.(세리에 A는 막대한 재정을 바탕으로 세계 각지의 선수들을 끌어모으며 84년 UEFA 리그 랭킹 2위를 기점으로 이후 유럽 최정상 리그가 된다.) 반면 차범근이 이적하던 시기의 분데스리가는 대부분의 구단이 재정적인 문제로 큰 위기가 찾아온 상황이었다. 일례로 당시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함부르크조차 프랑크푸르트가 차범근의 이적료로 100만 마르크 이상을 제시하자 70만 마르크 이상은 힘들다며 골머리를 썩기도 했다. 차범근의 레버쿠젠 이적 비화에도 나와있지만 당시 프랑크푸르트 부회장으로부터 부동산 사기를 당한 차범근은 재정적인 압박에 직면했던 관계로 이적료와 급료가 높은 이탈리아로 이적하길 원했으며 인터밀란과 나폴리, AC 밀란 등과 이적 협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폴리와 AC밀란의 제안에 고민하던 중 서독의 이적 관련 법안 변경으로 부동산 문제가 있던 차범근의 해외 이적이 불가능하게 됨에 따라 하는 수 없이 서독 내에서 이적이 추진되었다.[8] 이 기록은 30년이 지난 2016-17 시즌 프리미어 리그 토트넘 홋스퍼 FC에서 뛰던 손흥민이 21골(리그 32경기 14골)을 넣으며 깨졌다. 이후 2020-21 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손흥민이 35라운드 기준, 22골(리그 17골)로 다시 갱신했다.[9] 기본적으로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는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는 모든 선수+해외 리그에서 활약하는 독일 선수만을 대상으로 후보군을 정함에도 뜬금없이 마라도나가 명단에 포함되었다. 당시 월드컵에서 역대급 활약을 한 마라도나의 위엄이 느껴지는 결과라 할 수 있다.[10] 덴마크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덴마크의 전설적인 미드필더이다. 모든 소속팀에서 주축 선수로 활약하며 AFC 아약스에서 7회 우승(리그 5회+컵 대회 2회), FC 바이에른 뮌헨에서 4회 우승(리그 2회+컵 대회 2회), PSV 에인트호번에서 6회 우승(리그 2회+컵 대회 3회+유러피언컵 1회)를 이끌었는데 특히 87/88 시즌 에인트호번의 트레블 주역이기도 하다. 덴마크 국가대표로는 84 유로 4강과 86 월드컵 16강을 이끌기도 했다.[11] 헤센주에 본사를 두고 1948년부터 1988년까지 발간된 하루 발행부수 약 18만 부 규모의 석간지였다. 1988년 12월 12일 13만 부의 발행부수를 마지막으로 폐간했는데, 당시 주 2회씩 발간하는 키커의 1회 발행부수가 40만에 육박했고 프랑스 최대 축구 전문지였던 풋볼이 22만, 남미 최대의 스포츠 전문 주간지인 브라질의 플라카르가 30만 부였다. 아벤트포스트는 전문잡지가 아닌 신문이었기 때문에 궤를 달리하지만 영국의 타임스의 발행부수가 83년 기준 30만 5천7백74부인 것을 생각하면 지방 석간지치고 마냥 적은 발행부수는 아니었다.[12] 빌트 자이퉁과 빌트 스포츠를 따로 발간했다.[13] 물론 폐간된 언론사의 상인 데다 과거와 현재 모두 훨씬 인지도 높은 상이 많다 보니 이런 상도 있었구나 정도이지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14] 현재 판매 글은 삭제되었지만 게시글 이미지는 남아있다. 이슈가 되자 게시글을 바로 삭제했는데 상의 인지도 때문인지 판매자가 누군지 밝혀지지 않고 금세 묻혔다.[15] 프랑크푸르트 시절까지 포함해서 리그 득점으로만 따진다면 5시즌 연속, 시즌 기록으로 따진다면 7시즌 연속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했다.[16] 당시 UEFA 컵은 리그 우승과 컵 대회 우승 팀을 제외한 상위 4팀이 진출할 수 있었는데 85/86 시즌 당시 FC 바이에른 뮌헨이 리그와 DFB 포칼 우승을 거머쥐고 유러피언 컵에 진출하게 되자 DFB 포칼 준우승팀이었던 VfB 슈투트가르트가 컵 대회 우승 팀인 바이에른 뮌헨 대신 UEFA 컵 위너스컵에 나가게 된다. 그리고 리그 최종 순위 5위였던 슈투트가르트가 위너스 컵 진출로 빠지자 6위였던 레버쿠젠이 UEFA 컵에 진출하게 된다.[17] 리그 2위였던 함부르크 SV가 DFB 포칼 우승으로 위너스 컵에 진출함에 따라 6위였던 레버쿠젠이 UEFA 컵 진출권을 얻을 수 있었다.[18] 1차전에서 3:0으로 지고, 2차전에서 3:0으로 이겨서 승부차기 끝에 우승한다. 이때 극적으로 마지막 세 번째 골을 넣은 선수가 다름 아닌 차범근이다.[19] 87/88 UEFA컵 우승은 2024년 기준 현재까지도 레버쿠젠 구단 역사상 유일한 유럽 클럽 대항전 우승이다. 23/24 시즌에 레버쿠젠이 돌풍을 일으키며 리그, 포칼 무패우승에 유로파 리그 결승까지 오르며 이 기록을 깨나 했지만 아탈란타 BC 상대로 충격적인 3:0 패배를 당하면서 아쉽게도 이 기록은 깨지지 못했다.[20] 당시 외국인 최초의 300경기 출전은 1966년부터 77년까지 뛴 덴마크 출신의 Ole Björnmose이 기록했다. 차범근은 외국인 선수로는 역대 두 번째에 해당한다.[21] 당시 외국인 선수 역대 2위[22] 현재 선수들에 대입을 해보자면 세르히오 아궤로가 맨체스터 시티 FC에서 3시즌 간(17/18~19/20 시즌) 팀 리그 득점의 19.14%를 기록했으며 리버풀 FC에서 3시즌 동안(18/19~20/21 시즌) 모하메드 살라는 팀 리그 득점의 26.03%를 기록했다. 물론 팀에서의 영향력을 피력하기 위한 지표일 뿐 이들과 득점력이 비슷하다는 것은 아니다.[23] 1986년 기준[24] 당연히 차범근의 소속팀인 레버쿠젠도 포함되었다.[25] 1979년 2부 리그에서 첫 승격한 팀으로 모기업인 바이엘 기업의 지원하에 성장 중인 팀이었다. 차범근이 프랑크푸르트에서 활동하던 네 시즌의 레버쿠젠 성적은 12-11-16-11위를 기록했으며, 분데스리가가 18개 팀으로 이루어졌다는 걸 생각하면 지금처럼 명문이라고 불리기는 힘든 팀이었다. 특히 16위를 기록한 81/82 시즌은 강등 플레이오프까지 치러 겨우 잔류에 성공했다.[26] 경기장을 보면 FC 쾰른의 홈구장인 뮌게어스도퍼 슈타디온인 것을 알 수 있다.[27] 결과는 1,2차전 종합 1:0 레버쿠젠의 승리[28] 83/84~88/89 시즌[29] 온전히 공격수만을 따졌을 때의 순위이고 기존 키커 평점의 분류 방식대로 공격형 미드필더(OFFENSIVES MITTELFELD)로 분류되는 선수들을 포함하여 책정한다면 4위에 해당한다.[30] 이 역시 온전히 공격수만을 대상으로 책정한 순위이고 키커 평점 분류 방식대로 공격형 미드필더로 분류되는 선수를 포함시킨다면 6-15-7-18-6-4위에 해당하는 평점이다.[31] 뒤셀도르프가 70년대 후반에 DFB-포칼 2회 연속 우승을 거두는 등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팀이었다 보니 분데스리가 승격 이전에는 밀릴 수 있다 쳐도 80년대 들어서는 레버쿠젠과 비슷한 리그 순위를 기록하던 중하위권 팀이었는데도 상대 전적이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에 비슷한 수준의 팀에게 승점을 얻어내야 했던 레버쿠젠에게 있어 뒤셀도르프에 대한 약세는 상위 순위로 도약하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32] 2021년 8월 기준 3위에 랭크되어있는데 레버쿠젠 소속 선수로는 여전히 1위에 해당한다.[33] 외국인 선수로 따진다면 역대 두 번째 선수에 해당하는데 과거 프랑크푸르트 동료였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브루노 페차이가 불과 두 경기 전인 86/87 시즌 1라운드에서 수립했다.(프랑크푸르트 141경기+브레멘 100경기)[34] 레버쿠젠 소속으로 분데스리가 100경기 출전 기록을 세운 최초의 외국인 선수는 노르웨이 출신의 아르네 라르센 외클란(Arne Larsen Økland)이다.[35] 아르네 라르센 외클란(Arne Larsen Økland)(80/81~82/83 시즌), 허버트 바스(Herbert Waas)(82/83~85/86 시즌)와 공동 1위[36] 당시 분데스리가 2-5-7-2-6-4위의 성적을 기록하던 팀이었다.[37] 당시 분데스리가 1-10-5-12-4-5위의 성적을 기록하던 팀이었다.[38] 2021년 8월 기준 3위[39] 해당 시점에서 가장 최근 경기였던 84/85 시즌 분데스리가 21라운드 경기에서 차범근의 멀티골로 0:2로 패배했던 만큼 차범근에 대한 함부르크의 주의와 견제는 대단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3라운드 경기에서 차범근은 1골을 넣으며 팀의 3:1 승리를 이끌었으며 이후 1986년 1월 25일 분데스리가 20라운드에서도 2골을 넣으며 팀의 3:2 승리를 이끌었다.[40] 해당 사진에서 차범근 오른쪽에 안경을 쓴 인물이 구자철이 VfL 볼프스부르크에서 뛰던 시절 함께 했던 펠릭스 마가트 감독이다. 차범근과 같은 시기에 분데스리가에서 뛰었고 지도자 코스까지 함께 했던 만큼 꽤나 절친한 것으로 보이는데 구자철의 회고에 따르면 명단에서 제외되는 횟수도 많고 출전하게 되더라도 원치 않는 위치에서 뛰는 등 구단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시기에 차범근이 방문했는데 대뜸 "마가트 방은 어디냐"라고 물은 뒤 한동안 독대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경기부터 구자철이 원했던 위치에서 이전보다 더 많은 기회를 얻으며 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단순히 감독을 만나러 왔다기 보다 구자철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고 겸사겸사 감독을 만난 것이기 때문에 마가트 감독이 별안간 구자철을 중용한 것이 차범근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구단을 방문해서 감독의 방에 출입하고 독대를 할 수 있는 차범근의 위상을 알 수 있으며 자신을 이어 분데스리가에서 활약 중인 후배를 위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41] 당시 구시대적인 관습에 얽매어있던 한국 축구 관계자들과 갈등을 빚고 사퇴하기는 했지만 서정원과 신태용같은 선수들이 크라머의 축구 철학에 매료되어 스승으로 삼고 지도자 생활을 걷고 있다.[42] 차범근이 지도 받은 감독들 중 가장 많은 경기를 함께 하였다.[43] 미헬스 감독과 함께한 기간 동안 차범근은 27경기 3골을 기록했다.[44] 분데스리가 9경기+DFB 포칼 1경기[45] 차범근의 바이어 04 레버쿠젠 이적 후 첫 경기인 바이에른 뮌헨 전과 마지막 시즌 마지막 경기 카이저슬라우테른 전 날짜[46] 바이어 04 레버쿠젠 역대 분데스리가 득점 6위[47] 레버쿠젠에서 페널티킥 골 없이 50골 이상을 기록한 유일한 선수[48] PK 유도 1회[49] PK 유도 1회[50] PK 유도 1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