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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복음전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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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연혁3. 현황

1. 개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부활이니라.
-천국복음전도회의 표어

구인회가 창시한 사이비 종교.

2. 연혁

파일:external/www.sajc.or.kr/sj4.jpg
이름 구인회
출생 1941년 6월 3일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신대리
사망 1976년 2월 28일 (향년 34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서대문교도소
가족 어머니 이연실
결혼여부 불명, 자녀 불명
본관 불명[1]
교주 구인회는 일제강점기였던 1941년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신대리에서 태어났으며 12세에 부친을 여의고 모친 이연실 여사 밑에서 어렵게 성장하다가 부여중학교 졸업반 재학 중 모친을 따라 천부교장막성전의 신도로 있다가 1971년에 재림예수라고 자칭하면서 천부교와 통일교, 장막성전 이탈자를 모아 1972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구로동(현 구로구 구로동)에 '새마을 전도회'라는 이름으로 사이비 종교를 창설했는데 새마을 운동을 의식해서 이름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어찌되었든 여느 사이비 종교와 다를 바 없는 교주가 곧 신이라는 논리를 전면으로 내세우고 있으며 거기에 더해서 "십자가는 재수 없다"며 십자가 대신 태극기를 상징으로 내걸고 '태극기는 곧 하나님의 본체 형상'이라는 주장을 펼쳤다.[2]

구인회는 성경을 인용하여 자신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나타난 재림예수라고 공공연하게 공언했고 이른바 천국행 차표를 만들어 신도들을 상대로 팔아치웠다. 1973년 음력 11월 10일에 장막성전은 불지옥이 되고 그곳에 지상천국이 된다고 예언(?)했으나 그 예언이 당연히 빗나가자 천국복음전도회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후에도 시한부 종말론을 내세워 대구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1976년에 정부 당국의 대대적인 사이비 종교 일제단속에 걸려들어 서대문 교도소에 구속 수감되었다. ??? : ㅉㅉㅉ 사기를 치려면 좀 스케일을 크게 잡았어야지 20일 정도 심문을 받았다가 옥중에서 향년 34세로 사망했다.[3] 사후 경기도 모란공원묘지에 묻혔는데 묘비명에는 대놓고 '재림예수님의 묘'[4]라고 적어 놓았고 무덤에는 태극 문양을 새겨넣었다(...).#

리즈 시절에 시한부종말론을 내세워 신도 2천여명을 상대로 무려 억대[5]의 금품을 뜯어낸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때 '천국에는 먹을 것, 입을 것이 다 있다. 그러니 돈을 한푼이라도 가져가면 안 된다'는 말로 헌금을 갈취유도했다고 한다.

구인회가 사망한 후에는 최총일이 이끄는 '재림예수교회 천국복음전도회'와 박인수의 '한국예수교 천국복음전도회'의 두 분파로 나뉘어 활동 중이지만 이미 교주가 사망한 지 제법 오래되었고 두 분파 모두 큰 세를 떨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존재감은 미미하다. 서울 양재동에 초막절 회관(교회)이 있어 예배를 보러 다니는 신도들을 간혹 볼 수 있는데 양재도서관 바로 맞은편에 있는 누가 봐도 특이하게 생긴 "초막절"이라는 큰 간판이 붙은 교회다.

3. 현황

재림예수교 구인회 측과 신천지 측의 맞짱 코미디 동생뻘인 신천지 측에 교리배틀을 신청하기도 했다.

교주 사후 교세가 위축되었으나 2018년 10월 14일 오전에 소망교회, 오륜교회, 영락교회 앞에서 "여러분은 속고 있습니다!"라며 대형 구인회 사진과 '지상천국이 가까왔다! 재림예수를 믿으라!'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전도활동(?)에 나섰는데 주일 예배 시간 전후로 벌어진 이 활동으로 인해 교인들과 언쟁이 벌어지는 등 갖가지 소란이 일어났으며 무엇보다 타 이단에 비해 규모가 작은 단체가 공격적인 행보를 벌인 것에 놀라는 분위기였다. 간혹 아파트 단지에도 들어와 전단지를 놓고 가는 경우도 있다.


[1] 동명이인 LG 창업자 구인회처럼 능성 구씨일 가능성이 높으나 정확하게 알 수 없다.[2] 알 사람은 알겠지만 태극기는 도교에서 모티브를 따 왔다. 타 종교, 특히 우상숭배에 민감한 기독교를 표방하면서 상징으로 태극기를 쓴다는 게...[3] 당시 감옥의 환경이 열악한 데다 심문도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진 경우도 허다했고 심문한답시고 고문하는 경우도 빈번했으니 구인회도 이런 식으로 세상을 떴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사람은 민주운동가들이나 사회운동가들, 간첩 조작이나 무리한 수사로 억울하게 내몰린 사람들과는 달리 순전히 자업자득이었을 뿐이다.[4] 마침 구인회가 34세에 죽은지라 33세에 죽은 예수와 나이가 비슷해 끼워맞추는 데 쓰이곤 했다.[5] 참고로 1970년대에는 물가상승률이 높았기 때문에 일률화하기는 힘들지만 잘나가는 직장도 연봉이 수십만원 정도였다. 2020년 기준으로 환산할 시 수십억대에 달하는 금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