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10:54:00

출하점 전투

<colbgcolor=#C0C0FF> 출하점 전투
出河店之戰
시기 1114년
장소 중국 출하점 근방 압자하(鴨子河) 북안[1]
원인 완안아골타의 요(遼)에 대한 반기.
교전세력 여진
지휘관 금태조 완안아골타 소사선
병력 3,700명 호왈 10만명[2]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포로 다수 발생
물자 다수 망실
결과 완안아골타의 대승.
영향 완안아골타의 세력 확장. 금(金)제국 기틀을 마련.

1. 개요2. 발단과 전개
2.1. 요나라 군대가 10만이나 되었는가?
3. 결과

[clearfix]

1. 개요

당시의 강국이었던 요나라의 도통(都統) 소사선이 이끄는 군대가 출하점에서 후에 금나라를 개창한 완안아골타가 이끄는 완안부 여진에게 참패한 전투이다. 이 전투는 출하 전투, 출하점 전투, 출하점 대첩이라고도 한다.

2. 발단과 전개

사건의 발단은 요나라 천조제가 여진의 각 족장들을 한데 모아 연회를 열어준 것에서 시작된다.

요나라가 여진 족장들을 한데 모아서 연회를 열었다. 그런데 연회에 모인 여진족장에게 춤을 요구하는 등 무례한 요구를 했고, 이에 완안아골타는 완강한 태도로 거부해 버렸다. 이에 천조제는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신하들이 만류했기 때문에 그만두었다(굴욕을 참고 춤을 췄다는 말도 있다). 이로 인해 당시 초청돼있던 수많은 족장들 중의 한 명인 금태조 완안아골타는 잔치가 끝나고 돌아간 후 본격적으로 요나라에 반기를 들었고, 강녕주 전투를 거치면서 자신의 병력을 2,500명에서 3,700명으로 불리는 등 점점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이에 천조제는 도통 소사선(蕭嗣先)이 지휘하는 호왈 10만 대군을 보내면서 완안아골타를 공격할 것을 지시한다. 당시 완안아골타가 사용할 수 있는 병력은 중갑기병 3,700명이었다. 이에 주변 부족은 동요하였다.

완안아골타는 10만 병력이 모두 모이면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고 적들이 다 모이기 전에 적의 급소를 찌르기로 결정하였다. 전투가 벌어질 당시는 한 겨울이었고 특히나 만주 지방은 굉장히 추운 상태였다. 교전 직전에 완안아골타는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병사들에게 거짓말을 하였는데.
완안아골타: "내가 잠을 잤네.''
병사들: '...?'
완안아골타: "근데 누가 내 머리를 흔들더라."
병사들: '.....'
완안아골타 : "3번이나 흔들더군.''
병사들: '.....'

그때 여진족의 샤먼[3]해몽하며 말하길,
샤먼: "이는 하늘의 계시입니다. 밤중에 기습하여 승리할 것이며 다른 때에 공격하면 주군이 패배한다는 뜻입니다."

저렇게 신의 계시를 받았다면서 사기가 올라 밤에 요나라의 진영으로 기습했다. 완안아골타와 기병은 눈길을 뚫고 새벽 출하점 근방의 압자하 북안에 도착했다. 그 때 당시 요나라 군대의 정예부대는 얼음을 깨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금나라 군대를 보고도 압도적인 숫적 우세와 지리적 이점 때문에 적이 쉽사리 도강하지 않으리라고 방심했다. 그러나 완안아골타는 기병 1,200명을 추려 곧바로 도강했다. 먼 거리를 이동해서 지친 상태였던 요나라 진영은 갑자기 기습한 금나라 군대에 의하여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고, 이후 완전히 와해된 상태에서 금나라 기병들에게 신나게 각개격파를 당하였다. 금나라 군대는 알론락(斡論灤)까지 추격하면서 적의 패잔병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2.1. 요나라 군대가 10만이나 되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가능성은 거의 없다.

요나라 군대가 10만에 달했다는 자료는 금사(金史)에만 나오고[4], 정작 요사(遼史)는 7천명을 동원했다고 나온다. 구체적으로 거란족해족[5]으로 구성된 3천명, 중경(中京) 주둔 금군(禁軍) 2천명, 기타 각지에서 선발한 2천명으로 구성했다고 한다.[6] 10만 대군을 편성하려면 요나라가 동원할 수 있는 야전군이 5~6만[7]으로 추정되는 판에 10만을 채우려면 부득이 피지배민족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데, 요나라는 피지배민족을 노역자 또는 화살받이로 써먹을지언정 야전군으로 동원하는데는 극히 신중했다.

그리고 정말로 10만을 동원했었다면 출하점에서 패배한 그날로 요나라는 멸망 확정이었다. 다민족 국가인 요나라가 야전군이 소멸했다는 것은 피지배민족을 제어할 수단도 사라졌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나라는 출하점 전투 이후로도 이듬해 호보답강 전투에서 호왈 70만[8]의 병력을 동원했으며 향후 11년 더 금나라에 항전했다.

결국 출하점 전투는 금나라가 불가능한 승전을 거둔 것이 아니다. 비록 병력 열세에 처하긴 했으나 그것이 흔히 알려진 1:27의 열세는 아니었으며, 병력의 질과 기민한 기동 및 기습으로 열세를 뒤집기 충분한 전투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훗날 여진족의 후예 만주족명나라를 상대로 벌인 사르후 전투와 비슷하게, 출하점 전투의 의의는 요나라가 누리던 압도적 우위가 사라지고 균형이 맞춰졌다는데 의의가 있다.

3. 결과

이 전투에서 여진족 병사들이 포로로 잡은 요나라 병사와 수레, 말, 양초가 수도 없이 많았다고 하며, 이 전투로 완안아골타는 일약 여진족내에서 높은 명성을 얻었고 주변 부족들이 잇달아 부하가 되기를 자처, 휘하 여진족 병사들이 약 1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커진 세력을 바탕으로 요의 요충지인 황룡부를 점령해 금제국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이때 철부도(여진 중장갑기병)의 우월성을 세상에 알렸다. 이 당시 철부도는 동양 최고수준의 방어력을 갖춘 기병대였다. 그리고 요나라는 또 한번 호보답강에서 출하대첩 못지 않은 참패를 겪으면서 사실상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9]

파일:external/thumbnail.egloos.net/a0048039_51a84c8fb6093.jpg
헤이룽장성에 있는 출하점 대첩 기념비


[1] 지린성과 헤이룽장성 사이에 있는데 정확히 어느 지점인지는 불명이다. 일단은 헤이룽장성에서 기념하고 있다. 압자하는 금나라와 원나라에서는 송와강(宋瓦江)이라 불렀고, 명나라에서는 송화강이라고 불렀다.[2] 실제 규모에 의문이 있다.[3] 당시 여진족은 샤머니즘을 믿었는데 샤먼이라는 단어 자체가 퉁구스어족 언어에서 "지식을 가진 자"라는 뜻의 샤만(šamán)에서 유래했다. 여진족이 불교를 신봉한 것은 관내로 진출한 후의 일이다. 반쯤 야만족에 가깝던 대초원의 유목민과 수렵민 사회에서 샤먼의 위상은 매우 높았으며 유명한 칭기즈 칸마저 샤먼인 쿠쿠추(Kököču Teb-Tenggeri)의 도움을 받아 몽골 초원의 여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어 끝내 몽골을 통일할 수 있었다. 여담으로 몽골 통일을 완수한 후 칭기즈 칸이 내린 가장 큰 결단이 쿠쿠추를 주살한 것이었다.[4] 금사 권2 갑오년 11월[5] 거란족과 다른 종족으로, 비록 피지배민족이긴 하지만 거란족 다음으로 높은 특별대우를 받았다.[6] 요사 권27 천경 4년 10월[7] 윤영인(2021), 동아시아 세력균형과 “정복왕조” 거란의 군사력.[8] 요사와 금사에서는 70만, 거란국지 기록을 참고하면 실제 병력은 15만 1천으로 보인다.[9] 호보답강 전투 때 요나라의 군대 수는 70만, 금나라의 군대 수는 2만(요나라의 군대는 20만이라고 하기도 한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