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홍콩의 없어진 명소 | ||
<colbgcolor=#777,#555><colcolor=#fff> 이미 철거된 건물 | 구룡전화빌딩 | 코즈웨이베이 서점 |
진행 중인 건물 | 초이홍 아파트 | 췬완 치안법원 |
<colbgcolor=#f5f5f5,#191919> 췬완 치안법원 荃灣裁判法院 Tsuen Wan Magistrates' Courts | |
기간 | [[홍콩| ]][[틀:국기| ]][[틀:국기| ]] (1971년-2016년) [[홍콩| ]][[틀:국기| ]][[틀:국기| ]] (2021년~임시)[1] |
행정구역 | 신계 췬완구 |
면적 | - |
층수 | 3층 |
위치 | |
[clearfix]
1. 개요
"홍콩에서 유일하게 엘리베이터가 없는 법원이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올라가면 문득 깨달음이 느껴집니다. 각 법정 밖의 대기 로비는 일렬로 유리창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채광도 좋고, 조명 없이도 로비를 밝힐 수 있어요. 투명성 덕분에 법원은 덜 우울하고 억압적이지 않게 느껴지고, 덜 폐쇄적인 느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사법 시스템에 대한 정부의 견해를 반영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 청루이파이
― 청루이파이
취엔완 치안법원은 1970년대의 스타일을 대표한다. 사법제도가 해체되면 역사적 잘못이 생긴다.
― 황 구이귀 #
― 황 구이귀 #
홍콩의 대표적인 법원이자 가장 작은 규모의 법원. 무단횡단이나 공공장소 내 음식 섭취, 고가매입과 같은 비교적 사소한 범죄를 처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2. 전경
3. 역사
3.1. 이소룡 사망사건
1973년 9월 3일, 이소룡의 사망 원인 심리가 열렸다. 전후 총 7일간의 심리, 중간 12일간의 휴정 기간을 포함해 동쯔광(由董梓光) 판사가 주재하고, 정부의 검사와 3명의 배심원이 심리를 이끌었고, 법정에 출두하여 증언한 증인은 연달, 조문회, 정호, 이충천, 주박회 의사, 구급대원 등 총 10여 명이었다.법원은 증인과 전문가와 부검의를 소환한 후, 법의관 예즈펑, 롱퍼드 의사, 우셴팅 의사, 그리고 런던 대학 법의학 로널드 티 리에 교수를 비롯한 보험사, 각 당사자의 변호사 대표가 법정에서 질문하고 몇몇 미국 의사들의 서면 보고서를 주고받을 수 있게 했다.
재판 첫 이틀간 추엔완 지방법원은 인산인해였고, 법정 안의 방청석 역시 빈자리가 없었으나 휴정 후 재개장하자 그 사이 사랑하는 아내에게 불성실하였다는 사실이 수면위로 드러나는 등 한동안 대부분의 홍콩인의 비난을 받으며 군중은 점차 흩어졌고, 5일 후의 판결일까지 법정 내 공공란에도 기자 몇 명만 남았다.
9월 24일, 법원 내 사망원인재판소는 이소룡이 사고로 사망했으며 자살하거나 살해할 가능성은 없다고 판결했다. 의학적 원인은 이소룡이 임종 전에 복용한 각종 약물 중 특정 성분이 포함되어 과도한 뇌부종(cerebral edema)으로 사망을 유발하여 사망했으며 대마초와는 관련이 없다고 판결했다. 이때 이소룡의 체내에서 소량의 대마초가 검출되었는데 의문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여담으로 이 사태로 홍콩 내 언론에 따르면 싱가포르가 쌍절봉을 금지무기로 분류했다고 보도했으며, 어떤 문헌에는 나중에 미국의 몇몇 큰 주들은 뉴욕처럼 이미 쌍절봉을 불법무기로 지정하는 입법을 시작했다고 한다.#
4. 특징
위에서 말했듯 알루미늄 패널로 덮인 저층부 외관과 상층의 한 줄로 길게 늘어선 유리창이 특징이다. 그로 인한 내부 채광은 덤. 이는 다른 홍콩 내 법원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자, 유일하게 엘리베이터가 없는 법원(…)이라는 특징도 있다.홍콩건축가학회 회장 이국흥은 법원의 외관 디자인이 시대에 따라 다르다고 말한다. 폐쇄적이고 위엄을 느끼게 하던 구시대와 달리 6, 70년대에는 개방적이고 계몽적인 경향으로 바뀌었고, 디자인에는 채광이 더 많았다는 것. 예를 들어 추엔완 치안법원 상층에는 유리창이 한 줄로 늘어서 있어, 탁 트인 느낌을 자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