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ddd,#000><colcolor=#000000,#dddddd> 카미유 데물랭 Camille Desmoulins | ||
본명 | 뤼시생플리스카미유브누아 데물랭 Lucie-Simplice-Camille-Benoît Desmoulins | |
출생 | 1760년 3월 2일 | |
프랑스 왕국 피카디 기즈 | ||
사망 | 1794년 4월 5일 (향년 34세) | |
프랑스 제1공화국 파리 콩코르드 광장 [1] | ||
국적 | [[프랑스 왕국| ]][[틀:국기| ]][[틀:국기| ]] → 프랑스 제1공화국 | |
가족 | 배우자 뤼실 두플레시 | |
직업 | 정치인, 기자 | |
소속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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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희망의 청색 리본을 달고 무기를 드십시오!"
1789년 7월 12일의 연설에서 시민들의 무장을 호소하며
1789년 7월 12일의 연설에서 시민들의 무장을 호소하며
프랑스의 혁명가이자 언론인이다. 프랑스 혁명 시기 중요한 역할을 해냈으나 자코뱅 내의 파벌 갈등 때문에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숙청당했다.
2. 생애
1760년 기즈 지역의 부르주아 가문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출생했다. 아들의 출세를 열망했던 그의 아버지 장 브누아 데물랭은 어린 아들을 파리 대학교 부설 콜레주 드 루이르그랑으로 보냈고, 여기서 그는 절친한 친구이자 훗날의 정적이 되는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와 교제하게 된다.[2] 처음 그는 변호사가 되고자 했고 실제로 1785년에는 변호사 자격증을 얻는데 성공했으나, 심각한 말더듬이 증상으로 인하여 때문에 언론인으로 직종을 바꾸어 활동했다. 이미 학창시절부터 구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로 명성을 떨쳤던 데물랭은 1789년 초부터 달아오르는 혁명의 조짐을 눈치채고 팜플렛 <자유 프랑스>를 저술하는 등 혁명 운동을 지원하였다. 같은 해 3월 프랑스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논의하고자 국왕 루이 16세는 삼부회를 개최하였고, 기즈 지방의 제3신분 대표자 중 일원으로 데물랭은 삼부회에 참석한다.[3]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데물랭은 무명의 언론인에 가까웠으나, 삼부회 안팎에서 데물랭이 보여준 모습에 감명을 받은 미라보 백작이 그를 발탁하여 자신이 운영하는 신문에 글을 기고하게 하면서 데물랭은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다.[4]1789년 7월 12일, 자크 네케르의 파면 소식이 들려오자 그는 팔레 루아얄 광장으로 가 군중들 앞에 섰다. 거기서 그는 군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무장봉기를 선동하는 연설을 했다. 그의 연설에 고무된 시민들은 무기고에서 무기를 꺼냈고 마침내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해 점령하기에 이른다. 이 일로 그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이후 언론인으로서 <프랑스와 브라방의 혁명>, <파리 시민들에게 드리는 글> 등을 쓰며 열정적으로 혁명을 옹호했다. 또 바렌느 배신사건 이후부터는 루이 16세를 폐위와 공화정 수립을 주장했다. 이러한 활동을 거치며 데물랭은 자코뱅과 인연을 맺었고, 그 중에 조르주 당통과 매우 가까워졌다. 국민공회가 세워지자 그는 정치 활동과 언론 활동을 번갈아하며 지롱드당을 비판했으나,1793년 자코뱅이 권력을 독점하고 공포 정치의 시대가 시작되자 당통이 이끌던 관용파의 일원으로써 자코뱅 내에서도 가장 급진주의적이었던 에베르파와 격앙파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1793년 12월 데물랭은 <늙은이 코르델리에(Le Vieux Cordelier, 르비외 코르델리에)>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코르델리에 씨라는 필명을 사용하여서[5] 공포정치를 청산하고 이상적인 혁명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강하게 주장한다. 결국 공포정치를 주도하던 로베스피에르와의 사이는 서서히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1794년 2월에 출간된 <늙은이 코르델리에> 3호판이 이십년 가까이 이어져 온 데물랭과 로베스피에르 사이의 우정을 끝내놓는다. <늙은이 코르델리에> 3호권에서 데물랭은 타키투스의 글을 패러디하여 작금의 프랑스 상황은 '너무 부자라서, 너무 가난해서, 너무 멜랑콜리해서, 너무 방종해서 반혁명분자가 될 수 있다.'라고 비꼬았다.[6] 에베르 일파에 대한 비난은 묵인했던 로베스피에르이지만, <늙은이 코르델리에> 3호권의 글은 공안위원회와 로베스피에르 자신을 겨냥한 것이 분명했기에 로베스피에르는 이를 묵과할 수 없었고 데물랭에게 자코뱅 클럽에서 해당 글을 태우라고 명령했지만 데물랭은 아래의 말과 함께 그 지시를 거부한다.
Brûler n'est pas répondre
태우는 것은 답이 아니다.[7]
태우는 것은 답이 아니다.[7]
1794년 2월에 자코뱅 클럽에서 축출된 데 이어, 3월 31일 데물랭은 당통과 함께 부패 및 반혁명의 혐의로 체포된다.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는 재판에서 당통과 데물랭을 비롯한 피고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증인을 내세울 권리조차 거부당했고, 사형 판결과 같은 날인 4월 5일에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그의 아내였던 뤼실 데물랭 역시도 폭동을 일으켜 감옥에서 남편을 구출하려고 시도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고 남편이 처형된 지 8일 후에 단두대에서 처형된다.[8][9]
3. 기타
- 당시 정치인들은 대부분 성으로만 불렸지만, 데물랭은 특이하게도 '카미유' 또는 '카미유 데물랭'으로 주로 불렸다. 데물랭이라는 성의 다른 유명인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카미유 데물랭이 당대인들에게 어린애 취급(...)을 받았던 게 이유인 듯.
[1] 당시 명칭은 혁명 광장 (Place de la Revolution).[2] 로베스피에르와 데물랭이 정적 사이가 된 것은 그들의 삶 속에서 채 1년이 되지 않는다. 그전까지는 오히려 가장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데물랭의 아들의 대부가 바로 로베스피에르였으며, 가난한 노총각 로베스피에르를 자주 가족들의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한 것도 데물랭이었다.[3] 정확히는 아버지가 선출되었으나, 건강 문제로 인하여 카미유가 대신 참석했다.[4] 그런데 정작 데물랭 본인은 미라보 백작이 사망한 뒤 그를 폭풍 디스한다. 다만 미라보 백작은 입헌군주국을 주장하는 지롱드파였고 데물랭은 공화정을 주장하는 자코뱅파였기에 정치적 관점으로 인한 대립은 불가피한 일이었긴 하다.[5] 코르델리에라는 명칭은 프랑스 혁명 직후인 1790년 봄에 조르주 당통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클럽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참고로 코르델리에 클럽이라는 명칭은 별명이었고, 이 클럽의 정식명칭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 옹호자들의 클럽(Société des Amis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 덧붙여서 이 잡지의 편집자가 카미유 데물랭인거는 모두가 알고 있던 사실이기 때문에 말이 가명이지 사실상 실명으로 글을 쓴 거나 마찬가지였다.[6] 참고로 원문은 타키투스가 티베리우스 황제 말년의 공포정치의 희생자가 철저하게 제멋대로였다는 사실을 비판하고자 쓴 글이다.[7] 이 글은 장 자크 루소가 원작자이다. 로베스피에르가 루소의 열렬한 신봉자이자 루소의 이념에 맞추어서 신생 공화국을 설계하고자 노력했던 점을 고려하면, 데물랭은 "지금 이 정국이 루소가 원하던 그 나라겠냐?"라고 비꼬았던 것이다.[8] 덧붙여서 자신의 사형 판결에 대해서는 비교적 담담했던 데물랭이 아내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이성을 잃고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길에 "싫어, 난 죽고 싶지 않아! 제발 살려 줘!"라고 울부짖으며 난동을 피워서 간수들이 두들겨 패버려서(...) 진정시켜야 했다.[9] 또한 뤼실 데물랭은 별명이 '부드러운 루시'일만큼 유순하고 집에서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성격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당시에도 뤼실 데물랭의 혐의에 대해서는 비웃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결국 정적의 부인이라는 이유로 같이 엮어버린 셈인데, 당시 프랑스의 공포 정치가 얼마나 미쳐돌아가고 있었던 건지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인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