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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e0e0e0> 칼헤르만 훌락 Karl-Hermann Flach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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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9년 10월 17일 |
바이마르 공화국 쾨니히스베르크 | |
사망 | 1973년 8월 25일 (향년 43세) |
서독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 |
국적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가족 | 칼 훌락(Carl Flach) (아버지) |
학력 | 힌덴부르크 고등학교 (중퇴) 괴테 고등학교 (졸업) 베를린 자유대학교 (정치학 학사) |
종교 | 개신교 |
직업 | 정치인, 기자 |
소속 | [[자유민주당(독일)| 자유민주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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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유주의란 개인의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며, 이는 변화하는 사회적 상황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주의자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Noch eine Chance für die Liberalen)》中
독일의 자유주의 성향 정치인.《자유주의자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Noch eine Chance für die Liberalen)》中
2. 생애
칼헤르만 홀락은 바이마르 공화국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1944/45년에는 국민돌격대와 히틀러유겐트에 소집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로스토크로 도망쳐서 그곳에 눌러앉아 메클렌부르크 자유민주당(LDP)에 가입, 그곳의 언론 담당자가 되었고, 동시에 《북독일 신문(Norddeutsche Zeitung)》의 일종의 편집장을 맡았다.1940년대 후반, 훌락은 “현대 자유주의는 마르크스보다 진보적이다”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동독 당국에 찍히게 되었다. 1949년 4월 말, 훌락은 메클렌부르크 LDP의 청년 대표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지만, 동독 당국의 감시는 점점 더 심해졌다. 결국 그는 체포 위협을 피해 1949년 10월 말 친구들과 함께 서베를린으로 탈출했다. 그곳에서 그는 즉시 독일 청년민주당(Deutsche Jungdemokraten)에 가입했다.
전쟁으로 인해 아비투어를 치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훌락은 독일 정치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는 1953년 독일 자유주의 학생 연맹(Liberaler Studentenbund Deutschlands, LSD)의 공동 창립자 중 한 명이 되었으며, 학생 의회의 자유주의 대표단을 이끌었다. 같은 해, 그는 정치학 학위를 취득하며 학업을 마쳤다.
1954년 결혼을 하고 친자유민주당 성향의 언론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56년부터 훌락은 자유민주당 중앙당사에서 언론 담당자로 활동했으며, 그 과정에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에서 독일 기독교민주연합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으로의 정권 교체를 직접 경험했다. 이는 후에 그의 정치적 신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훌락은 뛰어난 지성, 날카로운 논리, 그리고 인간적인 매력을 갖춘 선구적 사상가로 평가받았다. 이러한 능력을 인정받아 그는 1959년 자유민주당 연방 사무국장(FDP-Bundesgeschäftsführer)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1962년 당시 당수였던 에리히 멘데(Erich Mende)와의 노선 차이로 인해 사임했다. 훌락은 자유민주당이 기민당과의 연합에 국한되지 않고, 사민당과도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멘데의 국가주의적 자유주의 노선과 충돌했다.
훌락은 정치계를 떠나 프랑크푸르트 룬트샤우(Frankfurter Rundschau)의 정치 편집자로 전향했다. 그는 내부 정치부장, 부편집장, 그리고 경영자로 활동하며 언론의 자유를 시민 자유의 중요한 부분으로 보았다. 1959년 자유주의 잡지 《리베랄(liberal)》의 창립에 참여했고, 주요 저자로 활동했다. 1969년 빌리 브란트와 협력하여 자유민주당과 사민당 간의 사회자유주의 연립정부 구성에 큰 역할을 했다.
1971년, 훌락은 자유민주당의 첫 사무총장(Generalsekretär)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1972년 연방의회가 8.4%의 지지를 얻으며 성공을 거두자, 그는 연방의회 의원 및 FDP 원내부대표로 활동하게 되었다.
1973년 10월 25일 44세의 나이에 지병인 결핵으로 사망했다.[1][2] 프라이부르크 인근 뵈칭겐에 안장되었다.
3. 여담
- 그를 기리기 위해 카를 헤르만 훌락 재단(Karl-Hermann-Flach-Stiftung)이 설립되었으며 매년 카를 헤르만 플라흐 상을 수여하고 있다.
- 그가 쓴 저서로는 《자유주의자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Noch eine Chance für die Liberalen)》가 있다. 자유주의의 핵심 가치를 100여 페이지에 걸쳐 설명하며, “녹색 성경(Grüne Bibel)”이라는 별칭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