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11 19:29:36

케이휘스레브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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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야스 웃 딘 카이쿠스라우
페르시아어, 아랍어 : غياث الدين كيخسرو
터키어 II. Gıyaseddin Keyhüsrev

생애 1220년 ~ 1246년
재위 1237년 6월 ~ 1246년

1. 개요2. 생애
2.1. 바바이 반란2.2. 쾨세다으 전투 (1243년)2.3. 몽골 제국의 봉신
3. 사후

1. 개요

룸 술탄국의 11대 술탄. 카이쿠스라우 1세로도 불린다. 즉위 직후 수피 계열의 바바이 반란을 맞아 국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1243년 몽골 제국이 침공하자 쾨세다으 전투에서 맞섰으나, 대패하고 몽골에 복속하였다. 이로써 룸 셀주크는 반세기 가량의 전성기를 뒤로 하고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2. 생애

케이쿠바트 1세와 그리스계 마흐파리 하툰 간의 아들로, 장남이었으나 아이유브 왕조의 공주 아딜라 하툰[1]의 소생인 동생 이즈 앗딘 (이제틴)에 밀려 후계자로 지목되지 못하였다. 대신 1226년 케이휘스렙은 부왕에게서 막 정복된 에르진잔의 영지를 하사받았고, 장군 캄야르를 따라 에르주룸아흘라트 점령에 종군하였다. 10대의 케이휘스렙은 알레포의 아이유브 왕공 알 아지즈 무함마드의 딸과 결혼하여 자신의 위상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1236-37년 몽골-조지아 연합군이 아나톨리아 동부를 침공하여 시바스말라티야에 이르자, 케이쿠바트는 조지아에 대한 보복 원정에 나섰다. 이에 조지아 여왕 루수단은 딸 타마르를 케이휘스렙과 약혼시키며 휴전을 청하여 수용되었고, 1240년 둘은 결혼하였다.

파일:룸 셀주크.jpg
케이휘스렙 치세의 디르함 은화. 이슬람권 답지 않게 개로 보이는 사자와 태양신 표식이 인상적이다.[2]

조지아 진군 직후 부왕이 사망하자, 성년에 이른 유일한 왕자이던 케이휘스렙은 에미르들의 지지와 함께 동생 이제틴을 누르고 술탄이 되었다. 치세 초반 케이휘스렙의 조정은 사냥 총관 겸 내무장관인 사드 앗 딘 (사뎃틴) 쾨펙의 주도 하에 놓였다. 반대파를 암살 혹은 처형하며 전횡을 일삼던 쾨펙은 1년만인 1238년 처형되었고, 케이휘스렙이 친정에 나섰다. 위세를 올리기 위해 그는 아이유브령 디야르바크르를 점령하였다.

2.1. 바바이 반란

11세기 이래로 아나톨리아에 유입된 튀르크멘 부족들 중 셀주크 조정에 편입되지 못한 이들은 주로 산지와 변경 지역에서 페르시아화 된 중앙군에게 천대를 받으며 살았다. 축적되던 그들의 불만은 (바바 혹은 데데란 이름으로) 이슬람화된 샤먼의 후예인 바바 이샤크가 스스로 라술 (선지자)임을 선포하며 그들을 선동하자 드디어 폭발하였다. 1240년 타르수스 동쪽의 카파르수드에서 시작된 튀르크멘 반란은 아마시아로 이어졌고, 말라티아와 아마시아의 셀주크 정규군은 격파되었다. 그후 반군은 카이세리, 시바스, 토카트 등 룸 셀주크의 핵심 지역들을 장악하였다.

비록 1241년 수괴 바바 이샤크가 사로잡혀 처형되었지만 반란은 이어졌다. 케이휘스렙은 프랑크 용병을 고용하는 등 총력을 다한 끝에 마침내 1242-43년 겨울 무렵 반군을 크르셰히르 인근에서 포위, 섬멸할 수 있었다.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그동안 룸 셀주크는 크림 반도의 교두보를 잃었다. 특히 본토인 아나톨리아는 큰 피해를 입었고, 동부 지방의 방어선은 붕괴하였다. 이를 틈타 1242년 말엽 캅카스의 몽골군 사령관 바이추가 에르주룸을 공격하였고, 도시는 손쉽게 함락되었다. 룸 셀주크의 취약함을 인지한 바이추는 아나톨리아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을 준비하였다.

2.2. 쾨세다으 전투 (1243년)

몽골의 악명을 익히 들었던 케이휘스렙은 셀주크 정규군과 튀르크멘 보조병은 물론, 주변 제후들에게도 병력 파견을 요구했다.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는 1400명, 트라페주스 제국은 200명, 압하지아 공국은 3000명, 알레포의 아이유브 왕공은 1000명의 기병대 제공이 청구되었다. 그중 몽골과 협상에 나선 아르메니아를 제외한 4200명의 기병이 술탄에 합류하였다. 1243년 봄, 시바스에 6만에 달하는 대군을 집결하자 케이휘스렙은 동진하여 에르진잔과 귀뮈쉬하네 사이의 쾨세 다으 (대머리산)에서 3만의 몽골군과 조우하였다.

바이추는 거짓 후퇴 작전을 펼쳤고, 의욕이 넘치던 케이휘스렙은 원로 장군들의 반대에도 (조지아 부대를 포함한) 2만 정예병을 보내어 몽골군을 추격하게 하였다. 철수하던 몽골군은 셀주크 군이 지치자 말머리를 돌려 그들을 포위하여 섬멸하였고, 압하지아 왕공 다르빈 셰르바쉬데가 전사하였다. 이를 지켜본 나머지 군대는 흩어져 도주하였고, 케이휘스렙 역시 토카트의 보물과 하렘을 챙겨 앙카라로 피신하였다. 몽골군은 시바스와 카이세리를 점령하였고, 뒤이어 콘야를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이후 바이추는 아제르바이잔의 무간 평원으로 철수하였다.

2.3. 몽골 제국의 봉신

전투 후 몇달이 지난 1243년 여름, 와지르 (재상) 무핫다브 앗 딘 (뮈헤제붓딘)과 군사령관 샴스 앗 딘 이스파하니는 바이추와 연락하여 더이상의 파괴를 멈추고 케이휘스렙의 왕위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몽골에 복속하고 대량의 연공을 바치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그후 바투 칸에 의해 제안이 승낙되자 케이휘스렙은 콘야로 귀환하여 몽골의 영향력 하에 술탄위를 유지하였다. 한편 조지아, 트라페주스, 아르메니아 등 기존 제후국들 역시 룸 셀주크 대신 몽골에 복속하였다. 상심에 빠져 있던 케이휘스렙은 1246년, 불과 26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3. 사후

그는 10세 전후의 세 아들들 중 조지아 공주 타마르 (구르주 하툰) 소생의 막내인 알라웃딘 카이쿠바드를 후계자로 지목했는데, 실권을 장악한 샴스 앗 딘 이스파하니는 그 대신 11세의 장남 카이카우스 2세를 술탄으로 옹립하였다. 다만 바투가 옹립한 술탄이 마음에 들지 않던 대칸 구유크 칸은 바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차남 클르츠 아르슬란 4세를 술탄으로 봉하였다. 1249년에는 카이쿠바트 2세 역시 공동 술탄이 되었다. 다만 삼형제의 실권은 약하였고, 그마저도 1266년 클르츠 아르슬란 4세가 권신 페르와네 (무이눗딘 쉴레이만)에 살해되며 완전 상실하게 된다.

[1] 알 아딜의 딸로, 두 아들 낳음[2] 태양신 표식은 그가 사랑한 조지아 공주 타마르의 상징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