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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명단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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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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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뤼슈 Coluche | |
본명 | 미셸 제라르 조제프 콜루치 (Michel Gérard Joseph Colucci) |
출생 | 1944년 10월 28일 |
프랑스 파리 파리 14구 | |
사망 | 1986년 6월 19일 (향년 41세) |
프랑스 Opio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부모 | 아버지 오노리오 콜루치(1916~1947) 어머니 시모느 부이 콜루치(1920~1994) |
배우자 | 베로니크 콜루치 (1975년 결혼~1981년 이혼, 1948~2018) |
자녀 | 아들 로맹 콜루치(1972년 7월 29일생) 아들 마리우스 콜루치(1976년 10월 16일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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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어 위키콜뤼슈는 프랑스의 배우이자 희극인이다. 트레이드 마크는 딸기코.
1969년에 데뷔한 이래, 인기 코미디언 및 배우로서 활동했으며 스스로도 "나는 무례한 사람"이라고 인정할만큼 자유로운 표현을 쓰면서도[1] "저속한 유머"를 하지 않고 사회적인 금기와 도덕적, 정치적 가치를 조롱하는 냉소적이고 새로운 코미디 스타일을 프랑스에 제시했다.
2002년에 콜뤼슈를 기념하여 그가 태어나고 평생을 살았던 파리 14구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겨났다.
2005년, 콜뤼슈는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순위에서 5위에 올랐다.
2008년, 콜뤼슈의 전기 영화 Coluche, l’histoire d'un mec이 개봉했다.
2. 생애
콜뤼슈는 1944년 10월 28일, 이탈리아인 아버지 오노리오와 프랑스인 어머니인 시모느 부이에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선생님이나 동료들을 웃기는데만 관심을 보였으며 결국 시험에 계속해서 낙제한 결과 1958년 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을 끝으로 학업을 그만둔다.이후 콜뤼슈는 불량한 애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가벼운 범죄들을 저질러서 경찰들에게 자주 붙잡혔다고 한다. 다만, 주로 소매치기 등의 경범죄였기 때문에 훈방 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후에 코미디언으로 대성하게 되면서 콜뤼슈는 자신의 이러한 과거에 대해 부끄러워하며 후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콜뤼슈의 미래를 걱정한 어머니의 감시 하에 어머니가 운영하던 꽃집에서 일하게 된 것을 시작으로 콜뤼슈는 본격적으로 생업에 뛰어든다. 이후 콜뤼슈는 카페 웨이터, 음식 배달원, 사진사 조수, 과일가게 직원 등 다양한 직업들을 거치면서 점차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연예인으로서의 삶을 꿈꾸기 시작했다. 21살의 생일에는 콜뤼슈의 어머니가 그에게 500프랑 한도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수표를 지급했고 콜뤼슈는 이 돈으로 기타를 사기도 하였다.
그 결과 배우 혹은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집에서 독립한 그는 우여곡절 끝에 1969년 Café de la Gare의 무대에서 코미디언으로 데뷔했으며 경력 초기인 1970년부터 "콜뤼슈(Coluche)'라는 예명을 쓰기 시작했다.
콜뤼슈가 처음 대중들의 주목을 받게 한 코미디 스캐치 C'est l'histoire d'un mec (It's the story of a guy). 웃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에 대한 개그다.
7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텔레비전에 출연하기 시작한 콜뤼슈는 1974년 C'est l'histoire d'un mec이라는 스캐치로 처음 대중들에게 주목을 받았고 1975년, 게임 쇼를 풍자한 스케치 Le Schmilblick로 유명해졌다. 같은 해에 콜뤼슈는 여자친구 베로나크 콜루치와 정식으로 결혼한다.
1976년까지 각종 영화에 조연으로서 출연한 콜뤼슈는 1977년 마크 모네와 함께 Vous n'aurez pas l'Alsace et la Lorraine라는 영화를 공동 감독하면서 본격적으로 주연으로 데뷔하였다. 이후 콜뤼슈는 70년대 말, 프랑스의 코미디 영화 전문 감독 클로드 지디[2]가 감독한 여러 작품에 출연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1978년 4월 24일부터 콜뤼슈는 Europe1 라디오에서 아나운서 로버트 월러(Robert Willar), 배우이자 가수인 제럴드 란빈(Gérard Lanvin)과 함께 오후 3시 30분에서 5시까지 "우리들은 질책받으려고 온게 아닙니다(On n'est pas là pour se faire engueuler)"라는 제목의 라디오를 진행하며 도발적인 발언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콜뤼슈의 이러한 유머를 받아들이지 못한 라디오의 경영진들은 1979년 6월 24일 방송을 마지막으로 그를 해고했다.
1980년 1월 RMC 방송국으로 자리를 옮긴 콜뤼슈는 오후 12시부터 1시까지 라디오를 진행하지만 카롤린 공녀의 방탕한 사생활을 창녀에 빗대어 까는 멘트를 한 것이 문제가 되어 대중들의 비난을 받은 결과 프로그램에서 3개월만에 강판되고 한동안 프랑스의 모든 라디오와 TV에 출연을 금지당한다.
1980년 10월 30일, 콜뤼슈는 “콜뤼슈, 지원자들 중 유일하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는 자("Coluche, the only candidate who has no reason to lie")라는 표어로 1981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기자회견을 가진다. 대다수의 프랑스인들은 그의 출마를 조크로 받아들였지만 여론조사에서 프랑스인들 중 16%가 그에게 투표할 의향이 있다고 응답하였으며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3],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4], 질 들뢰즈 같은 프랑스의 지식인들도 콜뤼슈의 정치 참여를 응원했다. 그러자 프랑수아 미테랑 측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콜뤼슈에게 적의를 보이면서 각종 공세를 펼쳤고 자신의 매니저 르네 골린(René Gorlin)이 살해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자 결국, 콜뤼슈는 1981년 3월 16일 후보 사퇴 의사를 내비치고 연예인으로서도 은퇴를 발표하였다. 1981년 11월 즈음 콜뤼슈는 새 연인인 여배우 프레드 로마노(Fred Romano)와 살림을 차렸고 1981년 12월 3일에 아내 베로나크 콜루치와 이혼했다.
이후 콜뤼슈는 대중매체에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과들루프 섬에서 은둔하며 신발 만들기에 몰두하였다. 그러는 한편, 콜뤼슈는 그의 절친한 친구인 배우 파트릭 드베르(Patrick Dewaere) 부부가 콜뤼슈의 초대로 섬에 머물렀을 때를 기점으로 파트릭의 부인과 불륜 관계가 되었고 그 결과 1982년 7월 16일 파트릭 드베르가 콜뤼슈가 선물로 준 소총으로 자살하는 스캔들이 발생한다. 이후 한동안 콜뤼슈는 심한 우울증과 알콜 중독에 시달렸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1983년부터 콜뤼슈는 다시 대중매체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첫번째 시도로 콜뤼슈는 1983년 6월 18일 미셸 플라크(Michel Polac)가 진행하는 TV 쇼 Droit de réponse에 게스트로 출연하면서 자살 시도를 포함한 자신의 암울한 삶을 풀어내었다. 그러나 쇼에 출연한 동료 연예인들은 그에게 적의를 보였으며 코미디언 장 이브 라페즈(Jean-Yves Lafesse)[5]는 콜뤼슈를 향해 "당신은 더 이상 코미디언으로서 우리들을 웃기지 못한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1983년 11월 5일 친구인 만화가 장 마크 라이저(Jean-Marc Reiser)의 사망을 계기로 술을 끊은 콜뤼슈는 영화 꼭두각시여, 안녕(Tchao Pantin)에서 인상적인 정극 연기를 펼치며 1984년 세자르 영화제에서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마침내 성공적으로 연예계에 복귀하였다. 1984년 9월 16일 콜뤼슈는 다시 파리로 거처를 옮겼고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행사들에 연이어 참여하였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그의 관심은 계속해서 발전되어갔고 그 결과 1985년, 콜뤼슈는 대기업의 기부를 통해 받은 돈과 자신의 사재를 합쳐서 3억 원의 자본금으로 빈민층에게 무료 급식을 지급하는 사랑의 식당(Restaurants du cœur)#을 창설하여 본격적으로 자선 사업을 펼치기 시작했다.
콜뤼슈는 1985년 7월 8일부터 1986년 3월 19일까지 Europe1 라디오에서 송출된 "모두를 위한 무언가(Y'en aura pour tout le monde)"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다시 한번 라디오 진행자로 복귀했다. 자선단체 사랑의 식당(Restaurants du cœur)을 세운다는 것을 처음으로 공표한 것도 해당 방송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이 때 콜뤼슈는 음식 낭비를 막고 식량은행을 만드는 일에 모두가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다. 한편, 이 즈음 두번째 부인 프레드 로미노와 헤어진 콜뤼슈는 1985년 9월 25일 동료인 남성 코미디언 티에리 르뤼롱(Thierry Le Luron)과 혼인신고를 했다는 것을 발표하면서 화제의 중심에 올랐다.
2.1. 사망
콜뤼슈의 사망을 추모하는 곡인 Putain de camion(1988)
1986년 6월 19일, 콜뤼슈는 친구들과 함께 오토바이를 몰고 가던 중 트럭과 충돌하는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하였다. 당시 그는 비교적 느린 속도로 운행하고 있었으나 안전모를 착용하지 않았던 것이 사망의 주 원인으로 꼽힌다.
콜뤼슈가 사망한 직후 티에리 르뤼롱은 "콜뤼슈와의 결혼 발표는 거짓이었으며 우리들의 결혼 발표는 그저 프랑스의 유명 뉴스 앵커이자 저널리스트 이브 무루지(Yves Mourousi)의 결혼을 풍자하기 위한 퍼포먼스였다."라면서 콜뤼슈와의 관계를 부정했다. [6] 티에리 르뤼롱은 콜뤼슈가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한지 5개월만인 1986년 11월 13일 에이즈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1989년, 콜뤼슈의 아들인 마리우스 콜루치(fr)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배우로 데뷔하였다.
3. 출연작품
- 《당나귀 공주》 (1970)
- 《01년》 (1972)
- 《크레이지 보이 슈퍼마켓》 (1973)
- 《맛있게 드십시오》 (1976)
- 《내 단짝 친구의 여자》 (1983)
- 《꼭두각시여 안녕》 (1984)
[1] 콜뤼슈는 프랑스 코미디언들 중 최초로 TV에서 욕설을 내뱉은 코미디언이자 최초로 욕설을 개그 소재로 쓴 코미디언이었다.[2] 투캅스의 원작 <마이 뉴 파트너 Les Ri-poux>, 트루 라이즈의 원작 <잭팟이야! La Totale!>를 감독한 프랑스 코미디 영화의 거장. 매우 창의적이고 코믹한 줄거리를 바탕으로 지능이 의심되는 등장 인물들간의 밀고 당기는 소동을 보여주는 것이 특기로 히트한 작품들은 반드시 속편을 만들기로도 유명했다.[3]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참여 지식인으로 '부르디외 학파'를 형성하고, 사회학을 '구조와 기능의 차원에서 기술하는 학문'으로 파악하였다. 신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범세계적인 지식인 연대의 필요성을 주장했다.[4]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 기호학자, 사회활동가. 정신분열분석을 고안하고 생태철학에 관해 여러 저작을 남겼다.[5] 장난 전화와 몰래 카메라로 유명한 프랑스의 코미디언.[6] 이브 무루지는 결혼하기 전까지 연예계 내에서 방탕한 밤 생활을 하는 독신주의자로 유명했으며 1984년에는 공식적으로 잡지를 통해 자신에게 동성애 성향이 있다고 커밍아웃까지 했다. 그런데 1년 후인 1985년에 갑자기 여성 저널리스트 베로니크 오데마드 알랑송(Véronique Audemard d'Alançon)과 결혼을 발표한 것이다. 게다가 그의 결혼식은 초호화로 치러졌고 프랑스의 수 많은 유명인사들이 결혼식에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