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강제수용소에 대한 내용은 굴라크 문서 참고하십시오.
1. 개요
кула́к러시아 제국 말기부터 소련 초기까지 상당한 토지와 가축을 소유한 농민, 즉 부농을 말한다. 공산주의 계급투쟁 이론과 집단농장 정책에 따라 이오시프 스탈린 집권기에 가혹하고도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다. 쿨라크는 원래 농번기에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해서 써야 할 만큼 넓은 농지를 가지고 남은 수확량을 팔아 소득을 올리는 부농을 뜻하지만, 나중에는 입에 풀칠도 겨우 하는 수준의 자영농이나 집단농장화에 저항하는 농민까지 포함하는 의미로 확장됐다.
2. 역사
2.1. 스탈린 집권 이전
러시아 제국 말기 1861년 농노해방 이후에 농노 신분에서 벗어나 넓은 토지를 보유하는데 성공한 사람들을 뜻한다. 당연히 농노 해방 직후에는 갓 해방된 농노가 부농까지 성장하는게 매우 어려웠으나, 1906년 스톨리핀의 개혁으로 농민들에게 돈을 빌려주어 일단 땅을 사게 하고 이후에 여러 해에 나누어 그 땅에서 나오는 수확으로 대출을 값게하는 정책이 실행되자 쿨라크의 수가 늘어났다. 이들은 러시아 제국 체제를 옹호하며 상업적 농업을 했다.쿨라크는 본래는 '주먹'을 의미하는데, 잘사는 농민이 보릿고개 때에 빈농들에게 식량을 빌려주고 수확철이 돌아오면 무력을 써서라도 빚을 받아냈기에 붙은 말이다. 고리대금업을 할 정도의 부농은 많지 않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쿨라크라는 의미가 자기 가족만으로는 경작할 수 없을만큼 넓은 땅을 가지고 농번기에 빈농을 고용해서 농사를 짓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정착됐다. 이런 쿨라크도 직접 힘든 노동을 하는 농민이기에 완전한 지주라기 보다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반반씩 결합된 프티 부르주아였다.
볼셰비키가 집권한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쿨라크는 공산주의의 적으로 규정되어 탄압을 받았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1917년 11월 모든 땅을 국유화하고 농지를 농부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법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볼셰비키 중앙 정부의 통치력이 지방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농지의 분배는 중앙 정부의 개입 없이 농촌의 지역 공동체가 알아서 해결했다. 그래서 쿨라크의 운명은 각 공동체별로 케바케가 되어, 많은 지역의 쿨라크는 자기 가족만의 힘만으로 농사가 가능한 땅만 남기고 나머지를 빼앗긴 반면에, 어떤 지역의 쿨라크는 지주의 땅을 분배하는 과정에 참여하여 땅을 더 불리기도 했다. 1918년 볼가강 유역에서 볼셰비키 정권의 곡물 수탈에 저항하는 농민 반란이 일어나자, 레닌은 이 반란을 쿨라크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쿨라크를 모조리 교수형에 처할 것을 명령하는 등 탄압을 지속했다.
그러나 러시아 내전에 따른 혼란과 급격한 공산화 정책의 폐해로 인해 국가의 생산능력이 바닥을 찍자, 1921년 레닌은 고집을 꺾고 부분적 시장 자유화로 요약되는 신경제정책을 펼치는 동시에 쿨라크 탄압을 중단했다. 그래서 신경제정책 하에서 쿨라크의 수가 늘어났다. 다만 이 때의 통계는 부농 뿐만 아니라 간신히 자기 가족이 먹을 만큼의 식량만 겨우 생산하는 농부들까지 합친 수, 즉 빈농을 제외한 농부의 수이긴 하다. 신경제정책의 부분적 시장 자유화를 통해 농업 생산량이 빠르게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1] 도시로 공급되는 식량도 늘어나서 도시의 식량난이 일부나마 경감되었다.
신경제정책이 펼쳐진 기간 동안 쿨라크가 번성하는 것에 대해서 공산주의 계급투쟁의 사상에 사로잡혀 있던 공산당원들이 당연히 분노했던 반면에,[2] 처음에 농촌에서 농민들의 반응은 복합적이었다. 항상 더 많은 땅과 가축을 원하는 농민들이기에 자신보다 더 많이 가진 쿨라크의 재산을 가져오고 싶었던 동시에, 만약 자신도 땅과 가축을 불려서 쿨라크가 되는 날이 오면 지탄의 대상이 될 것이라 염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공업 분야가 느리게 회복되고 도시의 식량난이 계속되면서 도시에 나가 일하던 농촌 출신의 노동자가 고향으로 돌아오자 총경작지의 면적에 비해 농촌 인구가 지나치게 늘어났고, 결과적으로 숫적으로 증가한 빈농들이 쿨라크에 대한 증오심을 품게 되었다. 당시 소련 정부의 행정력이 각 시골 마을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나중에 스탈린이 쿨라크를 탄압할 때 이런 빈농 중에서 무뢰한으로 알려진 사람들에게 완장을 채워주고 써먹었다.
소련의 반체제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대표작 《수용소 군도》에 <쿨라크>라는 말이 원래는 <스스로 일하지 않고 고리대금업이나 중개업으로 부유한 생활을 누리는 간사하고 인색한 거간꾼>을 뜻하다가, 1917년 이후 즉 이런 거간꾼들이 혁명으로 일소된 뒤로는 <자기 가족의 노동력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경우 날품팔이 노동자를 이용하는 자>라는 뜻으로 변했고, 1930년경에 이르러서는 <강인한 농민>이라는 뜻으로까지 바뀌었다고 서술했다.[3]
2.2. 스탈린 집권 시기
쿨라크 탄압(라스쿨라치바니예)은 스탈린 시기에 다시 시작되었다. 스탈린의 제 1차 5개년 계획에서는 쿨라크에 대해 구체적으로 "소 한쌍" 혹은 "5~6에이커"의 땅[4]을 가진 농민으로 규정되었다.스탈린이 쿨라크를 적대시하며 처단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유에는 산업화를 위한 막대한 곡물(도시 노동자들을 먹이고, 외국에서 고급 기술과 설비를 수입하는 용도로 쓸)이 충분히 수급되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
러시아 내전은 러시아 전영토에서 장기간에 걸쳐서 펼쳐졌는데 처음에는 농민들이 붉은 군대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농촌에서 형성된 지역 소비에트들은 볼셰비키 정부의 도움없이 알아서 지주의 땅을 빼앗아 나누어 가졌고,[5] 완전히 도시 출신인 중앙 공산당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시골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전 기간에 붉은 군대는 후술한 것처럼 농촌의 잉여 농산물을 강제로 빼앗아가는 국가 공인 도적단과 같았기에 농민들이 지지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만약 붉은 군대가 내전에서 진다면 지주가 돌아와서 땅을 도로 가져갈 것이라는 염려가 생기자 농민들은 땅을 지키기 위해 붉은 군대를 지지했다. 1920년대에는 신경제정책 하에서 쿨라크가 다시 성장하자, 자기 땅이 거의 없어 품팔이로 연명하는 빈농들이 쿨라크의 땅과 가축을 빼앗아 가지기 위해서 공산당의 지지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막상 지주가 사라지게 되자 도시로 공급되는 곡물의 양도 급감했는데 이는 부재지주가 농촌에서 식량을 착취 수준으로 수탈하여 도시에 판매함으로서 유지되는 식량공급 시스템이 붕괴되었다는 것이다. 제정 러시아 말기에 정부는 상업적 농업과 곡물의 수출을 장려하기 위해 세금을 높이는 동시에 곡물을 현물로 납부하는 것을 금지하고 돈으로 내도록 했다. 그래서 지주 뿐만 아니라 겨우 입에 풀칠을 하는 자영농들도 자신이 먹을 것을 줄여가면서까지 생산한 농산물을 팔아야 했고, 이렇게 시장에 넘겨진 곡물이 중심 도시로 집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이후로 지주의 땅을 나누어 가진 소규모 농민들은 남은 식량을 숨기고 그냥 자신이 배부르게 먹는 것을 택했다. 러시아 혁명 직후 몇년간은 볼셰비키 혁명 정부가 농산물 시장 자체를 없앤데다가, 공장의 공산화로 인해 공업 생산량이 급감했기에 곡물을 팔아서 구입해야할 공산품을 구할 수가 없어서, 농민이 자발적으로 식량을 시장에 내놓을 이유가 없어졌던 것이다. 즉 역설적이게도 귀족이 행하는 착취의 부재가 모스크바를 비롯한 도시들에 대규모 식량난의 원인이 되었고 공산주의 지도부는 이를 빠르게 알아차렸다.
한편 스탈린 초기까지만 해도 공산당 중앙 정부는 드넓은 러시아 지방 영토를 장악할 인력이 없었다. 현지를 관리하던 짜르 정부와 귀족은 혁명으로 쓸려나갔는데, 현지의 공산당 지도자들은 함량이 의심스러운 데다가 지나치게 지방에 밀착되어 있어 중앙당이 그들을 신뢰할 수 없었고, 중앙에서 임명한 노동자 출신 지도자들도 문맹을 겨우 면할 정도로 무능한 사람들이라 지방행정을 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난국은 훗날 대숙청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결국 징세제도 역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는데 혁명의 수도 모스크바의 주민들이 굶주리기 시작하자 정치적인 소요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를 감지한 중앙당 지도부는 이를 반혁명적인 농촌의 반동분자의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으며 그 해결책으로 그 반동분자들에게 식량을 강탈할 식량징발대를 편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차르 정부 때보다 (공식적인) 수탈량을 올릴 수는 없었다. 해답은 대대적인 곡물징발대의 운용이었다. 도시 출신의 군인들을 곡물징발대로 편성해 농촌에 보냈다. 명목은 공산주의의 발전과 건설을 위한 "기부"였지만 총칼을 든 외부인이 종자와 겨우내 버틸 식량조차도 모두 빼앗아가는 행태 덕에 농민들은 극렬히 저항했고 이는 무력으로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행정조치로 수확량을 조사한 후 수취한 게 아니라 애초에 숨겨놓은 물건이 많을 것이라고 간주하고 눈에 보이기만 하면 몰수하는 징발대를 운영했으니[6] 농민이 협조하면 아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필사적으로 수확물과 가축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을 반대의 입장에서 보면 징발대가 순순히 협조를 고하면 농민들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지만 협박과 고문을 통해 "취조"하면 성공적으로 수확물이 "발견"될 수 있었다. 번번히 나타나는 이런 상황은 중앙당에게 있어 농민의 반동성을 확인시켜주는 확실한 증거로 받아들여졌으며 점점 수탈은 거의 농촌에 대한 습격에 가까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스탈린은 자영농까지 부농, 즉 "쿨라크"로 칭하며 국가의 적으로 명문화하고 이들에 대한 약탈을 장려했다. 징발대는 사실상 국가공인 산적떼나 다름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스탈린은 자국 농민들에 대한 증오감을 감추지 않게 되었다. 이게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였던 러시아에서 부농이라는 쿨라크가 180만이나 낙인찍힌 이유가 되었고 소비에트 정권은 이들을 신속하게 굶겨죽여서 식량위기를 해결했다. 다.
소련은 1929~1932년 라스쿨라치바니예를 통해 궁극적으로 쿨라크의 땅과 재산을 몰수하고, 수용소로 보내거나 멀리 척박한 땅으로 강제 이주시킨 뒤에 굶어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 가령 카자흐스탄의 유목민들은 전부 쿨라크로 규정되었으며 모든 가축을 몰수당한 채로 목화농장과 옥수수농장으로 무리배치당했다. 이들 농장에 대한 식량공급은 부실하기 그지없고 수탈량은 가혹해서 결국 인구 절반이 총살당하거나 아사했으며 그 자리는 중앙에서 이주시킨 러시아인들로 채웠다. 이 때 단순히 부농만이 쿨라크로 분류된 것은 아니었다. 간신히 자기 가족이 먹고 조금 남을 정도만을 생산하는 사람들도 쿨라크로 몰아붙인 뒤에, 유배형을 피하려면 집단농장에 자발적으로 가입하도록 했다. 또한 가난한 농민일지라도 집단농장화에 저항하면 쿨라크 계급이라는 딱지가 씌워지고 탄압받았다.
쿨라크 탄압과 동시에 집단농장화가 진행되면서 농촌의 생산력은 급감하였다. 가장 농사를 잘 짓던 쿨라크를 제외하고 나머지 농민만으로 집단농장을 구성한데다가, 집단농장을 운영하는 책임자도 농업 지식의 정도와 관계없이 정치적 고려를 통해 낙하산으로 마구 내려왔으니 농장이 제대로 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본격적인 집단농장화의 첫 해인 1930년[7] 농사는 풍작이었지만, 1932년부터 실제 농업 생산량이 크게 감소하여 기근 상태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8] 농촌에서 수납받는 곡물의 양을 늘리자, 1933년에는 한계까지 몰린 농촌의 생산력이 더 박살나서 특별한 자연 재해가 없었음에도 대기근이 발생했다. 러시아 농촌 어디에나 굶어죽은 사람들이 널려있었고 처음에는 기초대사량이 많음에도 식량공급 없이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던 남자들이 쓰러졌다. 이후 식량공급을 못 받아 굶주렸던 아이들이 굶어죽었으며 최후에는 여자들이 남편과 아이들의 시체를 파먹다가 그마저도 떨어져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죽어나갔다.결국 소련의 대부분 지방에서 대기근이 발생해 홀로도모르의 500만 사망자를 포함해서 적어도 1,450만의 농민이 죽었다고 한다. 농민들은 정부가 수납해 가는 곡물을 훔치거나 숨기고, 심지어 집단 약탈을 해서라도 살아남으려고 하였고, 스탈린은 군대를 동원하여 이런 농민들을 처벌하거나 죽이고 곡물을 빼앗아 갔다. 그리고 반항적인 농민에게는 이번에도 쿨라크라는 누명이 씌워졌다.
이런 지옥도를 연출하던 와중에도 소련 정부는 집단농장화를 지속하였고 농촌을 계속 수탈했기 때문에, 농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기근 상태에서 벗어나야 했다. 일례로 1932~1936년 동안의 정부 통계에 따르면 집단농장의 가구당 1년간 지급받는 곡물의 양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집단농장은 대략 생산량의 2/3 정도를 정부에 수납하고 남은 농산물을 각 농부가 일한 날의 수(Трудодень)[9]에 비례하여 나누어 가졌는데, 정부는 그 해 생산량이 늘어날 것 같으면 받아갈 양도 늘려 버렸기에 농부들의 손에 떨어지는 양은 매년 거의 같았던 것이다. 대신에 농부들은 개인적으로 약간의 가축을 기르거나 1/4~1/2 헥타르 정도의 작은 개인 농지에서 곡물이 아닌 다른 작물을 경작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래서 농부들은 축산 제품을 직접 먹거나 지역 시장에 팔아서 소득을 올리고, 개인 농지에서 감자, 채소, 과일을 재배하여 기아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게다가 1932~1933년 대기근을 거치면서 단기간에 사람과 말이 굶어죽은 만큼 수요가 없어지니 곡물수지가 점점 개선된 것도 기아에서 벗어나는데 한 몫했다.[10]
윈스턴 처칠의 2차 대전 회고록에 따르면, 1942년 처칠이 스탈린과 회담을 할 때 1930년대 초반에 소련의 집단농장화 과정이 어땠는지 물어보자, 스탈린은 이들 농민과의 전쟁이 독일과의 전쟁 이상으로 어려웠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때의 회담이 열린 시기는 모스크바 공방전이 끝나고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1] 이렇게 러시아의 식량 생산량이 회복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의 총생산량에는 미치지 못했다.[2] 하지만 니콜라이 부하린처럼 쿨라크를 양성하는 레닌의 농촌 정책에 찬성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여기에 반대하여 쿨라크를 말살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당시까지는 부하린의 맹우였던 스탈린이었다. 그런데 원래 대체적으로 신경제정책과 쿨라크에 우호적이었던 트로츠키가 레닌 사후에 쿨라크에 대해 부정적으로 변하자, 스탈린도 태도를 전환하여 부하린의 편에 서서 트로츠키를 공격했다. 1926~1927년 트로츠키를 축출한 뒤에는 스탈린이 다시 태도를 바꾸어 1928년부터 쿨라크의 씨를 말리고자 나섰다. 1928년 부하린은 쿨라크를 탄압하는 스탈린에게 제동을 걸려고 했으나, 결국 다음 해에 스탈린에 의해 실권에서 밀려나고 만다.[3] 《수용소 군도》 1권 p97-98, 열린책들, 김학수 옮김..[4] 참고로 쌀농사 문화권인 남한의 농지개혁법 당시 가구당 농지 소유 상한선이 3헥타르(약 7.4에이커)였다. 그러니까 대략 그 정도를 일개 농가에서 현실적으로 경작할 수 있는 최대 면적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다만 밀농사의 특징상 쌀농사보다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떨어지는 점은 감안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 러시아는 삼포제 농업을 했기 때문에 휴경을 하지 않고 경작을 하는 농지는 전체 농지의 1/3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집약적 농업을 하는 한국의 3헥타르는 실질적으로 당시 러시아의 9헥타르와 같다고 봐야한다. 대다수 연구자들이 동의하는 바는 만약 스탈린의 기준을 동시대 서유럽에 적용한다면 중간층 농민은 물론이고 빈농에 가까운 농민들도 쿨라크로 분류된다는 사실이다.[5] 무기를 가지고 탈영한 구 러시아 제국의 병사들이 고향에 돌아와서 소비에트에 합류했기에, 각 지역 소비에트의 무력만으로 토지의 재분배를 해결할 수 있었다.[6] 징발을 수행하는 군인들 역시 도시 빈민들이었기 때문에 농민에 대한 증오에 가득차있었으며 굶주려 있었다. 당연히 현지에서 무자비하게 모든 식량을 징발했으며 그 중에서 일부를 횡령하고 상부로 올려보냈다. 저항하면 가차없이 죽였으며 저항하지 않아도 예쁜 처자가 있다고 하면 강간살해한 후 저항했다고 조작하기도 했다.[7] 집단농장화 자체는 1928년부터 시작됐지만, 스탈린이 내려보내는 지시가 오락가락하면서 한동안 집단농장화 과정이 혼란스러웠고, 1931년에야 일관되고 점진적인 집단농장화 정책이 실행되었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농민이 집단농장에 합류하도록 말로 설득하고 새로 개간하는 땅에만 집단농장을 만들기로 했기 때문에, 집단농장화가 느리게 진행됐다. 그러다가 1929년 말에 집단화에 대한 스탈린의 독촉이 지방에 내려갔고, 이에 따라 농가들이 자발적으로 집단농장에 합류하도록 강요되어, 1930년 3월에는 전체 농가 중에 집단농장에 속한 비율이 순식간에 58%로 치솟았다. 하지만 이런 급격한 집단농장화의 폐해가 부각되자 스탈린 본인이 "내가 원한 것은 이러한 혼란이 아니었다"며 제동을 걸었고, 당황한 지방 관리들이 집단화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바람에 고작 3개월 후인 1930년 6월에는 24%로 떨어졌다가, 1931년에는 다시 53%가 집단농장에 소속됐다. 이후로는 이 비율이 매년 평균 7% 정도씩 점진적으로 상승했다.[8] 다만 중앙당이 받아본 통계에서는 전년도인 1931년과 같은 생산량이었다. 물론 1931년에도 이미 작황이 좋지 않았던 것이 함정이긴 하다.[9] 트루도덴(Трудодень)을 직역하면 노동일(labor day)이 되는데, 힘들거나 어려운 일은 하루보다 더 많이 쳐주었기에, 단순히 날짜의 단위라기보다는 나중에 집단 수확량을 나눌 때 쓰기 위한 계산 단위라고 보는 것이 옳다. 하지만 이 트루도덴 단위는 어쨌던 출근한 날을 기준으로 계산했지 실제 그날의 작업량을 고려하지 않았기에, 출근해서 농땡이를 쳐도 남들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일의 종류에 따른 가중치도 농업 현장의 현실을 잘 모르는 높으신 분들이 정한 기준에 따랐던 터라, 실제로 중요한 일도 트루도덴 가중치가 낮으면 농부들이 기피했다. 결국 트루도덴 제도는 집단농장의 효율성이 떨어지게 된 주요 원인 중에 하나가 되었다.[10] 서양에서는 밭을 갈 때 소 대신에 말을 쓰는데, 말은 풀만 먹는 소와 다르게 귀리나 호밀과 같은 곡물도 섞어 먹어야 힘든 일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말이 워낙 덩치가 크다보니 제법 많은 양을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