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리가리우스 라틴어: Quintus Ligari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미상 |
지위 | 노부스 호모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티투스 리가리우스(형제)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정 원로원 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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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원로원 의원.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의 가담자다.2. 생애
사비니 지역 출신으로, 동생 티투스 리가리우스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또다른 형제와 함께 리가리우스 가문 최초로 원로원에 입성한 노부스 호무(Nobus Homo: 신참자)다. 기원전 50년 아프리카 총독 가이우스 콘시디우스 롱구스의 레가투스(Legatus)를 맡았고, 콘시디우스가 연말에 로마로 돌아간 뒤 후임자가 도착할 때까지 아프리카를 대리 통치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콘시디우스의 지시를 오랫동안 거부했지만 결국 강제로 맡겨졌다고 한다.기원전 49년 1월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다. 당시 아프리카를 여전히 맡고 있던 리가리우스는 폼페이우스측 인사인 푸블리우스 아티우스 바루스가 아프리카 총독으로 부임하자 통치권을 맡기고 부관이 되었다. 카이사르가 장악한 로마 원로원에 의해 아프리카 총독으로 선임된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투베로가 아프리카 해안에 접근해오자, 그는 해안에 상륙하는 것을 저지하고 식수 공급 역시 허용하지 않았다. 투베로가 "아들이 아프니 육지에 잠시 상륙해서 병이 나을 때까지 머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끝까지 거부했다. 결국 투베로는 발칸 반도로 가서 폼페이우스에게 항의했지만, 폼페이우스는 리가리우스의 행위를 용인했다.
그 후 수년간 아프리카에 머물면서 그곳을 본거지로 삼은 폼페이우스파 인사들의 지휘를 받았지만, 그 안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지 않았다. 키케로는 그가 단지 전쟁에 휘말렸다고 밝혔다. 기원전 46년 4월 탑수스 전투에서 카이사르가 승리한 뒤 하드루멘툼으로 진군하자, 당시 이곳의 수비를 맡았던 리가리우스는 즉시 도시를 넘겼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그를 살려줬지만 로마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계속 망명해야 했다. 한편 로마에서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와 리가리우스의 형제인 티투스 리가리우스가 그를 구명하고자 노력했다. 카이사르는 그들의 거듭된 요청에 마음을 돌려 그를 귀국시키려 했다.
그러나 지난날 리가리우스에게 상륙을 거부당해 원한을 품고 있던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투베로와 아들 퀸투스 아일리우스 투베로가 카이사르에게 접근했다. 그들은 리가리우스가 누미디아 국왕 유바 1세와 동맹을 맺고 로마에 반기를 들려 했다고 고발했다. 카이사르는 그 말을 믿고 기원전 46년 10월 리가리우스를 체포한 뒤 재판에 회부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공개적으로 리가리우스를 악당이자 국가의 적이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키케로는 이에 맞서 리가리우스의 변호를 맡았다. 그는 투베로 부자가 과도하게 잔인하다고 비난하고 피고를 애꿎은 전쟁에 휘말린 피해자라고 옹호했으며, 유바 1세와 동맹을 맺은 책임은 그가 아니라 이미 사망한 폼페이우스 측 고위 인사가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이사르는 키케로의 연설에 설득되어 리가리우스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기로 했다.
그러나 리가리우스는 이 일로 카이사르에게 원한을 품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카이사르가 자신에게 관용을 베푼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설득을 받아들여 카이사르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 암살 당일인 기원전 44년 3월 15일에 몸이 아팠지만 개의치 않고 카이사르 암살에 일조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부실해서 파악하기 어렵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기원전 43년 제2차 삼두가 반포한 숙청 명단에 이름이 올려진 리가리우스 형제가 난로 아래에 숨었지만 노예들이 주인의 위치를 알리는 바람에 추격자들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피아노스는 코그노멘인 '리가리우스'만 언급했을 뿐 전체 이름을 명시하지 않았기에, 이들이 퀸투스와 티투스 형제인지는 불분명하다. 역사가 프리드리히 뮌처는 기원전 42년 10월 필리피 전투에서 다른 카이사르 암살자들과 함께 죽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