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 라틴어: Quintus Hortensius Hortal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42년 10월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마케도니아 속주 필리피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조부)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아버지) 루타티아(어머니) 호르텐시아(누이) 호르텐시우스 코르비온(아들) 마르쿠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아들 또는 조카) |
직업 | 로마 공화국 법무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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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법무관.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지지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이후 '해방자'를 자처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자들을 지지했다.2. 생애
호르텐시우스 씨족은 기원전 3세기부터 언급된 노빌레스로, 기원전 287년 퀸투스 호르텐시우스가 파트리키와 플레브스의 분쟁을 종식하기 위해 독재관을 맡아서 호르텐시우스 법을 제정한 이래 여러 고위 행정관을 배출했다. 조부 루키우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는 법무관을 맡아 시칠리아를 다스렸다. 기원전 108년 집정관에 당선되었으나 선거 과정에서 비리를 저지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아 직책을 상실한 호르텐시우스가 루키우스 호르텐시우스와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제기되나,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부친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는 당대 최고의 웅변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혔으며, 기원전 69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어머니 루타티아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정적이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추종자였던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의 딸이다. 누이로 호르텐시아가 있었다. 그녀는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1]와 결혼한 것으로 여겨지나 자녀를 얻지 못했다. 기원전 42년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해방자파와의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로마에서 가장 부유 한 1,400 명의 여성에게 세금을 부과하기로 결정하자, 자신들이 참여할 수 없는 전쟁을 위한 세금을 부과받은 것에 분노한 여성들을 이끌고 포로 로마노로 행진하여 항의 연설을 감행했다. 삼두는 그녀를 처벌하려 했지만 민심이 그녀 쪽으로 쏠리자 어쩔 수 없이 과세 대상 여성의 수를 400명으로 줄이고 그 대신 남성 재산 소유자에게 국가에 돈을 빌려주고 전쟁 비용을 분담하도록 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호르텐시우스는 해방노예 살비우스와 어울려 지내며 매춘굴에 온종일 들락거리고 검투사 및 도둘들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또한 옵티마테스의 특권을 옹호하는 아버지와는 달리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추종했다. 아버지 호르텐시우스는 그런 아들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고, 한 때 자기 아들 대신에 조카인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루푸스에게 유산을 넘겨주려 했다. 그러나 기원전 51년 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당한 루푸스를 변호해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가 쿠리오 극장에서 청중들에게 심한 야유를 받자 큰 충격을 받고 루푸스에게 유산을 물려주려는 계획을 포기했다.
기원전 50년 초, 호르텐시우스는 아시아의 라오디케아에서 키케로를 만났다. 키케로는 그를 천박한 젊은이로 여겼지만,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대웅변가 호르텐시우스의 아들인 점을 고려해 그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함께 아테네를 거쳐 로마로 여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기원전 50년 여름 부친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젊은 호르텐시우스는 예정보다 일찍 로마로 돌아갔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방탕한 나날을 보내면서 진 빚이 많았기에 대부분을 빚 갚는 데 써야 했다고 한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카이사르의 편에 섰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전쟁 초기에 루비콘 강을 먼저 건너 아르미눔을 장악한 분견대를 지휘했다고 한다. 기원전 49년 4월 카이사르가 히스파니아 속주에 주둔한 폼페이우스파 장성들을 상대하러 떠났다. 이때 카이사르는 호르텐시우스를 티레니아해를 방어하는 함대 사령관으로 선임했다. 이후 시칠리아에서 아프리카로 출정할 준비를 하던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로부터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 가담한 키케로를 설득해 이탈리아에 그대로 머물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이에 따라 쿠마에에 있는 별장에서 키케로의 아내인 테렌티아를 접견했고, 나중에는 폼페이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키케로 본인과 접견해 귀순을 권유했다. 그러나 키케로는 설득을 듣지 않고 그리스로 향했다.
기원전 45년 카이사르로부터 법무관에 선임되었으며, 기원전 44년 마케도니아 총독으로 부임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진 후 카이사르파와 '해방자'를 자처한 카이사르 암살자들간의 내전이 시작되었다. 그 해 연말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그에게 동생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에게 마케도니아를 넘기라고 요구했고, 원로원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에게 넘기라고 요구했다. 그는 브루투스 쪽을 선택했고, 키케로는 기원전 43년 2월에 그를 칭송하는 연설을 했다. 이후 브루투스는 그를 마케도니아 총독에 연임시켰다.
기원전 43년 3월, 그는 브루투스와 함께 아폴로니아에서 가이우스 안토니우스를 포위해 항복을 받아냈다. 기원전 42년 초 브루투스의 지시를 받들어 백인대장 가이우스 클로디우스에게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의 처형을 집행하도록 했다. 기원전 42년 10월 필리피 전투에 참전했다가 참패한 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생포된 후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의 무덤 앞으로 끌려가 참수되었다.
그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인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그 중 한 명인 호르텐시우스 코르비온은 1세기 로마 역사가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로부터 "훌륭한 가문의 별 볼 일 없는 인물"로 언급되었다.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재정 지원을 요청한 마르쿠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가 그의 아들이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하나, 일부 학자들은 그가 퀸투스의 아들이 아니라 조카라고 추정한다.
[1]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양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