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1 08:23:05

크로슬리 모터스

1. 개요2. 역사3. 차종
3.1. 1939~1942년형3.2. 1946~1952년형
4. 여담5.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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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rosley: A Fine Car
크로슬리: 좋은 자동차
- 1946년 지면광고[1]
Crosley Motors Incorporated (크로슬리 모터스 주식회사)

1939년부터 1952년까지 존속한 미국의 경차 제조사. 미국 오하이오 주의 신시내티에 본사와 연구개발시설을 두었다.

2. 역사

당시 신시내티 레즈의 구단주이자 1920년대와 1930년대 사이에 보급형 라디오, 냉장고를 비롯한 가전제품과 방송사업으로 성공한 미국의 사업가 파웰 크로슬리 주니어(Powel Crosley, Jr.)가 인디애나 모터 스피드웨이에서 1939년 4월 28일에 첫 차를 공개하며 출범했다.

파웰 크로슬리 주니어는 청소년기에 단순한 구성의 자작차를 만드는가하면 20대에 자신만의 자동차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투자자를 모집하려고 했으며, 가전제품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타이어와 차내 라디오를 비롯한 자동차 애프터마켓 용품 사업을 했을 정도로 자동차에 꾸준한 관심을 보였다. 파웰 크로슬리는 사업 리스크 때문에 자동차 사업 진출을 만류하는 동업자이자 동생 루이스 크로슬리(Lewis Crosley)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미국의 아메리칸 밴텀이 영국에서 도입해 온 오스틴 모터 컴퍼니의 보급형 자동차 세븐을 벤치마킹하여 1937년 말부터 첫 프로토타입[2]을 만들고 인디애나 주의 리치몬드에 공장을 세운 뒤 크로슬리 모터스 주식회사(Crosley Motors Incorporated)를 출범하며 보급형 자동차 시장을 겨냥했다.

첫 신차는 1939년형으로 출시된 휠베이스 2,032mm의 2인승 경차로 워키쇼 엔진(Waukesha Engines)으로부터 공급받은 공랭식의 2기통 12마력(hp) 637cc 수평대향 엔진에 싱크로메시가 없는 3단 수동변속기를 맞물렸으며 서스펜션은 전후륜 모두 빔 액슬 + 리프 스프링 조합, 여기에 공차중량이 454kg 수준에 불과해 최고시속과 연비는 각각 50mph(약 80km/h)와 50mpg(약 21.3km/l)를 기록했다. 판매는 크로슬리가 기존에 확보한 2만 5천 곳의 가전제품 판매망을 통해 이루어졌고, 당대 시작가격 325~350달러를 책정해 오스틴 세븐을 따돌리고 미국에서 가장 저렴한 신차로 등극했다.

크로슬리 모터스의 신차판매는 1939년 첫 해에 2,017대를 생산하는 것을 시작으로 1940년에는 422대가 생산될 정도로 수요가 미미했으나 1940년형에서 가격을 299달러로 인하하고 2도어 컨버터블 쿠페, 2도어 컨버터블 세단의 2가지뿐이었던 라인업을 다양하게 확장하며 1941년에는 2,300대에 달하는 생산대수를 확보했다. 또한 크로슬리는 태평양 전쟁에 따른 전시상황으로 인해 연료 배급제가 시행되는 상황에서 연비라는 장점을 어필하며 인기를 끌었고, 정부의 명령에 따라 민수용 자동차 생산이 중단된 1942년까지 1,029대를 더 생산하며 총 5,757대의 차를 생산했다. 특히 크로슬리는 이 시기 미국에서 가장 늦게까지 민수용 자동차 제조를 지속하는 기록을 남겼다. 제 2차 세계대전 시기의 전시상황 동안 크로슬리는 경형 군수차량을 제조하는 등, 군수품 제조에 집중했다.

파웰 크로슬리는 1944년 6월 20일에 라디오 사업부를 분사 후 매각하는 등으로 크로슬리 모터스를 제외한 모든 사업을 매각했으며, 매각대금으로 개발한 신규 경차 라인업인 CC 시리즈를 1946년형 신차로 발표했다. 유선형 펜더가 강조되는 1930년대 말~1940년대 초 디자인 트렌드에 충실했던 A 시리즈 및 CB 시리즈와 달리, 유선형 2.5박스 패스트백 스타일에 평평한 측면부의 현대적인 디자인을 동일한 휠베이스 위에 구현하며 1946년형 카이저-프레이저와 함께 대량생산차 최초로 채용하는가하면 파워트레인도 캘리포니아 소재의 테일러 엔진 주식회사(Taylor Engines Inc)가 개발, 크로슬리와 독점 라이선스를 체결해 군수차량에 먼저 사용한 수냉식의 코브라(CoBra, Copper Braced) 724cc 직렬 4기통 엔진으로 교체하며 오버헤드 밸브 구성이 주류였던 시절에 대량생산차 최초로 오버헤드 캠샤프트 구성의 엔진 헤드를 채용하고, 최고출력도 26.5마력(hp)까지 상승했다. 가격도 2배 수준인 853.58달러로 상승하며 통상적인 대형 승용차와 가격폭이 크게 좁혀졌으나 크로슬리는 세컨드카 시장을 겨냥함과 동시에 전시상황 동안 신차에 굶주려 있었던 미국의 신차수요를 등에 업고 1946년에는 4,999대, 1947년에는 1만 9천 대 이상, 1948년에는 2만대 이상[3]을 생산하며 이전보다 높은 실적과 2년 연속 흑자를 기록해 연 8만대의 생산대수를 전망했을 정도였다.[4]

하지만 이번에는 CC 시리즈의 코브라 엔진이 민수용 차량의 유지보수가 불안정한 운행환경과 맞지 않아 품질문제가 속출하고 1949년에는 생산대수가 7천 4백대 수준으로 급락하는 등, 실적에도 타격을 입었다.[5] 이 악재에 대응하여 크로슬리 모터스는 같은 사양에 소재를 주철로 바꿔 코브라 엔진 대비 내구성을 개선한 CIBA(Cast Iron Block Assembly) 엔진을 개발해 1949년형의 크로슬리 CD 시리즈에 적용하고 라인업도 다각화하여 복륜 타이어와 트럭 베드를 추가할 수 있는 경지용 다목적차 팜오로드(Farm-O-Road), 전쟁 이후 미국 최초의 국산 대량생산 스포츠카인 크로슬리 핫샷(Hotshot)과 슈퍼 스포츠(Super Sport), SUV의 "Sports Utility"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직접 적용한 스테이션 왜건 기반의 오픈형 모델 스포츠-유틸리티, 미제차 최초의 강철 바디 스테이션 왜건 라인업[6]과 4륜 디스크 브레이크 탑재 등의 의의를 남겼다.

나아가 크로슬리 모터스는 슈퍼 스포트를 통해 모터스포츠에도 진출했다.#

하지만 코브라 엔진과 디스크 브레이크[7]에서 불거진 신뢰성 문제로 인해 나빠진 평판을 수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1950년대가 다가오면서 제너럴 모터스, 포드 모터 컴퍼니,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의 3대 미국 자동차 대기업이 가격경쟁으로 전국의 중소규모 자동차 제조사들을 위기에 빠트리고 미국 소비자들도 다시 기존의 대형차를 찾기 시작하며 크로슬리 신차 대신 비슷한 가격의 중고차를 구입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경영난에 빠진 크로슬리 모터스는 결국 판매량을 회복하는 데 실패하여 1952년 7월 3일에 신차생산을 중단, 폐업했다.

크로슬리 모터스는 이때까지 약 8만 4천대의 차를 생산했으며, 공장과 CIBA 엔진의 판권은 각자 다른 곳으로 매각되어 제너럴 타이어 앤 러버(General Tire and Rubber)가 크로슬리 모터스와 함께 공장을 인수했다.

3. 차종

3.1. 1939~1942년형

크로슬리 모터스의 첫 차종으로,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전시상황 돌입 전까지 생산되었다.#

보급형 경차로 기획됨에 따라 각종 설계를 단순화하는 조치가 이루어졌는데 연료 펌프 없이 중력에 의존하여 연료를 엔진으로 공급하는 엔진룸의 4갤런(약 15.2L) 연료탱크,[8] 기계식 브레이크, 미닫이식 창문, 수동식의 단일 와이퍼 암이 적용되었으며 엔진 동력을 변속기에서 구동축으로 전달하는 관절부인 유니버설 조인트도 제거하고 고무 재질의 엔진 마운트로 대체, 토크 튜브를 통해 엔진 동력을 직접 구동축으로 전달했다.
  • 시리즈 1A
1939년형 라인업으로 캔버스탑에 2열 쪽창이 있는 4인승의 컨버터블 세단, 2열 쪽창이 없는 2인승의 컨버터블 쿠페로 구성된 2개 라인업으로 운영되었다. 두 차량은 2열 쪽창의 유무, 그리고 도어 프레임의 모서리[9]로 구분할 수 있다.
  • 시리즈 2A
1939년 10월 1일에 출시된 1940년형 라인업으로 컨버터블 세단에 고급형 트림인 딜럭스(Deluxe)가 신설되었으며 신규 라인업으로 목제 바디가 적용된 스테이션 왜건, 그리고 1열 캔버스탑이 적용된 상용밴인 파크웨이 딜리버리(Parkway Delivery)가 합류했다. 외형상으로는 앞뒤 펜더 사이에 발판처럼 생긴 바디컬러 스커트가 추가되었다.
  • 시리즈 CB41
1940년 7월 28일에 출시된 1941년형 라인업으로 픽업, 캔버스탑이 적용된 스테이션 왜건인 커버드 왜건(Covered Wagon), 그리고 1열에도 고정식 지붕이 들어가는 상용밴 라인업인 패널 딜리버리(Panel Delivery)가 추가되었다. 또한 유니버설 조인트가 없는 구동계 설계에서 신뢰성 문제가 발생함에 따라 기술적으로도 개선이 이루어져 엔진 마운트의 재설계, 구동축의 유니버설 조인트 추가, 윤활장치 설계 수정은 물론 엔진의 내구도를 항상시키고자 엔진 실린더의 스트로크를 줄이고 엔진 베어링도 접촉면을 넓혔다. 이에 따라 가격도 339~496달러로 상승했다.
  • 시리즈 CB42
1941년 말에 출시된 1942년형 라인업으로 철제 지붕이 적용된 리버티 세단(Liberty Sedan)이 라인업에 합류했다. 가격은 468~582달러로 다시 상승했다.

3.2. 1946~1952년형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전시상황이 해제되며 생산이 시작되었다. 괄호의 연도는 년형이 아닌 생산기간 기준.
크로슬리가 종전 후 생산한 첫 모델로 1946년 1월 20일에 발표하여 동년 5월 5일부터 인디애나 주 마리온에서 생산,[10] 8월 27일에 정식 공개되었다. 수송료를 절감하는 차원에서 열차에 세로로 2대가 들어갈 수 있도록 전폭을 1,245mm으로 좁게 설정하되 기존의 1939~1942년형 모델보다 차체 크기가 약간 더 커졌고, 실내공간도 1열에 키 큰 사람 2명이 탈 수 있는 수준까지 확보했다.[11] 외형상으로도 공기 역학적인 디자인 요소가 가미되었다. 724cc 직렬 4기통의 새 엔진이 도입되었으나 엔진을 제외한 섀시와 변속기, 서스펜션, 브레이크 등의 나머지 대부분의 구성 요소는 CB 시리즈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공인연비는 44mpg(약 18.7km/l), 시작가격은 2도어 세단 기준 853.58달러로 우측 후미등,[12] 대시보드 우측의 재떨이, 모토로라 라디오가 선택 옵션으로 제공되었다.
라인업은 1946년형이 2도어 패스트백 세단, 2도어 컨버터블 쿠페를 제공하는 것을 시작으로 1947년형에는 픽업, 1948년형에는 후드 오너먼트를 더하는 동시에 스테이션 왜건과 이에 기반한 상용밴인 패널 딜리버리, 스테이션 왜건 기반의 오픈형 모델인 스포츠-유틸리티가 신규 라인업으로 추가되었으며 픽업도 후미부를 기존의 둥그스름한 형태에서 왜건에 기반하는 각진 형태로 변경했다. 1948½년형에는 굵직한 수평 크롬바 두 줄, 그리고 엠블럼 자리의 원뿔형 돌기가 추가되는 페이스리프트가 이루어졌다. 이들 중 인기가 많았던 모델은 1947년 11월에 1948년형으로 등장한 스테이션 왜건으로, 크로슬리의 1948년 한 해 생산대수 중 거의 대부분에 해당되는 23,489대를 차지하는 건 물론 당대 미국에서 가장 많은 왜건을 생산하는 기록까지 남겼다.
1948년 12월 16일에 1949년형으로 도입되었으며, 외형을 1949년형 포드와 유사한 3박스 세단 스타일[13]로 현대화하는 것과 동시에 엔진이 같은 성능, 같은 배기량의 CIBA 엔진[14]으로 교체되었고 1949년 5월부터는 항공기에서 쓰던 굿이어-홀리(Goodyear–Hawley) 설계의 유압식 6인치 디스크 브레이크를 네 바퀴에 기본 탑재했다. 바디별 라인업으로는 세단, 쿠페, 스테이션 왜건, 픽업트럭, 패널 트럭의 5종을 구비했으며 세단과 컨버터블에는 리모컨식 도어 핸들과 방향지시등이 추가되는가하면 1950년형부터는 닭다리식 창문과 전동식 와이퍼가 옵션으로 제공되는 등, 장비 수준도 항상시켰다. 사양별 라인업도 만들어져 이름이 없는 기본형, 그리고 상급 트림인 딜럭스(Deluxe)가 제공되었다.
1950년 중순부터는 내구성 문제에 시달리던 디스크 브레이크를 종래의 기계식 드럼 브레이크로 환원시켰다. 1951년형은 세단, 왜건, 쿠페에 집중하되 각 모델별로 최상급 트림인 슈퍼(Super)를 추가했으며, 기본형 모델을 단종시켜 딜럭스를 기본사양으로 재배치하는 동시에 페이스리프트가 이루어졌다.
크로슬리가 처음으로 출시한 스포츠카 모델. 1949년 7월 14일에 출시되어 별도의 승객석 문이 없는 2인승 로드스터 차체를 적용했다. 보다 효율적인 무게 배분을 위해 엔진을 앞 차축 뒤에 배치하는 FMR 구조를 채택한 것이 특징. 전 차종 공용으로 돌려쓰던 724cc 직렬 4기통 엔진이 생성하는 26.5마력의 힘은 수치상으로는 미약했으나 공차중량 500kg이 채 되지 않는 엄청난 초경량을 무기로 시속 80마일(130km/h) 이상의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리프 스프링으로 보강된 새로운 코일 서스펜션과 네 바퀴에 모두 디스크 브레이크를 장착하는 등, 단순히 모양만 스포츠카를 따라한 것이 아니라 운전자로 하여금 실제로 스포티한 운전 감각을 제공하고자 했다. 1950년에는 상위 모델인 슈퍼 핫샷(Super Hotshot)이 출시되어 운전석 및 조수석 도어가 추가되고 접이식 소프트탑, 빨간색 인조가죽 실내 트림이 적용되었다.
  • 슈퍼 스포트(Super Sport, 1951~1952)
1951년부터 슈퍼 핫샷이 이름을 변경한 모델. 명칭이 바뀐 것을 제외하면 큰 변화는 없었다.
초경량 다목적 오프로더. 1950년 7월 19일에 출시되었으며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농업용 차량이지만 일반 도로, 심지어 고속도로에서도 레저용으로도 운행하는 데 문제가 없도록 고안되었다. 상대적으로 험로주행에 취약한 FR 구동방식을 채택함에 따라 험로 및 비포장 노면에서의 높은 기동성을 위해 뒷바퀴를 복륜으로 구성하는 것이 가능했고 농기계용 오프로드 타이어가 장착되었다. 이외에도 동력인출장치(PTO) 포트가 차량 전면에 위치하여 농기구를 차량에 부착해 사용할 수 있었으며 트럭 형태의 후면 적재함 옵션 역시 존재했다.
크로슬리 모터스가 폐업한 후에는 W.B. 크로프톤(W.B. Crofton)이 CIBA 엔진과 함께 판권을 인수, 적재함을 늘리고 출력도 35마력까지 증강시키는 대대적인 업데이트를 거쳐 1958년부터 1964년까지 크로프톤 버그(Crofton Bug)라는 이름으로 재생산되었다.

4. 여담

  • 크로슬리 차종을 전문으로 다루는 오너 클럽이 있다. 1969년에 설립되어 2024년 기준 800명의 회원을 두고 있다. 또한 메인 페이지를 통해 크로슬리 차종들의 중요한 정보를 열람할 수 있다.
  • 1952년에 폐업한 자동차 부문과 달리, 크로슬리의 가전제품 부문은 여러 차례 인수합병과 개명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정밀기계산업에 종사하는 L3해리스(L3Harris)로 흡수되었고, 상표권은 타사로 양도되어 라디오가전제품 사업체의 브랜드로 유지되고 있다. 2024년 6월 기준으로 대한민국에도 크로슬리의 복고풍 턴테이블이 수입되어 네이버 스마트스토어에도 페이지가 있다.
  • 크로슬리 기반의 키트카 패키지로 1952년에 등장한 스콜피온이 있다. 크로슬리의 섀시 위에 얹을 수 있는 파이버글래스 바디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1950년대 초 기준으로 현대적인 2인승 로드스터 모습을 갖추었다. 총 28대가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4대는 완성차로 만들어졌다.
  • 닛산자동차의 전신이었던 닷선이 1948년에 출시한 승용차 라인업인 DB 시리즈가 크로슬리 CC 시리즈와 유사한 모습이다. 닛산 글로벌의 공식 웹사이트에는 미국의 바디 스타일을 적용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 창업주 파웰 크로슬리 주니어는 2010년에 자동차 부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폐업 후 살아남은 개체 중 일부는 핫로드나 드래그스터로 개조, 드래그 경기에 투입되기도 했다. 미국의 자동차 전문 유튜브 채널 Donut Cars에서도 드래그스터로 개조된 개체 중 하나를 다루었다.#
  • 더 그랜드 투어 시즌 5 2화에 제임스 메이가 고른 연노랑색의 크로슬리 CC 포 컨버터블이 등장하며, 경매장에서 11,050 유로(한화 약 1,640만원)에 낙찰받았다.#

5. 참고 자료



[1]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전시상황이 종결된 이후부터 폐업할 때까지 지면광고에 모토로 적용되었으며, 당시 부착된 십자가 모양 엠블럼에도 적용되었다.[2] 4륜차이되 후륜 디퍼렌셜을 제외하는 차원에서 후륜 사이의 간격을 좁혀 3륜차에 가까운 형상이었다.[3] 출처에 따라 24,871대, 혹은 27,707대.[4] 크로슬리 CC를 정식 공개했을 당시에는 6백여곳의 딜러에서 3만 건에 달하는 주문을 접수했으며, 1946년 8월 26일에 정식공개했을 당시 9천명의 관중이 모였고 하루 10명밖에 주문접수가 안 되는 상황임에도 1천여명이 현장예약을 하려고 했을 정도였다. 높은 수요와 관심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크로슬리에서는 전시차량 2대를 항공기로 배송하는 강수를 두기도 했다.[5] 파웰의 동생이자 엔지니어였던 루이스 크로슬리는 코브라 엔진을 신차에 탑재하자는 형의 의견에 반대를 표했는데, 군용차 대비 불규칙한 민수용 자동차의 유지보수 실태와 함께 강철과 구리로 이루어진 엔진 헤드와 실린더 블록이 냉각수에 노출되면 산화되어 부식되는 소재상의 이유를 들었다. 코브라 엔진은 강철을 압축성형해서 만든 경량의 엔진 헤드와 실린더 블록을 구리로 납땜하는 공법으로 만들어졌는데 크로슬리 CC 시리즈에 탑재된 후에는 엔진이 군용차에서 쓰일 때보다 불규칙한 가동환경에 노출된 것은 물론, 당시 민간에서 쓰던 부동액도 염분기가 있는 성분이었기 때문에 엔진이 쉽게 부식되어 내구품질에도 악영향을 끼쳤다.#[6] 이때까지만 해도 스테이션 왜건은 강철 대신 목재로 승차공간을 만들었으며, 이 시기 목재 바디가 적용된 스테이션 왜건들은 "우디 왜건(Woody wagon)"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7] 항공기 용도로 개발된 디스크 브레이크를 자동차에 그대로 탑재한 것이 원인이었다. 항공기에서는 이착륙시에만 브레이크를 사용한 것과 달리 민수용 자동차는 브레이크의 사용 빈도가 높은데다가, 알루미늄 소재로 만들어진 특성상 부식에도 취약해 브레이크를 자주 사용하면 내구도에도 악영향이 가게 되었다.##[8] 컨버터블 쿠페 기준. 컨버터블 세단은 6갤런(약 22.7L) 연료 탱크가 후방에 설치되었다.[9] 컨버터블 쿠페는 둥근 모서리, 컨버터블 세단은 각진 모서리가 들어간다.[10] 크로슬리 오너 클럽의 크로슬리 역사 페이지 기준. 같은 사이트의 크로슬리 CC 정보 페이지에는 5월 9일로 명시되어 있다.[11] 창업주였던 파웰 크로슬리 본인부터가 6피트 4인치(약 193cm)에 달하는 장신이었기 때문에, 신장 6피트(약 183cm)의 성인이 탈 수 있을 정도로 실내공간을 확보했다.[12] 기본으로 제공되는 후미등은 좌측에만 부착되었다.[13] 스테이션 왜건과 픽업은 CC의 바디를 유지했다.[14] 처음에는 옵션이었으나 기본 엔진으로 정착했으며, CIBA 엔진 출시 전에 출고된 기존 차량에도 장착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