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크리스토발 데 몬드라곤 Cristóbal de Mondragó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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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명 | 크리스토발 데 몬드라곤 Cristóbal de Mondragón |
| 출생 | 1514년경 |
| 스페인 제국 바야돌리드도 메디나 델 캄포 | |
| 사망 | 1596년 1월 4일 |
| 스페인령 네덜란드 안트베르펜 | |
| 아버지 | 마르틴 데 몬드라곤 |
| 어머니 | 멘시아 데 메르카도 |
| 배우자 | 카타리나 반 헨스, 기예메트 드 샤틀레 |
| 자녀 | 알론소 |
| 직위 | 플란데런 테르시오 지휘관, 제일란트 총독, 안트베르펜 총독. |
1. 개요
스페인 제국의 장군. 알바 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 루이스 데 레퀴상스,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페터 에른스트 1세 폰 만스펠트포르데로르트 등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의 휘하에서 플란데런 테르시오를 이끌고 오랜 세월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서 활약한 명장이다.2. 생애
1514년경 스페인 제국 바야돌리드도 메디나 델 캄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마르틴 데 몬드라곤은 바스크 기푸스코아도의 몬드라곤 마을 출신이었으며, 이는 그의 성(姓)의 유래이기도 했다. 어머니 멘시아 데 메르카도는 메디나 델 캄포에서 가장 중요하고 부유한 귀족 가문 중 하나인 메르카도 가문 출신이었다.카를 5세 치세인 1532년 18살의 나이로 스페인군에 입대해 이탈리아에서 복무했고, 그다음에는 바르바리 해적에 맞서 튀니지 원정에 투입되었고, 프로방스, 독일을 거쳐 1544년 플란데런에 이르렀다. 그는 플란데런에서 1570/71년과 1579년의 두 번의 짧은 여행을 제외하고는 남은 생애를 그곳에서 보냈으며, 현지 언어를 배우고 플란데런 여성과 결혼하는 등 그곳에 완전히 정착했다.
1547년 4월 24일 크리스토발은 엘베강 근처의 묄베르크에서 카를 5세에 맞서 반기를 든 개신교 영주들이 결성한 슈말칸텐 동맹군과 맞섰다. 당시 동맹군은 묄베르크 마을 근처 강둑을 따라 진을 쳤으며, 작센군은 엘베강 일대의 모든 다리를 파괴했다. 그날 밤, 몬드라곤은 병사들과 함께 칼을 물고 허리까지 물이 차오르는 강을 건넌 뒤 임시 다리를 건설해, 카를 5세와 그의 부사령관인 알바 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가 이끄는 주력군이 다리를 건너 적군을 기습 공격해 대승을 거두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이 활약으로 이름을 널리 떨쳤고, 시인 로페 데 베가는 그를 칭송하는 시를 지었다.
1559년 4월, 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룩셈부르크 공국 내 담벨레르 시의 총독이자 왈롱 테르시오의 대령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대령으로서 1568년 오라녀 공 빌럼 1세가 이끄는 네덜란드 반군을 진압해야 했던 산초 디발라 이 디자 장군 휘하에서 복무했으며, 1569년에는 네덜란드 반군으로부터 리에주와 데벤테르 시를 방어했으며, 1571년에는 위트레흐트의 총독으로 부임했다.
1572년 8월, 네덜란드 반군이 잉글랜드 내 개신교 인사들이 조직한 병사 1,500명을 포함한 7,000명과 함선 40척을 이끌고 후스 마을을 포위했다. 알바 공작은 안트베르펜 총독 산초 다빌라 이 다사에게 해상을 통해 후스 섬에 지원군을 파견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에우트 피터스 베스트가 이끄는 반란군 함대가 스페인 해군을 저지하면서, 명령은 실행되지 못했다. 이때 플란데런인 플로메르트 대위가 그 지역을 잘 아는 현지 안내원과 함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보로 후스 섬을 건널 수 있다고 보고했다. 북쪽의 우스터스헬더강과 서쪽의 베스터스헬더강 사이에 있는 후스 섬을 가로지르는 강물은 북해의 조수에 노출되어 있어서, 간조 때 강물 수위가 1~1.5m까지 낮아진다는 것이었다.
산초 다발라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몬드라곤에게 작전을 위임했다. 몬드라곤은 베르헌옵좀 인근 보엔스드레흐트에 스페인군, 왈롱군, 그리고 독일군 파이크병을 포함한 병사 3,000명을 배치했다. 1572년 10월 20일 저녁, 몬드라곤과 그의 부하들은 플로메르트와 안내자들을 앞세워 우스터스헬더강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강을 건너는 동안 화약과 식량이 든 자루를 창에 꿰맨 채 머리 위로 들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 밤 동안 강에서 15km를 이동한 이들은 해가 뜨기 직전에 후스 마을에서 20km 떨어진 예르세케 해안에 도착했고, 횡단 도중 단 9명만 잃었다. 그 후 몸을 녹인 뒤 후스 마을로 진격했다.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은 스페인군이 바다를 통해 올 거라고 예상했기에, 스페인 테르시오가 들판에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스페인군의 강력한 전투력을 경계해 포위를 풀고 배에 탑승하러 이동했고, 몬드라곤과 스페인군이 추격해 적병 800명 이상을 사살하거나 생포했다. 이리하여 후스 마을을 구원한 몬드라곤은 보상으로 알바 공작에 의해 제일란트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1573년 5월, 300명의 병력을 거느린 몬드라곤 대령은 톨렌 섬으로 통하는 해협의 수문을 탈환한 뒤 톨렌 섬으로 넘어가서 1,200명의 네덜란드 반군을 기습해 몰아내고 톨렌 섬을 탈환했다. 이후 네덜란드 반란 세력에게 포위된 전략적 거점인 미델부르크의 지휘권을 맡았다. 1574년 1월, 미델부르크로 보급품을 운반하려던 스페인 함대는 네덜란드 함대에 격파되어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2월 18일, 몬드라곤은 항복을 강요당했고, 수비대와 가톨릭 성직자들을 데리고 왕실에 충성하는 지역으로 돌아가는 조건으로 항복한 뒤 플란데런으로 돌아갔다.
1575년 9월 28/29일 밤, 스하우웬 섬으로 수영해 건너가는 몬드라곤과 스페인 병사들.
1575년 초, 몬드라곤은 안트베르펜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겐트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9월 28/29일 밤. 그는 후스 섬에서 했던 것처럼 병사들을 이끌고 강을 건너서 스하우웬 섬으로 이동해 그곳을 탈환했다. 1575년 10월 말 지르크제를 포위한 몬드라곤은 네덜란드 바지선들이 스페인군의 맹포격을 무릅쓰고 마을에 식량과 전쟁 물자를 보급했기 때문에 공략에 애를 먹다가, 1576년 3월이 되어서야 마을로의 모든 접근을 봉쇄했다. 오라녀 공 빌럼 1세와 로드베이크 반 보이소의 지휘받은 네덜란드군이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세 차례 시도했다. 월 11일에 대규모 해전이 벌어졌지만, 승패가 갈리지 않았습니다. 5월 27일의 두 번째 해전은 스페인군의 저지로 실패했고, 보이소 제독은 전사했다. 이후 세 번째 시도가 이어졌지만 또 다시 실패하자, 네덜란드군은 6월 13일에 철수했다. 굶주림에 시달리던 수비군은 항복 협상을 시작했고, 6월 29일에 항복했다. 수비대는 안전을 보장받고 도시를 떠났고, 지르크제 시는 10만 길더를 배상금으로 지급해야 했다.
지르크제를 점령하면서, 제일란트 중부는 스페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지르크제를 함락한 직후인 1576년 7월 12일, 오랫동안 기다려온 약속된 급료를 받지 못한 스페인군이 분노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주민들에게서 재산을 갈취한 뒤 11월 3일 지르크제를 떠나 브라반트로 따라갔고, 몬드라곤은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브라반트로 따라가야 했다. 혼란을 수습한 후인 1578년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 총독의 지휘 아래 림부르크와 달렘 섬을 함락시켰으며, 1579년 6월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의 지휘 아래 4개월 간의 포위 공격 끝에 마스트리흐트를 함락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 후 플랑드르의 전반적인 상황을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게 보고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갔다가 1580년에 돌아왔고, 1580년과 1581년 사이에 플란데런 의회 의원을 맡았다.
1582년, 테르시오 야전 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이 부대는 본래 '시칠리아 테르시오'였지만, 이때부터는 '몬드라곤 테르시오'로 일컬어지게 된다. 1584년 9월 17일 겐트 인근 전투에 참여해 앙주와 알랑송 공작 프랑수아[1]와 대결했으며. 니노베 공방전에 참전해 랭케르크 요새를 함락시키는 공작을 세웠다. 1584년 7월~1585년 8월 17일 알레산드로 파르네세가 안트베르펜 공방전을 단행했을 때도 참전해 안트베르펜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 일조했다.
그 후 안트베르펜 총독을 맡아 여생을 보내던 몬드라곤은 1592년 알레산드로 파르네세가 사망한 뒤 네덜란드의 새 총독으로 부임한 페터 에른스트 1세 폰 만스펠트포르데로르트에 의해 테르시오 지휘관으로 복귀했다. 만스펠트는 위그노 전쟁에 참여하러 떠나면서 몬드라곤은 브라반트군 총사령관이자 플란데런군 전체의 상사로 선임했다. 1597년 7월 26일~9월 2일 네덜란드 공화국 스타트허우더 마우리츠가 이끄는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이 1차 쿠보르던 공방전을 벌이자, 플란데런 방면 스페인군 총사령관 프란시스코 베르두고의 지휘하에 쿠보르던을 구하러 달려왔지만, 마우리츠가 구축한 포위망이 워낙 굳건해서 좀처럼 뚫지 못하다가 결국 쿠보르던 구원을 포기하고 철수했고, 쿠보르던 수비대 사령관 프레데릭 반덴베르흐는 수비대가 무사히 나갈 수 있게 해주는 대가로 항복했다.
1595년 7월 14일, 마우리츠는 보병 6,000명, 기병 200~300명, 그리고 대포 16문을 이끌고 잉글랜드 장성 프랜시스 베레와 함께 1차 흐룬로 공방전을 단행했다. 당시 81세의 노장이었던 몬드라곤은 안트베르펜에서 스페인 연대 2개, 스위스 용병 2천 명, 왈롱 부대, 그리고 윌리엄 스탠리의 아일랜드 연대로 구성된 보병 7,000명, 기병 1,300명을 이끌고 도시를 구원하러 출진했다.
몬드라곤은 라인강을 건너기 위해 브라반트와 헬러를 거쳐 진군했다. 이에 대해 여러 장교가 흐룬로로 곧장 달려가지 않고 라인강을 굳이 건너는 계획에 의문을 제기했고, 병사들은 투덜거렸다. 그러자 몬드라곤은 의자를 가져와 라인강둑에 앉은 채 모든 병력이 강을 건널 때까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밝혔다. 또한 흐룬로를 구원할 뿐만 아니라, 마우리츠가 철수하지 않으면 그와 직접 교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병사들은 입을 다물었고, 선박 다리를 사용하여 강을 건넜다.
7월 21일, 마우리츠는 몬드라곤의 스페인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스페인군이 멀리 돌아서 진군하는 걸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마우리츠는 뒤늦게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당황했다. 그는 포대와 아케드를 서둘러 완성하려 했고, 도르스텐의 다리를 해체하려 했지만, 주민들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7월 24일,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은 흐룬로를 향해 맹렬한 포격을 가한 뒤 즉각적인 항복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7월 25일, 마우리츠는 빌럼 로드베이크와 다른 장교들과 상의한 후, 도시 포위망을 완벽하게 구축하지 못한 마당에 스페인 구원군과 싸우는 건 무리한 짓이니 포위를 해제하기로 했다.
마차가 부족했기에 진영과 즉시 가져갈 수 없는 모든 것을 불태웠고, 보르쿨로와 울프트를 거쳐 젤햄으로 철수했다. 전장에는 철갑 창 10,000개가 남겨졌다. 마우리츠의 군대는 기병대와 블러드하운드를 동원해 그 지역을 떠도는 산적 집단을 소탕했다. 그 후 흐룬로에 입성한 몬드라곤은 네덜란드의 공격으로부터 라인베르크를 지키기 위해 남쪽으로 진군했다. 그는 베젤 강 인근 딘스라켄에 군대를 주둔시켰고, 마우리츠는 이에 맞서기 위해 베젤에 진영을 세웠다. 양쪽 군대 사이에는 리페강이 흘렀다. 스페인군의 진지는 강력했다. 후위대와 좌익은 라인강으로, 우익은 리페강과 '테스터부르크'(Testerburg)라고 불리는 황무지 언덕으로 덮여 있었다. 두 군대는 몇 주 동안 서로를 바라봤고, 두 기병대가 정찰 임무를 수행하면서 종종 소규모 전투를 벌였다.
얼마 후, 스페인 식량 수집대는 진영에서 2~3리그 떨어진 곳에서 식량을 찾으러 출진했다. 이 정보를 입수한 마우리츠는 적 식량 수집대를 매복 공격해 타격을 입히기로 했다. 9월 1일, 그는 사촌이며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령관인 필리스 반 나소에게 매복 작전의 지휘권을 맡기고, 다음 날 새벽에 리페 강을 건너 스페인 식량 수집대가 지나갈 것으로 예상되는 숲에 숨어 있다가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마우리츠의 목표는 식량 수집대를 격파하고 식량을 빼앗아서 네덜란드 진영으로 인도해, 몬드라곤이 더 큰 병력을 동원해 이를 되찾으려고 달려오도록 유도한 후, 필립스가 이들을 유인해 네덜란드 진영으로 후퇴하면 마우리츠가 적군을 급습해 막심한 타격을 입히기로 했다. 필립스는 매복 공격을 위해 500~700명의 네덜란드 및 잉글래드 기병대를 동원했고, 그의 두 형제인 에르네스트 카시미르와 로더베이크 권터, 솜즈의 에른스트 백작, 파울과 마르셀러스 백스, 그리고 잉글랜드 대위 니콜라스 파커, 로버트 베레 등이 동행했다.
그러나 스페인군은 적의 의도를 간파했다. 마우리츠의 이복형제이자 후계자인 프레데릭 헨드릭의 오라녀 공작들의 일대기를 출간하기 위해 고용한 프랑스 법학자 조세프 드 라 피세에 따르면, 몬드라곤은 연합군에서 이탈한 잉글랜드 군인을 통해 적의 매복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반면에 이탈리아 예수회 수도자 안젤로 갈루치에 따르면, 몬드라곤은 적진에 숨어든 간첩들을 통해 정보를 입수했다고 한다. 아무튼 몬드라곤은 적군의 기습 공격을 역이용하기로 했다. 보병 300명, 기병 150명이 식량을 수집하고 돌아가는 아군을 지키게 했고, 부관 후안 데 코르도바에게 머스킷 병사 300명과 대규모 기병대를 이끌고 아군을 매복 공격하려는 적을 역습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리페 전투에서,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 100~300명이 사상당했고, 스페인군은 60명이 사상당했다. 또한 네덜란드 장성 필립스 반 나소는 생포된 뒤 다음 날 부상이 악화하여 사망했다.
리페 전투는 비록 소규모 전투였지만, 그동안 마우리츠의 공세에 밀리기만 했던 스페인 진영은 오랜만에 거둔 호쾌한 승리에 기뻐했다. 그들은 캉브레 앞에서 대포 87문, 머스킷과 아르케부스 6,000개로 도시를 향해 3번의 일제 사격을 가하며 승리를 기뻐했다. 그 후 스페인과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은 각자의 진영에서 16일간 대치했지만, 별다른 군사 행동을 벌이지 않았다. 1595년 11월, 몬드라곤은 뫼즈 강을 다시 건너 여러 마을에 군대를 분산시켰고, 마우리츠도 숙영지로 돌아갔다.
1595년 12월 안트베르펜 성으로 은퇴한 그는 64년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1596년 1월 4일에 자연사했다. 그는 아들 알론소를 안트베르펜 성주로, 조카 크리스토발을 파이크 부대 지휘관으로 세워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