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프레데릭 반덴베르흐 Frederik van den Bergh | |
| 성명 | 프레데릭 반덴베르흐 Frederik van den Bergh |
| 출생 | 1559년 8월 18일 |
| 스페인령 네덜란드 헬데를란트 울프트 | |
| 사망 | 1618년 9월 3일 |
| 스페인령 네덜란드 노르트브라반트 박스미어 | |
| 아버지 | 빌럼 4세 반덴베르흐 |
| 어머니 | 마리아 반 나소 |
| 형제 | 헤르만, 헨드릭 외 13명 |
| 직위 | 프리지아, 흐로닝언, 트렌터, 오버레이설, 링겐의 총독. |
1. 개요
네덜란드의 귀족. 네덜란드 독립 전쟁 초기 네덜란드 반군에 가담했지만, 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스페인군에 귀순한 뒤 네덜란드 공화국에 맞서 싸웠다.2. 생애
1559년 8월 18일, 스페인령 네덜란드 헬데를란트 울프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빌럼 4세 반덴베르흐이고, 어머니는 빌럼 1세의 누이인 마리아 반 나소였다. 형제로 헤르만, 헨드릭 외 13명이 있었다. 1566년, 아버지 빌럼은 여러 귀족과 함께 네덜란드 여성 총독인 파르마의 마르가레테에게 청원서를 제출해, 개신교 탄압을 중단해달라고 호소했다. 그 후 알바 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가 신임 총독으로 부임하여 청원서에 서명한 인사들을 탄압하자, 빌럼은 가족들을 데리고 브레멘으로 피신한 뒤 빌럼 1세의 휘하에 들어가 네덜란드 반군의 주요 장성을 맡았으며, 1581년부터 헬러 총독을 역임했다.그러나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에게 접근해 스페인군에게 투항하고 헬러를 넘기려 했다가 발각되면서 1583년 1월 5일 온 가족과 함께 체포된 뒤 1584년 3월까지 연금되었다. 빌럼 1세는 그가 울프트에 있는 자기 성으로 은퇴하고 향후 전쟁에서 중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 석방했다. 하지만 1584년 후반, 빌럼 4세 반덴베르흐는 아들들과 함께 공개적으로 스페인군 지지를 선언했고, 2년 후에 울프트 성에서 사망했다.
프레데릭은 이러한 아버지의 행보에 동참했다. 1582년 네덜란드 반군 내에서 기병대 지휘권을 얻어 리트마이스터로 승진했고, 1년 후 벤로 주지사가 되었다. 1584년 아버지, 형제들과 함께 스페인 진영으로 넘어간 후 1586년 1차 그라브 공방전에 참전했다가 다리에 총을 맞았다. 1586년 건강을 회복한 뒤 스페인군의 네이메헌 공략전에 참여했다가 수비대가 내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일시적으로 혼절했다. 이후 쥣펀 인근의 아이셀에서 네덜란드군의 공격에 맞서 강 성안의 경사로를 방어하는 데 일조했다.
1587년 겨울에 흐로닝언에서 복무하며 스페인군을 성공적으로 지휘했다. 그는 돌라드 강의 동쪽에서 서쪽 강둑으로 부대를 성공적으로 대피시켰다. 이 강을 건너는 것은 강에 떠다니는 얼음 때문에 위험했는데, 그가 이 일을 해냈기에 명성이 급등했다. 그 후 네덜란드군이 흐로닝언을 포위했을 때 스페인군이 이를 격퇴하는 데 일조했다. 1592년 7월 26일, 마우리츠가 쿠보르던을 탈환하려 하자 이에 맞서 꿋꿋이 항전했지만, 프란시스코 베르두고가 이끄는 스페인 구원군이 마우리츠가 구축한 방어선을 좀처럼 뚫지 못하다가 전염병에 시달린 끝에 철수하자, 결국 9월 2일에 무기, 깃발, 짐을 온전히 챙기고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는 조건으로 항복하고 쿠보르던을 마우리츠에게 넘겨줬다.
1593년, 프레데릭은 6,000 병력을 이끌고 트벤터에서 흐로닝언으로 진군했지만, 빌럼 로드베이크 반 나소딜렌부르크가 이끄는 네덜란드군에 가로막혀 톨베르트 전투에서 격퇴되었다. 이때 그가 탔던 말 두 마리가 죽었고, 그는 팔에 총을 맞았다. 1595년 7월 흐룬로를 포위한 마우리츠에게 압박을 가해 흐룬로 포위를 풀고 물러나게 한 크리스토발 데 몬드라곤 장군의 원정에 형제 헤르만과 함께 했다. 이후 픠리지아, 흐로닝언, 트렌터, 오버레이설, 링겐의 총독으로 부임해 링겐에서 통치했다. 1597년 10월 25일 마우리츠가 링겐 공방전을 감행하자, 구원군이 오기를 간절히 기대했지만, 플란데런 총독 알브레히트 7세로부터 구원군을 보낼 수 없으니 자신의 안전과 도시의 안위를 보전하라는 명령을 받자, 결국 11월 12일에 항복한 후 무기와 깃발, 짐을 챙기고 플란데런으로 이동했다.
1598년 스페인 별동대를 이끌고 두팅험과 쉴렌부르크 성을 점령한 뒤 두팅험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1597년 스틴베이크 공략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원수로 진급한 뒤 1599년 잘트봄멜 공방전에 참여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1600년 니우포르트 전투에서 알브레히트 7세의 지휘하에 마우리츠와 맞섰고, 1601~1604년 오스텐트 공방전에 참여했다. 또한 1603년 마우리츠와 빌럼 로드베이크 반 나소딜렌부르크를 상대로 스헤르토헨보스 공방전을 치러 스헤르토헨보스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이 전공으로 알브레히트 7세의 친위대 대장으로 진급했으며, 플란데런에 있는 모든 스페인군의 부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암브로조 스피놀라의 1605-1606년 공세에 참여해 여러 도시를 접수하는 데 일조했다.
1604년 아르투아 총독으로 발탁되어 1611년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고, 1611년부터 1618년까지 오버헬데를란트의 총독을 맡았다 1618년 9월 3일 노르트브라반트의 박스미어에서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결혼하지 않아 자식을 두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