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4 18:29:27

클라라 주미 강

<colbgcolor=#000><colcolor=#fff> 클라라 주미 강
Clara-Jumi Kang
파일:클라라 주미 강.jpg
한국명 강주미
출생 1987년 6월 10일 ([age(1987-06-10)]세)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만하임
국적
[[독일|]][[틀:국기|]][[틀:국기|]]|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1]
가족 아버지 강병운, 어머니 한민희
2남 2녀 중 차녀
직업 바이올리니스트
학력 만하임 음악대학 예비학교
줄리아드 스쿨 예비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사 • 예술전문사)
뮌헨 음악대학 (최고연주자 과정)
종교 개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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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수상경력4. 발매 음반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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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계 독일인 바이올리니스트. 재독교포 2세이다. 한국 이름은 강주미.

파가니니아나(Paganiniana. 나단 밀스타인 작곡) 연주 영상.

2. 생애

1987년 독일 만하임에서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부모 모두 음악인으로 특히 아버지인 성악가 강병운(Philip Kang)은 독일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바그너 작품들로 이름을 날렸고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한국인 최초로 출연하기도 했던 베이스로, 이후 서울대 음대 교수로 초빙되어 귀국해 재직하다 현재는 은퇴했다. 어머니 한민희 또한 쾰른 음악대학교 출신의 성악가로, 독일에서 젊은 시절 오페라 주역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피아노로 음악을 시작했지만,[2] 이후 바이올린으로 바꾸어 10살도 안된 나이에 재능을 인정받아 줄리어드 음대 등에서 수학했다. 줄리어드 시절에는 이작 펄만, 장영주 등을 발굴했던 도로시 딜레이를 사사하기도 했다.

12세때 학교에서 농구를 하던 중 왼쪽 새끼손가락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다. 당시 대여받았던 고가의 바이올린을 반납하고, 세계적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과의 협연도 무산되었다. 게다가 좀처럼 손가락이 회복되지 않아서 연주를 다시 하기 어렵다는 진단을 받기도 하는 등, 하마터면 연주자로서의 경력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 다행히 3년 동안의 재활을 통해 연주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3] 이때의 일은 그녀가 겪었던 가장 힘든 시기로 회자된다.

연주를 재개한 2004년(당시 16세)에 한예종을 들어가 김남윤 교수를 사사했고,[4] 이후 다수의 콩쿠르에 입상하였다.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 신지아, 피아니스트 손열음 등과 함께 한국 클래식 음악계에서 1980년대생 출신의 대표적 연주자로 손꼽힌다.

3. 수상경력

연도 대회 수상
2009 서울국제음악콩쿠르 1위
2009 하노버 국제콩쿠르 2위
2010 센다이 국제콩쿠르 1위
2010 인디애나폴리스 국제바이올린콩쿠르 1위
2015 차이콥스키 국제콩쿠르 4위[5]

4. 발매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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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데카 제작으로 '모던 솔로'(Modern Solo)라는 음반을 발표했다. 외진느 이자이, 나단 밀스타인, 하인리히 빌헬름 에른스트, 이영조 등의 작품 9곡 연주를 담고 있다.

파일:external/www.applemusic.co.kr/147808175766l0.jpg
2016년에는 역시 데카에서, 피아니스트 손열음과 함께 슈만, 브람스의 곡들을 담은 음반을 발표했다. 해당 곡들은 11월 17일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연주회에서도 연주된 바 있다.
파일:cjkviolinist.jpg
2021년에는 같은 한예종 출신 피아니스트 김선욱과 함께 베토벤 탄생 250주년 기념으로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을 음반으로 발매했다.

5. 기타



[1] 링크[2] 클라라라는 이름도 슈만의 부인이자 피아니스트였던 클라라 슈만에서 따왔다. 어머니가 지어준 이름인데, 피아노로 음악 공부를 시작했던 것을 생각하면 딸이 피아니스트가 되길 기대했던 듯.[3] 당시 '1년만 더 해보고도 안되면 미련없이 그만 두자'는 각오로 연습을 재개했는데, 다행히도 부상 전의 연주감각을 회복할 수 있었다.[4] 당시 한국어가 익숙치 못해서 한예종으로의 '역유학'을 주저하기도 했지만, 연주 연습에만 전념하면 된다는 김남윤 교수의 설득, 배려를 받아들였다.[5] 함께 출전한 김봄소리는 그 다음 순위인 5위에 입상했다.[6] 정명화, 정경화, 정명훈 집안도 7남매 중 6명이 음악을 했으나 막내이자 정명훈의 남동생 정명규는 의사이다.[7] 20대 초반인 2006년 자신이 직접 작곡하고 부른 노래를 녹음한 데모 CD를 들은 미국의 한 음반 제작자(1990년대를 대표하는 디바 셀린 디옹의 담당자였다고 한다)로부터 가수 제의를 받았다는 일화가 있었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