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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모폰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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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6143a><colcolor=#fff> 정경화 鄭京和 | Kyungwha Chung | |
출생 | 1948년 3월 26일 ([age(1948-03-26)]세) |
서울특별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시민권 (前) [[영국| ]][[틀:국기| ]][[틀:국기| ]] 시민권 (前) |
직업 | 바이올리니스트 줄리아드 스쿨 교수 |
소속 | 뮤직앤아트컴퍼니 |
학력 | 줄리아드 스쿨 (학사•석사) 뉴잉글랜드 음악원 (명예박사) |
경력 | 이화여자대학교 석좌교수 |
가족 | 어머니 이원숙 언니 정명소, 정명화, 오빠 정명근, 남동생 정명철, 정명훈, 정명규[1] 슬하 2남 |
배우자 | 제프리 리게트(이혼) |
종교 | 개신교[2] |
[clearfix]
1. 개요
<colbgcolor=#315288> 대한뉴스에 방영된 귀국 연주회 모습 |
[3] |
한국의 바이올리니스트. 여성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동양인 클래식 연주자로서 전례가 없는 국제적 인지도와 활동 영역을 일군 선구자적 인물이며 세계적인 바이올린의 여제 및 대거장 이라고 할수 있다.[4]
2. 약력
서울 출생. 4남 3녀 중 셋째 딸로, 첼리스트 정명화가 작은 언니, 지휘자 정명훈이 남동생이다. 2살 무렵 이미 정확한 음감을 보였으며, 3살 때는 라디오 아동 노래자랑에 나가 우승했을 만큼 음악적 재능을 타고 났다고 한다. 유달리 자식들의 음악 교육에 열정이 있던 어머니 덕분에 4살 무렵 다른 형제들과 피아노를 시작했지만, 정작 피아노에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해 연습 중 졸기 일쑤였다고... 그러나 6살에 처음 접한 바이올린은 운명적 첫사랑이라고 회고할 정도로 단숨에 빠져들었다. 이후 대한민국 1세대 바이올리니스트인 양해엽[5]에게 1년 반 동안 가르침을 받았다.9살 무렵에는 이미 서울시립교향악단과 멘델스존의 협주곡을 연주할 만큼 실력이 일취월장해 있었고, 13세 때 미국 줄리아드 스쿨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녀의 스승은 '명 조련사'란 별명으로 불리던 이반 갈라미언으로 이작 펄만, 핀커스 주커만, 마이클 라빈 같은 일급 연주가들을 길러내, 그때까지 러시아 아우어 학파가 주도하던 바이올린 계를 미국 줄리어드 학파로 뒤바꾼 일등 공신. 참고로 그의 뒤를 이어 줄리어드에서 장영주를 비롯한 숱한 일급 바이올리니스트들을 길러내고 있는 도로시 딜레이도 그의 제자다. 이 수학 기간 중 갈라미안 이외에도 요제프 긴골드와 폴 마카노비츠키[6] 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
1967년 미국의 권위 있는 레벤트리트 콩쿠르에서 핀커스 주커만과 공동 우승했다. 이후 정명화/정명훈과 함께 백악관에서 리사이틀을 갖기도 하고, 병환 중인 나탄 밀스타인을 대신해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순회 연주회를 갖기도 했다. 1969년에는 지난 세대의 유명 연주가였던 말년의 요제프 시게티를 만나 짧은 가르침을 받는데, 갈라미언이 바이올린의 표현력과 기교를 가르쳤다면, 시게티는 음악 전체의 흐름을 읽는 법, 음악을 넘어 미술과 문학등 다른 예술 분야에 대한 이해를 강조하는 등 정경화의 예술적 깊이를 넓히는 데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후 시몬 골드베르크 밑에서도 잠시 수학했다.
1970년엔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연주로 런던 데뷔를 하는데[7], 이 날의 연주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순식간에 스타로 떠올랐다. 같은 해 유명 클래식 레이블인 데카에서 차이콥스키/시벨리우스 협주곡으로 첫 음반을 녹음했고, 그 데뷔반의 성공으로 데카의 전속 아티스트로 계약한다. 이어지는 몇 년간 그녀의 커리어는 성장에 성장을 거듭, 유럽과 북미, 동아시아 권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유명 지휘자 대부분과 협연을 펼치며, 일 년에 100회가 넘는 연주회를 소화하는 세계적 연주가로서의 입지를 과시하기에 이른다.
1984년 영국인 사업가 제프리 리게트와 결혼, 이후 연달아 두 아들을 출산했다. 아이들 양육과 건강상의 이유로 한 동안 활동을 대폭 줄이면서, 이후의 커리어는 양이나 인지도 측면에서 70년대 후반에서 결혼 전까지의 전성기에 못미친다는 평이지만, 음악적인 성장은 계속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1988년에 또 다른 메이저 음반사인 EMI의 전속 아티스트로 계약했으며, 89년에는 슈트라우스/레스피기 소나타 녹음으로, 94년에는 바르톡 협주곡 2번 녹음으로 세계 최고 권위의 음반상 중 하나인 그라모폰 상을 수상했다. 1992년 정 트리오가 유엔 마약퇴치친선대사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지휘자 솔티 팔순 기념 연주회[8], 95년에는 지휘자 불레즈의 칠순 기념 콘서트에 독주자로 초청되는 등[9] 일급 독주가로서의 행보를 유지했다. 97년에는 국제무대 데뷔 30주년 기념 콘서트 시리즈를 한국과 영국 런던 바비칸 센터에서 열었다.
2005년 한국에서 공연 리허설 중 왼손 부상을 입어 한동안 독주자로서의 활동을 중단했으나[10] , 2010년 한국에서 아쉬케나지와 브람스 협주곡을 연주하며 무대 복귀를 알렸으며, 2011년 대관령 국제 음악제에서의 연주와 일련의 독주회를 가졌다. 2007년 모교 줄리어드 음악원에 교수로 초빙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2012년에는 이화여대 명예교수직을 받아들였다. 언니 정명화와 함께 공동으로 대관령 국제 음악제의 예술 감독직을 맡는 한편 주로 한국에서 왕성한 리사이틀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12년 김승우의 승승장구에 출연해 여러가지 이야기들과 그간 보여왔던 모습과는 많이 다른 유하고 재미진 모습들을 보였다. 특히 자신의 그 과르네리를 제국의 아이들의 임시완에게 건네 나훈아의 '사랑'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건 정말이지...
2013년 말에는 일본과 중국, 타이완에서 순회 연주회를 했고, 2014년 말에는 런던 데뷔 무대였던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대대적인 컴백 리사이틀을 성공적으로 개최[11]하는 등 국제적인 활동도 재개했다. 2015년에는 베토벤 소나타로 이뤄진 프로그램으로 일본과 한국에서 순회 연주를 했으며, 샹하이 필하모니의 시즌 오프닝을 브루흐 협주곡으로 열었다.
2016년에는 워너 클래식(구 EMI)과 계약을 맺고, 첫 녹음으로 평생의 숙원이던 바흐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 전곡을 녹음했으며, 동해 7월에는 스위스 베르비에 페스티벌 오프닝을 브람스 협주곡으로 열었고, 새 바흐 앨범 발매 즈음에 중국, 한국, 일본에서 바흐 무반주 전곡 프로그램으로 순회 연주를 가졌다. 2017년 5월에는 런던 바비컨 센터와 뉴욕 카네기홀에서의 리사이틀로 바흐 무반주 전곡 연주 대장정을 마무리했다.[12] 2017년 영국의 유력 음악지 그라모폰이 독자 투표로 뽑는 '명예의 전당'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13], 12월 영국에서 녹음한 새 음반 '아름다운 저녁'이 2018년 봄에 출시되었다.
2018년 1월에 언니 정명화와 7년간 공동으로 맡고 있던 대관령 국제 음악제의 예술감독직을 떠나며, 보다 왕성한 해외 활동을 위해서라고 밝혔다. 2월에는 안토니오 파파노가 지휘하는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와 브람스 협주곡을 공연했으며 6월에는 떠오르는 스타 피아니스트 조성진과의 듀오 리사이틀로 성공적인 순회 연주를 가졌다.
2014년 14년만의 런던 리사이틀을 기념하는 영상. 곡은 바흐의 샤콘느이다. 명동성당에서 촬영되었다. |
3. 음악적 면모
정경화는 줄리어드 악파 출신다운 고른 테크닉과 깔끔하고 아름다운 음색, 그리고 스승 갈라미언이 가르친 절도있고 유연한 활 기술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낭만주의적 연주가로, 음악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애정을 바탕으로 완전히 몰입해 자신을 불태우는 것을 이상적인 연주로 생각하는 듯 하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연주는 늘 대단히 정서적이며 내밀한 경험이 되는데, 지적이고 객관적인 연주를 선호하는 이들에게 자기도취적이라고 비판받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취향을 떠나 독주자로서의 강렬한 존재감에 있어 그녀에 비견할 만한 연주가가 많지 않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흔히 '불꽃 튀는 열정의 연주가'로 표현되지만, 사실 연주가로서 철저한 컨트롤이 바탕이 되지 않은 열정은 독이 될 가능성이 더 크다. 마냥 열정적인 활질로 밀어붙이기만 해서는 연주가 자신은 지치고 듣는 관중도 쉽게 질려버리기 십상이다. 정경화는 정확한 리듬 감각, 탁월한 집중력, 이미 데뷔 초부터 평론가들이 '마치 여러 사람들의 다른 목소리를 한 악기로 연주하는 듯'하다고 표현한 다채로운 음색, 시게티로부터 배운 음악 전체와 앙상블을 조망할 줄 아는 능력[14]을 바탕으로 자신의 열정을 조절할 수 있는 연주가다. 조금 더 그녀의 이런 면모를 살펴보려면 흔히 언급되는 낭만주의 협주곡보다도 20세기 작품이나 느린 악장의 연주를 들어보길 권한다. 난해하고 모호해지기 십상인 바르톡이나 스트라빈스키를 뜨거우면서도 명쾌하게 풀어내고, 바흐의 느린 멜로디가 마치 영원히 지속되는 듯 느껴지게 만드는 것은 이미 언급한 엄격한 음악적 자질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열정의 연주가'라는 타이틀이 주기 쉬운 오해대로 그녀가 본능과 감각에 주로 의지한 비이성적인 연주가였다면, 데뷔 후 40년이 넘도록 매번 무대에 등장할 때마다 신선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정경화가 연주 시에 시전하는 아름다운 몸동작도 또 하나의 백미. 이전 세대 연주가들은 보통 내내 한 자리에 서서 표정하나 안 바꾸며 연주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이에 비해 마치 온 몸으로 연주하듯 역동적인 정경화의 연주 모습은 데뷔 초부터 자주 언급이 되었다. 전 분야에 걸쳐 요즘 젊은 연주가들의 몸동작이 상당히 커진 경향이라 더 이상 그리 특별할 것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이전 이후 세대 연주가들을 통틀어도 정경화는 연주 모습이 유독 아름다운 연주가라 할 수 있다. 사실 한 쪽 턱 밑에 악기를 끼우고 연주한다는 것이 그다지 자연스런 자세가 아닌지라, 상당수 바이올리니스트들은 고개나 어깨가 경직된 경우가 많다. 턱으로 악기를 짓누르며 고개는 지판을 향해 고정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정경화는 얼굴과 턱에서 악기와 어깨에 이르기까지 경직된 부분이 하나도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보인다. 연주를 하며 얼굴이 정면을 보든 지판을 바라보든, 몸 전체를 움직이거나 때로는 무대를 발로 구를만큼 흥분하는 순간에도 악기를 턱으로 고정한다는 느낌 없이, 마치 바이올린이 자연스레 몸에 일부분인 듯 하다. 어릴 때부터 바른 자세를 제대로 배우고 연습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 음악가는 오직 음악으로만 말한다고 하지만, 사실 무대 공연가로서 몸에 경직된 부분이 없이 자연스러운 편이 관객들이 보기에도 편안하고, 연주가 자신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보다 막힘 없이 표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경화는 비주얼한 (속된 말로 비디오가 되는) 연주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식으로 출시된 영상물은 멘델스존과 베토벤, 월톤 협주곡 정도이지만, 7,80년대에 영국과 독일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공연 영상이 상당수 되는 편이며, 최근 유투브에 개인 팬들이 올린 자료들로 확인해 볼 수 있게 되었다.
4. '한국인', 그리고 '여성'이란 화두
한 명의 음악가로 평가할 때는 국적이나 성별을 거론하는 것은 득보다는 실이 많겠지만, 개인으로서의 인생 역정을 살피는 데에는 그 둘을 떼어놓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한국인이며 여성이라는 점에서 정경화의 업적이 더욱 빛나는 것은 어쩔 수 없을 듯 하다.요즘에야 세계 유수의 무대에서 한국인 음악가를 만나는 것이 전혀 낯설지 않은 일이 되었지만[15] 정경화가 음악을 처음 배우던 1950~60년대에 한국은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후진국이었다. 그런데다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어린 아이에게 진지하게 음악을 가르친다는 개념 자체가 별로 없던 시절이었다. 어린 시절 정경화의 음악적 성장이 너무나 빨라 어떤 바이올린 선생도 오랜 기간 가르칠 수 없었다는 일화는 정경화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당시 한국의 음악 교육 수준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적인 시스템이나 뒷받침이 없는 상황에서 모든 것은 개인의 천재성과 노력 그리고 가족의 희생으로 감내해야 했다. 권위적인 군사정권 시절이던 당시 한국 정부는 그들이 필요할 때는 '천재 소녀'로 치켜세우며 일본과 동남아 문화 사절단에 공연자로 동원했지만, 정작 정경화 쪽에서 정부의 힘이 필요할 때에는
물론 이방인으로서의 미국 생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미국의 잊혀진 전쟁중 하나인 6.25전쟁이후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는지도 잘 모르던 미국의 교수와 음악인들은 정경화의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처음엔 영어도 거의 못했던 그녀는 선생님이 자신의 이름을 이상한 발음으로 출석을 부르는 거에도 대답을 못할 만큼 수줍음을 탔다고 한다. 유학하는 자녀들 뒷바라지를 위해 식당을 운영한 부모님을 들어 아이들은 그녀를 '쿠키 (cooky)'라고 놀렸다. 훗날 인터뷰에서 정경화는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시엔 그게 그렇게 듣기 싫었다"고 회고한다.
스승 갈라미언은 정경화를 아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녀가 정말 성공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독주자가 되려면 결혼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의 이런 당부가 기우가 아닌 것이, 이전 세대의 여성 연주가들은 대부분 결혼이나 출산과 함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정경화의 회고에 따르면, 그녀가 레벤트리트 콩쿠르에 나가겠다 했을 때에도 갈라미언의 반응은 "(자신의 또 다른 제자인) 주커만도 나가는데, 여자인 널 우승시켜 줄리가 없다"였다고 한다.
갈라미언의 예상대로 콩쿠르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핀커스 주커만은 당시 미국 바이올린계의 대부이자 음악계 마당발인 아이작 스턴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비등한 실력을 보이는 정경화에게 무언의 압력이 가해졌던 것이다. 결승 연주시 보통은 제비뽑기로 연주 순서를 정하지만, 그런 절차 없이 정경화에게 첫 번째 순서를 배정해 버렸다. 그러나 결승 연주에서 모든 것을 보여준 정경화는 다른 결승자들의 연주는 들을 것도 없이 대기실로 돌아와 잠이 들었다고 한다... 그에 반해 긴장한 주커만은 결승에서 실수를 저질렀지만, 그럼에도 스턴의 압력으로 결승 연주를 다시 한 번 치러야 하는 유례없는 일이 일어났고, 결과는 무려 주커만과 정경화의 공동 우승으로 정해져 버렸는데 역시 전례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부정할 수 없는 실력차이에도 '동양인' '여자'에게 우승자 타이틀 달아주기 싫다고 얼마나 이 악물고 애를 쓰며 억지를 부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16] 콩쿠르 우승 후에도 음악계 유태인 군단과 연결된 주커만은 레너드 번스타인 등과 이미 음반 작업을 했지만, 정경화에게는 굵직한 기회가 별로 들어오지 않았다. 이래저래 유럽행을 택한 것은 그러한 상황에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의도도 컸을 것이다.
성공의 첫 신호탄이 되는 1970년 런던 데뷔 역시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아내의 출산으로 자리를 비운 이작 펄만의 대타로 연주하게 된 기회였는데, 협연할 런던 심포니의 일정이 꼬이는 바람에 리허설에 참석한 오케스트라 단원이 몇 명 없었다고 한다. 그렇잖아도 상의도 없이 대타를 보낸 것에 심통이 나 있던 지휘자 앙드레 프레빈은 그냥 취소를 하자고 제안했다고. 그러나 정경화는 "설마 런던 심포니가 차이콥스키 협주곡을 모르겠나? 마에스트로도 잘 아는 곡일테니, 그냥 해보자"라고 답했다 한다. 무명 연주가가 런던의 일급 무대에 서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아는 그녀로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을 터. 제대로 된 리허설도 없이 시작한 공연은, 오히려 바로 그 때문인지 더 높은 긴장감과 역동성이 강조된 연주가 되었고, 이 날의 센세이셔널한 성공으로 정경화는 일약 스타 연주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러나 성공이 곧 사람들의 편견에서 그녀를 자유롭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언론의 속성상 작은 아시아 여자가 서양 악기를 연주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일쑤였는데, 그 당시 정경화를 묘사하는 단어들을 보면 그 논조를 짐작할 수 있다 - '차이나 돌[17]', '작은 소녀', '이국의 공주' 등등. 73년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 지와의 인터뷰에서 정경화는 "(데뷔 초에) '저런 조그만 한국 여자가 뭘 할 수 있겠어?'라는 사람들의 편견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졌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80년 미국 피플 지와의 인터뷰에서도 "미니 스커트를 입고 나서면 아무도 내 연주를 진지하게 받아주지 않는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았죠. 그러니 무대에서는 터프한 모습을 보여줄 수 밖에요."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그녀의 사진 자료들을 살펴보면 데뷔 초 긴 생머리에 소녀 티가 가시지 않은 모습에서 80년대에 이르러 사자머리 파마에 매서운 표정을 한 모습으로의 변모를 볼 수 있다. 물론 언론은 그에 맞춰 재빨리 '중국 도자기 인형'에서 '암호랑이'로 별명을 갈아치웠고... 요즘에는 야니네 얀센, 힐러리 한, 율리아 피셔 같은 여성 연주가들이 남성 연주자들보다도 더 잘나가는 바이올린계지만, 거의 20년 연하인 안네 소피 무터나 빅토리아 뮬로바 같은 연주자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정경화와 비견할 만한 경력의 여성 바이올리니스트가 없었다는 점만 봐도 당시 그녀가 이룩한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성공의 절정기를 달리던 1984년 정경화는 형제들 중 가장 늦게 결혼을 하게된다. 연평균 10개국 22도시에서 120회의 콘서트를 여는 독주자로서 가정 생활을 택하는 것은 적잖은 모험이었다. 실제로 연이은 두 아들의 출산후 건강이 악화되어 몇 년간 활동을 못했고, 이후에도 육아에 전념하기 위해 활동량을 대폭 줄이게 된다. 두 아들을 '내 인생 최고의 작품'이라 부를만큼 자식 사랑이 극진한 정경화이지만, 89년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지와의 인터뷰에서 "(가정 생활과 연주 생활을 모두 지켜내려는 노력에도) 모든 것을 얻은 듯하지만 또한 어느 것도 얻지 못했다"라고 토로하기도 한 것을 보면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5. 각종 일화
- 6.25 전쟁 중 부산으로의 피난 길에 어린 정경화를 트럭 짐더미 위에 앉혀 두었는데, 밤새도록 가는 강행군에도 2살 짜리 아이가 보채거나 졸지도 않고 내내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고. 그걸 보고 어머니 이원숙 여사가 이미 범상치 않은 아이임을 알아봤다고 한다.
- 4살 무렵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재미를 못 붙이고 피아노 앞에 앉아 졸기 일쑤였다고. 어머니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정경화가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걸 곧잘 따라 치기에 이미 악보를 읽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선생님이 한번 시범 보이는 걸 기억했다 그대로 따라친 것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고 놀라워했다고 한다.
- 바이올린을 처음 잡은 지 일주일 만에 당시 다니던 덕수초등학교 아침 조회 시간 단상에 올라 동요를 연주해 보였다고 한다. 8개월 뒤에는 첫 콩쿠르에 참가해 3위를 기록했다.
- 어릴 때부터 각종 국내 아동 음악 콩쿠르에 입상하며 이름을 날렸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1958년 이화여자대학교가 주최한 콩쿠르에서 바이올린 부문 1등 및 전부문 특별상을 수상한 것. 이때 우승자로서 서울시향과 멘델스존 협주곡을 협연한 것이 자주 언급된다.
- 8살 때 파리로 유학을 떠나는 첫 바이올린 선생님인 양해엽을 따라가고 싶어했다고 한다. 8살 짜리 꼬마가 바이올린을 잘 하고 싶은 욕심에 가족품을 떠나 외국까지 나갈 생각을 했던 것. 처음엔 그냥 애가 떼쓰는 걸로 생각했던 부모님은 정경화가 정말로 진지한 걸 알게되자 밤잠을 설칠 만큼 고민을 했었다고 한다.
- 만 13세, 중학교 1학년을 막 마친 나이에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1997년 인터뷰에서 정경화는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성장이 한국을 떠난 그 시점에서 멈춘 것 같다는 언급을 한다. 또 다른 인터뷰에서는 막 성인이 된 큰아들이 자기보다 세상에 대해 훨씬 아는 것이 많더라고 언급하기도. 어린 나이에 낯선 나라로 떠나 생활해야 했던 상황의 정신적 부담감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 오랜 이국 생활에도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않으려 많은 애를 썼다고. 1980년대 한 인터뷰에서는 "(식사 때) 어쨌든 김치 한 사발은 꼭 있어야 된다"고 언급하기도 한다. 두 아들을 키울 때도 자주 한국 음식을 해 먹이고 한국어도 가르치는 걸 잊지 않았다.
- 군사부일체의 유교 사상이 남아 있는 한국 출신답게 스승 갈라미언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따랐다고. 한 번은 주일 예배 때문에 일요일 수업을 옮길 수 없을까 하는 정경화의 요청에 갈라미언은 '내가 네 신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유명한 정경화는 그 말에 충격을 받을 만도 했을 텐데, 그냥 넙죽 엎드려 받아들였다고. 결혼하지 말라고 극구 말린 갈라미안의 말 때문인지 결혼도 그가 사망한 후에야 했다. 결혼식을 앞두고 한 인터뷰에서는 '스승님도 이만하면 이해해 주실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 19살 무렵 오직 음악만 바라보는 생활에 회의를 느껴 바이올린을 접을까 생각했었다고 한다. 큰언니 명소 씨는 당시에, "온 가족 회의가 소집되었죠. 다른 사람 같으면 전문 매니저나 커리어 상담가가 있었을 테지만, 경화한텐 가족이 전부였거든요"라고 회고한다. 이때 어머니 이원숙의 쿨한 반응이 유명한데,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라'였다고. 이에 정경화 본인이 더 놀라 '아니 엄마가 미쳤나, 내가 그만두려고 하면 오히려 말려야지'하며 마음을 다 잡았다고 한다.
- 레벤트리트 콩쿠르 이전인 1965년 미국 메리웨더 포스트 콩쿠르에 나가 2위에 입상했다. 당시 1위는 역시 한국 바이올리니스트인 김영욱 씨.[18] 정경화의 국제 콩쿠르 경력은 레벤트리트와 함께 이 둘이 전부이다. 상술된 레벤트리트의 기억 때문인지, 이후 정경화는 줄곧 콩쿠르에 대해 '필요악'이라는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 정경화나 언니 정명화 모두 원래는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목표를 두고 있었지만, 한국인으로서 당시 적국인 소련에 입국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 했기 때문에 포기를 해야 했다고. 그리고 결국 동생인 정명훈이 나가서 2위에 입상했다. (그 전에 미국 시민권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 레벤트리트 콩쿠르 우승 후 한국에서 1회 난파 음악상을 받았고, 런던 데뷔 이후에는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에 추대되었다. 1970년대 초반 인터뷰에서 정경화는 종종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인으로 표현되며, 비슷한 시기 한국을 방문한 외국 예술가나 정치인들 역시 (달리 한국에 대해 긍정적인 언급을 할 게 없는 듯) 정경화의 연주를 인상 깊게 기억한다고 언급하기도 한다. 세계에 내놓을 만한 것이 없던 당시 한국 정부는 그녀의 명성을 십분 활용해, 해외용 한국 흥보 필름에 그녀의 연주 영상을 집어 넣기도 했다.
- 그녀의 동문으로 현재 줄리아드 스쿨 교수로 재직중인 핀커스 주커만이 있다.
- 레벤트리트 우승 후 하이페츠에게 가르침을 받을 뻔 했었다고. [19] 실제로 그가 거주하던 캘리포니아까지 찾아갔지만 그의 조건은 '모든 콘서트 참여 금지'였고, 메이저 콩쿠르 우승으로 이제 막 무대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정경화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이라 맘을 돌렸다고 한다.[20] 결과적으로 하이페츠 대신 시게티를 사사하기 위해 스위스로 가게 된다.[21]
- 이미 여러 번 언급된 듯 1970년 5월 13일 런던 페스티벌 홀에서의 연주는 말그대로 센세이셔널한 성공이었다. 연주가 끝나고 당시 지휘를 맡았던 프레빈은 그 자리에서 다음 협연을 제안했고, 유럽에서 완전히 무명이던 그녀에게 순식간에 런던 심포니와의 영국 순회 공연을 비롯한 이후 18개월동안의 공연 계약이 쏟아져 들어왔다. 다음 날 파이낸셜 타임즈는 원래 자선 콘서트[22]에는 리뷰를 달지 않는 관례를 깨고 이례적인 기사를 통해 하이페츠의 차이콥스키도 이보다 정확한 적이 있었나. 오이스트라흐나 아이작 스턴도 근래에 이런 연주는 들려주지 못했다란 극찬을 보낸다.
- 데카에서 첫 녹음 제의는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의 녹음 세션이 취소된 걸 매꾸는 것으로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고. 당시 모국에서 연주회 중이던 정경화는 급하게 런던으로 향하며 알래스카 기착지 공항에서 혼자 연습을 해야했다고 한다.[23]
- 정경화의 데뷔 음반은 한국의 첫 라이선스 음반으로 기록되어 있다.
- 스타로 뜬 이후에도 악기값을 갚아나가느라 한동안 드레스 몇 벌을 돌려입거나 남들 시선을 피해 값싼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했다고 한다. 바이올린을 비롯한 현악기들은 특히 가격이 엄청나기로 유명한데, 때문에 젊은 연주가는 후원자나 각종 단체의 지원을 받아 악기를 마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가난한 한국 출신이던 정경화의 경우는 그런 것 없이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 정경화는 3개의 악기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데뷔 때부터 쓴 1693년 산 스트라디바리우스 '해리슨', 1974년 무렵부터 쓴 1735년 산 과르네리 'ex-쿠벨릭', 1985년 무렵부터 쓴 1734년 산 과르네리 'ex-로데'. 현재도 두 과르네리를 소유하고 있으며, 주로 'ex-로데'로 연주한다고. 첫 스트라디바리우스는 데뷔 전 부모님이 한국에 남아 있던 집을 팔아 마련해 줬다고 알려져 있다. 디자인 상 평균 바이올린보다 약간 긴 패턴으로, 손이 작은 정경화에게는 적합하지 않았지만 크고 화려한 음색이 무대 위의 존재감을 알리기 좋겠다고 판단해 선택한 것이라고. 하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원하는 음색을 전부 표현할 수 없다는 느낌을 받고 스승 갈라미안의 추천을 받아 바이올리니스트 얀 쿠벨릭이 쓰던 과르네리를 구했고, 이 때문에 상술한 대로 금전적인 고생을 했다고. 두 번째 과르네리는 첫 스트라디바리우스를 팔아 구한 것이다. 한편 새 바흐 무반주 녹음 발표회에서 최근 1702년 산 스트라디바리우스 '킹 맥스'를 구해 향후 바흐 순회 연주에서 사용할 것이라 밝혔다. 주로 사용하는 'ex-로데'보다 좀 더 작고 반응이 빨라 바흐 곡의 디테일을 살리는 데 더 적합하다고 언급했다. 더 최근인 2018년 6월 현재 쿠벨릭으로 연주한다고 알려졌다. 검지 상태가 호전되었기 때문이라고 #
- 1972년 월톤 협주곡 녹음 시 작곡가 윌리엄 월톤이 직접 스튜디오를 방문해 정경화를 격려했고 이 때 찍은 사진이 그대로 LP 초판 커버로 쓰였다. 그 자리에서 정경화가 3악장을 왜 그리 어렵게 작곡[24] 했냐고 묻자, 월톤은 "그 빌어먹을 하이페츠 때문이지"라고 답했다고. 참고로 월톤의 협주곡은 하이페츠를 위해 쓰여진 곡. 이후 월톤이 프로듀서 월터 레그에게 쓴 편지에는 '그 일본인(...) 바이올리니스트가 하이페츠나 지노 프란체스카티 만큼 연주를 잘 하더라'는 언급이 보인다. 10년 뒤 월톤의 팔순 기념 갈라에서 동 곡을 연주한 것도 정경화였다.
- 강한 성격의 대찬 연주가로서 지휘자들과의 충돌에 얽힌 얘기들이 전설처럼 떠도는데, 그 중 출처가 확인된 예로 게오르그 솔티와의[25] 일화가 있다. 런던 바비칸 센터의 예술감독이었던 존 투사가 파이넨셜 타임지에 언급한 것에 따르면, 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아 결국 리허설 중에 'bastard dictator! (빌어먹을 독재자)', 'Korean bitch! (한국 잡년)'이라고 주고 받았다고. 물론 두 사람이 이후 같이 음반 작업도 하고 협연 무대도 자주 갖은 걸 보아, 결국엔 무난히 화해를 한 듯. 참고로 솔티가 데카 레이블과의 장기 전속 기간 중 지휘자로서 함께 녹음한 바이올리니스트는 정경화가 사실상 유일하다 (경력 초기에 피아니스트로 쿨렌캄프와 녹음한 소나타 녹음과 말년의 미샤 엘만과 녹음한 베토벤 협주곡을 제외하고).
-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완벽주의자로 유명해서, 연주가 맘에 안 들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고 한다 (인터뷰에서 본인이 직접 한 표현). 근래에 테스타먼트 레이블로 출시된 줄리니와의 차이콥스키 협주곡 공연 당시에도, 줄리니의 느린 템포에 맞춘 연주가 맘에 안 들어 무대 뒤에서 머리를 마구 쥐어뜯었고... 그걸 본 줄리니가 '아니, 젊은 아가씨, 무슨 일이야?'라고 물었다고...
- 최근 인터뷰에서 1980년을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해로 언급했다. 아버지와 스승 갈라미언이 모두 돌아가신 것. 그 때문인지 그 해 런던 데뷔 이후 처음 안식년을 가졌는데, 소속사에 들이닥쳐 일년 동안 쉬겠다고 선언했더니 담당자가 너무 놀라 의자에서 떨어질 정도였다고 (어떤 상황인지 잘 이해가 안 간다면, 스케줄이 꽉찬 탑 스타급 아이돌 가수가 어느날 소속사에 일 년 휴식을 요구한 것과 비슷한 경우다. 당시 정경화는 데카 음반사가 '원하는 어떤 곡이든 녹음할 수 있다'는 조건을 내줄 정도의 스타 연주가였다.). 결국 6개월의 휴식을 갖는 것으로 합의를 보는데, 97년 인터뷰에서는 이 때를 두고 '100킬로로 달리다 급브레이크를 밟은 것과 같았다'고 표현하며, '아직도 그 때의 충격이 다 가시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일견 화려해 보이지만 어릴 때부터 오직 음악 하나만을 보고 가야하는 클래식 음악가의 삶, 세계 무대를 떠돌며 호텔 방을 전전하는 스타 연주가의 정신적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 1973년 데일리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레퍼토리는 '바로크에서 베르크까지'라고 못박으며, '요즘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소음이 존재하고, 현대 음악은 자연스레 그런 세태를 반영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런 음악을 연주하다 어떻게 다시 모차르트의 순수한 선율을 연주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고 있다. 이후에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는지, 몇몇 현대 작품 초연을 의뢰받기도 했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26]
- 녹음을 준비하고, 실행해 출반하는 모든 과정이 더디고 까다로운 음악가로 알려져 있다. 97년 인터뷰에서 그 이유로 자신에겐 음반이 개인적인 고백이요 영혼의 탐구이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상당수의 음반이 녹음에서 발매 결정까지 몇 년씩 걸린 경우가 많고, 녹음까지 다 마치고 끝내 발매를 안 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27]
- 1998년 일본 오사카에서 가진 리사이틀에서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를 연주하던 중 지진이 났다. 서 있던 자리에서 한 걸음 주춤할 정도로 진동이 있었지만, 정경화는 한 번 미소를 지었을 뿐 연주는 흔들림 없이 흘러갔다고... ~
오오오!~
- 꽤 여러가지 건강상의 문제를 겪었던 듯. 둘째 출산 후의 가벼운 왼손 마비, 1989년에는 교통사고로 일시적인 기억상실이 올 정도였다고 하고, 2000년 무렵에는 B형 간염으로 고생했으며, 2005년의 왼손 부상, 그리고 복귀 무대였던 2010년 브람스 협주곡 공연 전에도 급성 납중독으로 컨디션이 악화된 상태에서 강행한 것이었다고. 이런 사실들이 알려진 건 비교적 최근으로 '정경화도 끝났다'란 소리가 듣기 싫어 언론에는 물론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한다. 다만 1990년대 후반 이후 인터뷰에서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연주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란 언급이 종종 보인다.
- 2018년 5월 신동아와의 인터뷰 #
- 설화수 CF를 찍은 적이 있다.
6. 디스코그라피 및 연주 레퍼토리
레코딩 년도를 기준으로 정렬.차이콥스키/시벨리우스 협주곡 - 런던 심포니/ 앙드레 프레빈 (데카 1970년)
브루흐 협주곡 1번/ 스코티쉬 환상곡 - 로열 필하모니/ 루돌프 켐페 (데카 1972년)
월톤/ 스트라빈스키 협주곡 - 런던 심포니/ 앙드레 프레빈 (데카 1972년) *네덜란드 에디슨 상 수상
차이콥스키 협주곡 (베를린 실황) - 베를린 필하모니/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테스타먼트 1973년)
바흐 파르티타 2번/ 소나타 3번 (데카 1974년)
생상스 협주곡 3번/ 비외탕 협주곡 5번 - 런던 심포니/ 로렌스 포스터 (데카 1974/75년)
프로코피예프 협주곡 1번/ 2번 - 런던 심포니/ 앙드레 프레빈 (데카 1975년)
바르톡 협주곡 2번 - 런던 필하모니/ 게오르그 솔티 (데카 1976년)
엘가 협주곡 - 런던 필하모니/ 게오르그 솔티 (데카 1977년)
드뷔시/ 프랑크 소나타 - 라두 루프, 피아노 (데카 1977년) * 펭귄 가이드 '로제트 (최고 등급)' 선정
생상스/라벨/쇼송 쇼피스 모음 - 로열 필하모니/ 샤를 뒤트와 (데카 1977년)
시벨리우스/차이콥스키 협주곡 (파리 샹젤리제 극장 실황) - 프랑스 방송 관현악단/ 프랑스 국립 극장 오케스트라/ 즈데넥 마칼/ 샤를르 뒤트와 (스펙트럼 사운드 1973/78년)
베토벤 협주곡 - 빈 필하모니/ 키릴 콘드라신 (데카 1979년)
바흐 트리오 소나타 - 제임스 골웨이, 플룻/ 필립 몰, 합쉬코드/ 모레이 웰쉬, 콘티누오 (RCA 1979년)
생상스 협주곡 1번/ 랄로 스페인 교향곡 - 몬트리올 심포니/ 샤를 뒤트와 (데카 1980년)
차이콥스키/ 멘델스존 협주곡 - 몬트리올 심포니/ 샤를 뒤트와 (데카 1981년)
바르톡 협주곡 1번/ 베르크 협주곡 - 시카고 심포니/ 게오르그 솔티 (데카 1983년) *독일 비평가협회 상
콘 아모레 소품집 - 필립 몰, 피아노 (데카 1985년)
슈트라우스/ 레스피기 소나타 -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피아노 (DG 1988년) *그라모폰 상 실내악 부문 수상
드보르작 협주곡/ 로망스 -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리카르도 무티 (EMI 1988년)
베토벤 협주곡/ 브루흐 협주곡 1번 - 콘서트헤보우/ 런던 필하모니/ 클라우스 텐슈테트 (EMI 1989,90년) *일본 레코드 아카데미 상 수상
바르톡 협주곡 2번/ 랩소디 1번 & 2번 - 버밍햄 시티 오케스트라/ 사이먼 래틀 (EMI 1990/92년) * 그라모폰 상 협주곡 부문 수상
브람스 소나타 전곡 - 피터 프랭클, 피아노 (EMI 1995년) * 디아파종 황금상 수상
베토벤 삼중 협주곡/ 로망스 1번 & 2번 - 정 트리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DG 1996년)
수비니어 소품집 - 이타마르 골란, 피아노 (EMI 1998년)
도쿄 리사이틀 실황 - 이타마르 골란, 피아노 (King International 1998년) 슈만 소나타 2번/ 바르톡 소나타 2번/ 스트라빈스키 듀오 콘체르탄테/ 슈베르트 판타지, 소나타 4번/ 바흐 파르티타 2번, G선상의 아리아 등 수록
비발디 사계 - 성 루크 합주단 (EMI 2000년)
브람스 협주곡 - 빈 필하모니/ 사이먼 래틀 (EMI 2000년)
바흐 무반주 파르티타와 소나타 전곡 (워너 2016년)[28]
보 스와 - 프랑스 작품집 - 케빈 케너, 피아노 (워너 2017년) 포레 소나타 1번/ 프랑크 소나타/ 드뷔시 소품 등 수록
이하 피아노 트리오 녹음 목록
멘델스존/ 슈만 트리오 1번 - 앙드레 프레빈, 피아노/ 폴 토르틀리에, 첼로 (EMI 1978년)
드보르작 트리오 1 & 3번 - 정 트리오 (데카 1986년)
멘델스존/ 브람스 트리오 1번 - 정 트리오 (데카 1987년)
차이콥스키 트리오/ 쇼스타코비치 트리오 1번 - 정 트리오 (EMI 1988년)
베토벤 트리오 1, 4, 5, 7번 - 정 트리오 (EMI 1991/92년)
정식 출시된 영상물
멘델스존 협주곡 - 시카고 심포니/ 게오르그 솔티 (데카 1980년)
월톤 협주곡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앙드레 프레빈 (아트하우스 무직 1982년)
베토벤 협주곡 - 콘서트헤보우/ 클라우스 텐슈테트 (EMI 1989년)
2015년에 유니버설과, (EMI를 인수한 )워너 클래식이 각각 박스 세트를 내놓으면서 데카와 도이치그라모폰, EMI에서 출시한 음반들은 모두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녹음은 주로 낭만파 협주곡을 중심으로 했지만, 실제 공연 목록을 살피면 그 밖에도 거의 모든 중요 바이올린 레퍼토리를 아우른다. 바흐 협주곡과 무반주 소나타, 베토벤 소나타 같은 굵직한 작품들과 함께 브람스, 슈만, 생상스, 그리그, 프랑크의 소나타들을 즐겨 연주했고 1990년대 후반부터는 슈베르트와 모차르트 소나타들도 자주 연주했다. 그 밖에도 바르톡, 프로코피예프 쇤베르크, 베베른, 바버, 에네스쿠, 메시앙, 스트라빈스키 같은 20세기 작곡가 작품의 연주도 라이브 무대에서 호평을 얻었다. 다만 전형적인 바이올린 쇼피스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 듯, 사라사테나 파가니니 같은 작곡가의 작품은 거의 연주한 기록이 없는 편이다.
유명한 정 트리오 활동 이외에도 각종 실내악 연주도 간혹 했으며, 80년대 초반과 90년대 중반에는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지휘/독주를 겸하는 연주회도 종종 선보였다.[29]
[1] 흔히 정트리오로 알려져 있어 이들이 3남매인 걸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로는 7남매(4남 3녀)이다. 남매의 돌림자가 '명'인데 정경화만 돌림자를 쓰지 않았다. 그 중 딸 셋과 아들 하나가 음악을 했고 정트리오 3인만 음악인으로서 명성을 얻었다. 플루티스트인 장녀 정명소는 덜 알려진 편.[2] # #[3] 2014년 안산 연주회에서의 '내 영혼 바람되어' 앙코르. 후반부의 표현력이 매우 두드러진다. 사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이 곡의 연주가 화제가 된 것은 이 곡은 김효근이 2008년 작곡한 곡으로, 잘 알려져 있듯 정경화는 자신의 레파토리를 '바로크에서 베르크까지'로 못박고 있기 때문이다. 정경화가 소위 뉴에이지 풍의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격이었다. 이 곡은 다름 아닌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연주되었다. 어찌 보면 예술가로서 '위로'라는 예술의 목적에 가장 정직하게 도달한 셈이다.[4] 정경화 이전에 동양인 연주가가 스타급으로 성장한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 피아니스트 우치다 미츠코, 첼리스트 요요마 등도 모두 비슷한 시기, 혹은 약간 이후에 국제 무대서 성공을 거둔 경우). 1980년 영국 BBC가 정경화를 주인공으로 다룬 1시간 짜리 다큐멘터리는 'East plays West (동양이 서양을 연주하다)'란 제목을 달고 있었고, 90년대 까지도 종종 서구 언론 인터뷰에서 동양인으로 서양 음악을 다루는 게 어떤 의미인지 질문을 받는 것을 보면, 편견이 얼마나 오랫 동안 지속된 것인지 엿볼 수 있다.[5] 전 서울대 교수. 첼리스트 양성원, 바이올리니스트 양성식 형제의 아버지. 2016년에 양 교수의 미수(米壽)를 기념하기 위해 두 아들이 준비한 음악회에 정경화가 깜짝 출연해 바흐를 연주하는 것으로 옛 스승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2021년,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6] 줄리어드에서가 아니라 갈라미언이 설립한 메도우마운트 스쿨의 여름 코스 중 수업을 들었다고. 2017년 그라모폰 지와의 대담에서 과거의 연주가 중 가장 큰 영감을 준 인물로 마카노비츠키를 뽑기도 했다. 참고로 마카노비치키는 갈라미언의 최초의 제자 중 한 명으로, 신동으로 큰 주목을 받았으나 독주자의 라이프 스타일에 염증을 느껴 제자 육성으로 방향을 틀었다.[7] 종종 이 공연을 유럽 데뷔라고 잘못 언급하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 유럽 무대 첫 공연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브루흐 협주곡을 연주한 것이였다고 한다.[8] 순 바르톡 작품으로만 이루어진 이 콘서트에 대해 정경화는 훗날 인터뷰에서 '내 커리어 상 가장 중요한 연주회'였다고 자평했다[9] 지휘자이자 작곡가로 현대 음악계에 거목인 불레즈 답게 런던 심포니와 런던, 파리, 빈, 뉴욕, 도쿄를 순회 연주하는 것으로 칠순 잔치를 거하게 치렀다. 이때 초대된 빵빵한 독주자 명단이 다니엘 바렌보임, 로스트로포비치, 제시 노만, 마우리치오 폴리니, 안네 소피 무터 그리고 정경화다. 바르톡 협주곡 2번을 협주한 파리 샹젤리제 극장 공연은 8번의 커튼콜을 받는 대성공을 거뒀다.[10] 복귀 후 인터뷰에서, 부상 후 근 5년간 아예 연주를 전혀 못할 정도였다고 밝혔다. 그래서 연습을 머리 속으로만 했는데, 이게 오히려 곡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져다 준 측면도 있었다고.[11] 거의 십 년 동안 국제무대에서 자취를 감췄던 정경화의 컴백에 쏟아진 미디어의 관심은 굉장해서, 공연을 앞두고 뉴욕 타임즈와 중요 음악지 거의 모두에 인터뷰 기사가 실렸고 현악 전문지 'The Strad'엔 표지 모델로 등장했으며 BBC 라디오에만도 두 번이나 출연했다. 공연 자체도 매진 사례[12] 카네기홀 연주는 뉴욕 타임즈가 뽑는 '8 Best Classical Music Moments'의 하나로 선정 되기도 했다. 카네기홀의 130년 역사에서 바흐 무반주 전곡을 연주한 유일한 바이올리니스트라고...[13] 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다른 바이올리니스트의 면모를 보면 프리츠 크라이슬러, 야샤 하이페츠, 나탄 밀스타인, 아르투르 그뤼미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이작 펄만, 기돈 크레머, 안네 조피-무터가 있다. 말 그대로 20세기 바이올린계의 A급 리스트.[14] 정경화의 이런 강점에 대해 지휘자 사이먼 래틀은 97년 인터뷰에서 '(예를들어) 제가 오케스트라 첼로 파트에 변화를 주면, 정경화는 이를 놓치지 않고 반응을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녀와의 공연은 서커스 쇼가 아닌 진정한 협연이라 할 수 있지요'라고 언급했다.[15] 예를 들자면 다들 잘 아는 쇼팽 콩쿠르 우승자 조성진, 3위 입상자인 임동혁, 임동민, 반 클라이번 콩쿨 우승자 임윤찬, 프레미오 파가니니 우승자 양인모 등.[16] 이때의 압박감이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1980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최연소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뒤 '(레벤트리트 때의) 옛 기억이 떠올라 힘들었다'며 이후 다른 콩쿠르의 심사위원 초청은 모두 거절했다.[17] 사전적으로는 도자기 인형이라는 뜻이지만, 중의적으로 중국을 의도하고 쓴 것이 맞다.[18] 정경화, 강동석과 함께 7,80년대 '한국의 3대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불리던 대가다. 갈라미안을 사사했고,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도이치그라모폰에서 녹음을 했다. 모짜르트를 비롯한 고전음악에서 특히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독주자의 라이프스타일이 별로 맘에 차지 않았는지, 중년 이후에는 제자 육성과 실내악에 더 치중했다. 요요마/엠마누엘 엑스와 엑스-마-김 트리오로 활동했으며 보자르 트리오 일원으로도 잠시 활동했었다. 2003년 이후 서울대 교수로 재직 중.[19] 사실 갈라미안이 하이페츠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요원한 일이었다. 하지만 하이페츠를 너무나 동경한 나머지 비밀리에 찾아간 것이라고 한다.[20] 2017년 그라모폰 지와의 대담에서 하이페츠에게 오디션 받던 날의 일화가 더 자세하게 소개되었다. 하이페츠가 지각하는 걸 끔찍이도 싫어한다는 지인들의 조언에 따라 5분 일찍 도착해 문을 두드렸더니, 문틈으로 얼굴만 빼꼼 내민 하이페츠가 '5분 뒤에 와' 한 마디만 하고 문을 잠궜다고. 오디션 후에도 연주회 금지 뿐 아니라 피아노와 다른 악기까지 배울 것을 요구하는 등 이래저래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 때문에 포기했다고 한다.[21] 갈라미안은 시게티에게 배우는 것은 적극 찬성이었다고 한다.[22] 영국 ORT(유대인 교육 지원을 위한 국제 민간 기구)를 위한 자선 콘서트였다[23] 닉슨 대통령과 찍은 사진을 공항 관계자에게 보여주면서 사정하니까 관계자가 연습할 방을 내어주었다고 한다.[24] 정경화는 협주곡이 너무 어려워서 진땀 빼면서 했다고 한다.[25] 솔티의 별명은 '소리지르는 해골(screaming skull)'일 정도로 한 성격하는 지휘자로 악명 높았다.[26] 예외가 될 뻔한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다. 재독 작곡가 윤이상의 협주곡을 세계 초연할 계획이었지만, 평안도 실향민 출신인 아버지가 윤이상과 북한의 관계를 이유로 강력히 반대하여 포기했다고 전해진다. 또 런던 데뷔 때부터 알고 지내던 폴란드 출신의 작곡가/파아니스트 안드레 차이콥스키와 새 작품을 준비하여 83년 이탈리아 투어 중에 초연할 계획을 잡기도 했었다. 그러나 82년에 작곡가가 암으로 급서하면서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았다. 정경화 자신은 97년 인터뷰에서 '대단한 작품이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27] 정확한 실체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떠도는 얘기에 따르면 켐페/ 뮌헨 필과 협연한 브루흐 스코티쉬 환상곡, 리카르도 샤이와 협연한 드보르작 협주곡, 스티븐 코바세비치와의 베토벤 소나타 일부, 필립 몰과의 두 번째 소품집, 이타마 골란과의 슈베르트 작품집 등이 녹음까지 마치고 정경화의 반대로 세상의 빛을 못보고 묻힌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고...[28] 출시 1년 반 만에 한국내 '플래티넘' 앨범에 등극했다. 디지털 음원과 앨범 판매를 통산해 1억 4천 만원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29] 녹음으로 남은 비발디 '사계'가 그 흔적. 2005년 스코티쉬 챔버와 바흐 협주곡 녹음도 계획에 있었지만 손가락 부상으로 취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