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30 15:44:28

안드레스 세고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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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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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두번째 발표(2013년)때 헌액된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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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스 세고비아
Andrés Segovia
파일:Andres_Segovia_in_het_Concertgebouw,_Bestanddeelnr_914-4770.jpg
본명 안드레스 세고비아 토레스
Andrés Segovia Torres
출생 1893년 2월 21일
스페인 왕정복고 하엔 주 리나레스
사망 1987년 6월 2일 (향년 94세)
스페인 마드리드
직업 기타리스트
장르 클래식
활동 1909년 ~ 1987년
링크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1. 개요2. 생애3. 인간관계4. 연주 스타일5. 편곡
5.1. 편곡 목록
6. 기타

[clearfix]
카스텔누오보-테데스코의 '악마의 기상곡', Op.85
그의 연주는 기타 소리로는 극히 이상적이며, 클래식 기타의 20세기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소리이다.
존 윌리엄스
그의 영향력이 컸던 이유는 그가 유일한 세계적 기타 거장이라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가 하는 일을 옳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줄리안 브림

1. 개요

스페인 출신의 기타리스트. 현대 기타음악의 전성기를 열었고 '기타의 신'이라고 부를 정도로 클래식 기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고전-낭만의 기타 황금기를 지나고 근대 이전의 기타는 당시 음악계의 주류에 어울리지 못하고 살롱 음악의 한계에 갇혀 있었다. 세고비아의 놀라운 성공은 모든 세상이 클래식 기타라는 악기를 새롭게 인식하게된 계기가 되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장 필리프 라모, 클로드 드뷔시 등 작곡가들의 음악을 편곡해서 기타곡을 늘리는 데에도 힘썼고 수많은 현대의 음악가들에게 클래식 기타에 의해 연주되는 음악을 작곡하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나일론 현의 보급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일생동안 클래식 기타에서 4가지 목표를 이루려고 노력했다 "첫째, 민속 음악 아닌 고전 음악을 위한 악기로서의 기타 위치 정립, 두 번째는 이 문명이 있는 모든 세계에서 기타가 콘서트 무대에 있을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 세 번째는 클래식 기타를 위한 아주 좋은 레퍼토리를 만드는 것, 그리고 넷째, 기타를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음악원과 음악 아카데미 설립 하는 것"이었고 세고비아는 이 4가지를 모두 이루어냈다.

그가 현세의 클래식 '기타계'를 혼자 힘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세기 중반 이후의 모든 클래식 기타리스트들은 모두 크거나 작게 세고비아의 영향을 받았다. 세고비아를 따라하거나 혹은 세고비아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함으로서 클래식 기타는 놀라운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그의 일생동안의 음악과 행위을 찬양하거나 혹은 일부를 비난할 수는 있으나 그의 공로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2. 생애

세고비아는 스페인 남부 라나레스(Linares)에서 태어났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2살 때부터 부모의 손에 양육되지 못했고 백부의 손에서 자랐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름이 이름이라 스페인 현지 사람들도 종종 헷갈리는데 사실 로마 수도교로 유명한 카스티야의 역사 도시 세고비아하곤 하등 상관 없다.

세고비아의 자서전들과 수많은 연구 논문을 포함한 저서를 통해 그의 일생의 다양한 면모가 알려져 있으나 뚜렷한 스승이 없는 상태에서 마에스트로의 경지에 이르게된 기타 학습 과정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진 정보가 없다.그의 시작은 4살때 백부가 노래부르며 기타를 연주하는 것을 보고 기타 흉내를 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백부는 플라멩코 음악을 좋아해서 집으로 떠돌이 플라멩코 기타리스트를 초빙한 적이 있었는데 세고비아는 불과 한 달만에 그의 모든 연주곡을 익혔다고 한다. 기타에 대한 세고비아의 놀라운 학습 능력에 대해 그의 백부는 이렇게 평했다. "이 애는 배우는 것 같지 않고 기억하는 것 같아." 그 떠돌이 플라멩코 기타리스트는 이전 시대 가장 위대한 플라멩코 기타리스트로 추앙받았던 파코 데 루세나(Paco de Lucena 파일:유튜브 아이콘.svg|파일:위키백과 아이콘.svg)의 제자 아구스티니요(Agustinillo)였고 세고비아는 불과 5살의 나이에 그로부터 파코 루세나의 기타를 물려받았다.[1] 6세에 바이올린 레슨을 받았는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이내 그만두었다.

훗날 클래식 기타리스트로서 민속음악인 플라멩코 기타와 각별히 선을 긋고 멀리하였지만 그의 유년기에는 플라멩코 기타리스트들의 영향을 확실히 받고 자랐다. 그라나다의 골목에서 어린 시절부터 세고비아는 라스게아도와 팔세타(Falseta, 플라멩코 연주 방식, 즉흥적 악구 연주 또는 노래) 주법으로 기타를 연주했다.

그의 부모는 그에게 술집에서나 연주하는 품격이 떨어지는 악기를 배우는 것을 반대했고 즉시 그를 첼로와 피아노 레슨에 보냈으나 세고비아는 기타를 배우는 데 계속 노력했다. 그의 삼촌과 숙모는 세고비아가 정식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그라나다로 이사했고, 세고비아는 10살 때부터 그라나다 음악원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2 년 후 그는 타레가 전주곡을 연주하던 플라멩코 기타리스트 가브리엘 루이즈 데 알마도브라(Gabriel Ruiz de Almadóvar)의 연주를 통해 클래식 기타 음악을 처음으로 경험하고 그라나다에 머무르며 본인의 심금을 울린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영감에 몰두했다.

기타에 몰두한지 불과 몇년 만에 16살(또는 14세)에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첫 연주회를 열었고,"갑자기 기타의 사도가 되기로 결정"하고 그라나다 음악학교를 중퇴, 콘서트 기타리스트로서 경력을 만드는 일에 집중했다. 20살에 마드리드 아테네오 극장(Ateneo de Madrid 파일:위키백과 아이콘.svg)에서 프로 연주자로 데뷔했다. 당시 연주 프로그램은 프란시스코 타레가와 세고비아 자신이 편곡한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이 주를 이루었는데, 당시 음악가들과 청중들은 기타를 서민들이나 연주하는 악기라고 여겨서, 기타로는 클래식 음악을 연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고비아는 기타에 대한 이런 생각을 깨뜨려 버린다.

세고비아는 말년의 프란시스코 타레가와 만날 기회는 없었으나 그에게서 배울 기회는 있었다. 젊은 세고비아의 연주가로서 명성을 듣고 타레가가 세고비아를 제자로 삼겠다고 했으나, 타레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이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세고비아는 독학으로 음악을 완성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는 일생동안 타레가의 제자들을 포함하여 기타 음악을 위해 배울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쫒아다녔고 또 그들을 일생의 경쟁자로 여겼다. 타레가의 제자들 또한 세고비아를 잠재적인 경쟁자로 여겼으며 일부를 제외하고는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1918년에 남미 순회 연주회, 1924년에는 유럽 파리에서 데뷔하며 기타 음악의 진수를 유럽에 선보이며 세고비아의 이름과 기타라는 악기를 동시에 알렸다. 35세가 되던 1928년에는 미국 뉴욕으로 연주여행을 갔다. 뉴욕에서 세고비아는 자신의 테크닉과 음악성으로 대중을 압도했고, 클래식 기타에 부정적이던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놓게 된다. 미국에서의 성공에 힘입어 전 유럽에서 많은 연주회를 열었고, 1929년에는 아시아로까지 연주여행을 하게 된다. 동시대의 내로라하는 호아킨 로드리고, 에이토르 빌라로부스, 마리오 카스텔누오보-테데스코, 마누엘 폰세(Manuel María Ponce Cuéllar 파일:유튜브 아이콘.svg|파일:디스코그스 아이콘.svg|파일:위키백과 아이콘.svg) 등의 작곡가들도 세고비아의 기타연주에 매료되어 그에게 많은 작품을 헌정했다. 스페인 내전이 일어난 1936년 이후에는 프랑코 정권에 반대하여 미국에 건너가 활약하였다.

1981년 6월 24일 세고비아는 에스파냐 왕국 후안 카를로스 1세로부터 살로브레냐 후작 작위를 받게 됨으로써 명성에 정점을 찍게 된다.

그는 일생동안 끊임없이 기타를 배우고 연습했고 무대에 혼자 걷기 힘들었던 고령의 나이에도 연주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87년 4월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 연주회를 가졌고 불과 몇 개월 후인 1987년 6월 2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심장마비로 향년 94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세고비아의 첫 아내는 1918년 결혼한 아델라이다 포르티요(Adelaida Portillo), 두 번째 아내는 1935년에 결혼하여 1948년에 이혼한 피아니스트 파퀴타 마드리게라(Paquita Madriguera 파일:위키백과 아이콘.svg)다. 세고비아는 1944년부터 브라질 가수 겸 기타리스트 Olga Praguer Coelho와 관계를 유지하다 1962년 에밀리아 막달레나 코랄 산초(Emilia Magdalena Corral Sancho)와 결혼했다.

자녀로 카를로스 안드레스 세고비아(Carlos Andrés Segovia 파일:위키백과 아이콘.svg), 베아트리즈 세고비아 마드리게라(Beatriz Segovia Madriguera), 레오나르도 세고비아 포르티요(Leonardo Segovia portillo), 안드레스 세고비아 포르티요(Andrés Segovia Portillo)를 두었다.

3. 인간관계

동시대 남미에서 활동하던 기타리스트인 어거스틴 바리오스 망고레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며 그를 경원시해서 평생 남들 앞에서 그의 곡을 연주한 적이 없다는 말이 있다. 한편으로는 질투했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모조리 추측에 불과하며 팩트는 망고레와 만난 적이 있고, 공연장에서 망고레의 곡을 연주한 기록은 있으나 음반은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자존 윌리엄스와는 애증의 관계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에는 '기타의 왕자'라는 식으로 극찬했지만 클래식 기타를 품격 있는 악기로 만들려고 했던 세고비아와 대중적인 악기로 만들려고 했던 윌리엄스의 의견이 서로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4. 연주 스타일

덩치가 크고 손도 크고 두툼해서 클래식 기타를 아기를 안듯이 하고 연주했는데 이런 자세는 그의 신체에나 적합한 것이었음에도 우리나라의 매니아들이 무분별하게 그의 자세를 따라했으며 그 강력한 손가락으로 앰프가 없어도 공연장 내의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쩌렁쩌렁한 소리를 낼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세고비아의 실황 연주를 여럿 찾아볼 수 있는데 70이 되어서도 여전한 모습을 보여주며 죽기 몇 년 전까지 무대에서 연주했다. 노익장의 좋은 예시. 기력이 워낙 넘치는 사람이었다고. 수십장의 음반을 발행했고 노년에는 2편의 자신을 소재로하는 다큐멘터리 영화에 출연해서 직접 연주했다. 젊은 시절의 연주는 드물게 영상으로 남아있는데 노년의 음악적으로 무르익은 연주와는 다른 젊고 활력이 넘치는 연주를 들을 수 있다.

5. 편곡

읽어보자.

그의 바흐 작품 편곡 중에서는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2번 샤콘느가 가장 유명한데, 거장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파리에서 그 연주를 듣고 "이 곡은 바이올린의 특징을 잘 표현한 곡이지만 기타연주로 들으면 더 강한 정감을 느낀다."라고 한 게 유명하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발언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5.1. 편곡 목록

  • 헨리 퍼셀
    • Z. 667 Prelude from Suite in D major
    • Z. 570 Rondo from Abdelazer or the moor's revenge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BWV 996, 류트 모음곡 마단조의 지그
    • BWV 997, 류트 모음곡 다단조의 사라방드와 지그
    • BWV 999, 전주곡 다단조
    • BWV 1000, 푸가 사단조 [2]
    • BWV 1004, 파르티타 2번의 샤콘느
    • BWV 1006, 파르티타 3번의 가보트
    • BWV 1007,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의 전주곡
    • BWV 1009, 무반주 첼로 모음곡 3번의 루르
  • 펠릭스 멘델스존
    • 현악 4중주 1번 E플랫 장조 Op.12, II. Canzonetta
    • 무언가 Op.19-6
    • 무언가 Op. 30-3

6. 기타

  • 그의 저서로는 1893~1920년의 자서전(An Autobiography of the Years 1893~1920)(1976), 세고비아 기타 교본(Andres Segovia, My Book of the Guitar)(1979)이 있다.
  • 세고비아 스케일이라는 24개의 장단조 스케일 연습곡이 있다.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 페르난도 소르의 연습곡들을 세고비아가 20개로 엄선하기도 했다.
  • 영화감독 테런스 맬릭의 동생 래리가 세고비아를 사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손 부상으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자살했다.
  • 알베르트 어거스틴과 협업하여 나일론 기타줄을 발명하였다. 알베르트 어거스틴이 세운 기타줄 제조사 어거스틴후원을 받았으며 어거스틴 클래식 로우 텐션 블랙을 사용했다.
  • 또한 생전에 곡들 또한 여럿 썼는데 대표적으로 Estudio sin luz와 oracion, Remembranza 등이 있으며 세고비아 본인, 존 윌리엄스, 엘리엇 피스크, 데이비드 러셀 등이 녹음했다.
  • 대한민국의 어쿠스틱 기타 제조업체인 세고비아는 이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 하우저, 라미레스가 만든 기타를 사용했다.

[1] 그는 자신의 기타 여정의 시작이 된 루세나에 대해서 특별한 애착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2년에는 마누엘 데 파야(Manuel de Falla 파일:유튜브 아이콘.svg|파일:위키백과 아이콘.svg)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Garcia Lorca 파일:위키백과 아이콘.svg)와 함께, 큰 규모의 칸토 혼도(canto jondo; 심오한 노래) 페스티발을 열었고 그 자리에서 플라멩코 음악을 연주했다. 1977년에는 루세나의 ‘즉흥시’의 일부를 편곡해서 발표했다. 그는 현대의 라스게아도와 퍼쿠션 주법을 중심으로 하는 플라멩코 음악과 과거 세대의 '진지한' 플라멩코 음악을 구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 타레가도 편곡했다고 알려져 있다.[3] 타레가도 편곡했다고 알려져 있다.[4] 페르귄트 모음곡의 그리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