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0 13:00:31

세르주 첼리비다케

그라모폰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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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첫 발표(2012년)때 헌액된 인물들이다.
☆는 두번째 발표(2013년)때 헌액된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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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w.euroarts.com/6036.jpg
제오르제 에네스쿠의 루마니아 랩소디(Rapsodia română). 차우셰스쿠 정권 당시인 1978년 부쿠레슈티에서 지휘한 영상이 남아있다.



1. 개요2. 생애3. 음반 녹음을 꺼린 지휘자4. 연주 성향5. 여담
5.1. 타 지휘자에 대한 독설5.2. 작곡가 첼리비다케

1. 개요

세르지우 첼리비다케(Sergiu Celibidache, 1912년 7월 11일[1] ~ 1996년 8월 14일). 루마니아 태생의 지휘자. 지금은 작고한 유명 지휘자 중 하나이다. 그가 한번 맡은 오케스트라는 매너리즘에서 벗어나게 되기 때문에 "청소부"라는 별명도 있다고 한다.

2. 생애

루마니아에서 그의 본래 성은 첼레비다치(Celebidachi)였으나 베를린 음악 아카데미 시절 첼리비다케(Celibidache)로 잘못 표기되었고 그것이 굳어졌다.

그의 젊은 시절은 잘 알려져 않지만, 의외로 30대 중반에야 학업을 마칠 정도로 경력이 매우 늦었다. 그는 루마니아의 군 장교 출신으로 정치적으로 어느정도 입신한 데모스테네 첼레비다치(Demostene Celebidachi)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지역 총독을 지낼 정도로 나름 정계 거물이었기 때문에 매우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것으로 보인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루마니아에서 정치가로 성공하기 원해 그를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로 유학을 보낸 후 파리로 유학을 보냈다. 그러나 첼리비다케는 그의 나이 24세 때인 1936년 뒤늦게 베를린 음악 아카데미에 등록해서 작곡과 지휘를 공부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 대학원에도 등록하여 지휘와 철학을 공부했고 1944년 그의 나이 만32세 때 졸업했다. 졸업 이후에도 베를린 필을 지휘하기 이전까지는 아마추어 합창 지휘자로 일하는 등 임시직이나 알바로 일한 것 이외에는 정식 커리어가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데뷔하였기에 1929년 울름 가극장의 카펠마이스터가 된 카라얀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것처럼 인식되지만 의외로 카라얀과 나이 차이는 4살에 불과하다.

그렇게 34세가 될 때까지 학생이자 반백수로 지내오던 첼리비다케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베를린 필을 지휘하면서 지휘자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정말 운이 좋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더불어 독일에 남아서 활동했던 지휘자들[2]은 줄줄이 연합국에 의해 연주활동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베를린 필 단원들은 오케스트라를 재건하여 연주활동을 이어가고자 했지만 지휘할 사람이 없었다. 베를린 필은 지휘자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여 해외에 있던 발터, 셀, 라이너 등에게 간절히 도움을 청했지만 모두에게 거절당하고 말았다.[3] 결국 베를린 필은 당시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던 레오 보르하르트라는 어중간한 지휘자가 러시아 태생이며 좌파이기 때문에 소련 군정에 마음에 들것이라는 계산하에 그를 영입하였다. 예상대로 모국어가 러시아어인 보르하르트는 소련군 군정의 환심을 샀다. 소련 군정은 보르하르트를 적극 지지했고, 베를린 필은 운영에 큰 숨통이 트이게 되었다. 당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베를린 필은 거의 매일 같이 이곳저곳에서 닥치는 대로 연주회를 소화했다. 그러나 불과 석달만에 보르하르트가 연합군의 오인 사격으로 사망하면서 또다시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 베를린 필 단원 중 한 사람이 첼리비다케라는 젊은 합창지휘자를 추천했다. 첼리비다케는 아마추어 합창단 이외에는 지휘 경력이 전무했지만 베를린 필은 당장 그날 저녁 연주회들을 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어쨌거나 첼리비다케에게 베를린 필을 지휘할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다.영상 보기

전임자 보르하르트가 지휘 실력과 무관하게 러시아 출신의 좌파 성향의 인물이라는 배경으로 소련군 군정에 의해 지휘자가 된 것과 달리 똑같은 무명이긴 했지만 어찌되었건 음악적 자질을 가지고 있던 젊은 첼리비다케는 베를린 청중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고, 베를린 필 단원들에게도 인정받았다. 이후 1947년 5월 푸르트벵글러가 복귀할 때까지 베를린 필을 사실상 이끌게 되었다.

1947년 5월 마침내 푸르트벵글러가 베를린 필에 복귀했지만 푸르트벵글러는 건강 문제와 작곡 때문에 베를린 필과 많은 연주회를 가지지는 못했기 때문에 첼리비다케는 한동안 여전히 베를린 필을 자주 지휘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오이겐 요훔, 칼 뵘 등 다른 유명 지휘자들도 속속 연주 금지가 풀리며 베를린 필에 복귀했고, 페렌크 프리차이, 게오르그 솔티 등 다른 신예 지휘자들고 베를린 필에 데뷔하며 좋은 반응을 얻었으며, 또 미국에 자리잡은 조지 셀, 브루노 발터 등도 다시 날아와 베를린 필의 객원지휘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여러 지휘자들이 다시 베를린 필을 지휘하면서 베를린 필에서 첼리바다케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점차 줄어들었다.무엇보다도 첼리비다케는 단원들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고 걸핏하면 베를린 필 단원들의 실력이 형편없어서 전부 물갈이 해야한다고 비난했기 때문에 베를린 필과 관계가 악화되었다. 푸르트벵글러도 젊은 사람(첼리비다케)이 너무 기술적 정확성에만 집착하여 베를린 필을 미국 오케스트라처럼 만들고 있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종전 직후 첼리비다케는 연간 수십회씩 베를린 필을 지휘했으나 푸르트벵글러 복귀 이후 점차 연주회 횟수가 줄어들어 1954년에는 단 네 번만 지휘했을 뿐이었다. 첼리비다케는 베를린 필이 자신과 계속 연주를 하고 싶으면 단원들을 싹 다 물갈이해야 한다고 공언하는 등 악단과 불화는 깊어졌다. 마침내 1954년말 리허설에서 단원들에게 폭언을 퍼붓고 지휘대를 떠나버렸고 이것으로 첼리비다케와 베를린 필의 관계는 잠정적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 사건이 벌어진 직후 갑자기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게 되었다. 불과 두달 후에 미국 순회 공연이라는 큰 행사를 앞두고 있던 베를린 필은 당장 새로 상임지휘자를 뽑아야 했고 선택된 이는 카라얀이었다. 이후 첼리비다케는 몇십 년 동안 베를린 필을 지휘하러 온 일이 없었고, 만년인 1992년이 되어서야 한 차례 지휘하였다. 베를린필이 카라얀을 선택한 이유가 첼리비다케보다는 카라얀이 더 상업성이 뛰어나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는 설이 도는데 사실은 첼리비다케 개인의 성격적인 문제가 컸다고 볼 수 있다. 독불장군 그 자체로 걸핏하면 리허설 현장을 전쟁터로 만들어버리는 첼리비다케의 성격을 베를린필 단원들이 참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로 굳혀지고 있다.

이후 유럽 여러 곳에서 객원 지휘자 생활을 했다. 특히 이탈리아, 스페인 등 자신과 언어적 유사성이 높은 라틴어권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4] 1950년대 초부터 60년대 중반까지 그는 주로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다. 이 시절 팔레르모, 볼로냐, 토리노, 베네치아, 로마, 밀라노 등 각지에서 이탈리아 방송국 소속 교향악단(RAI)들을 활발히 지휘했고 그 영상과 음원들이 많이 남아 있다. 또 밀라노 라스칼라와 로마 산타 체칠리아에서도 객원 지휘자로 등장했다. 1956년 새로 창단된 볼로냐 시립 극장(Teatro Comunale di Bologna) 오케스트라의 초대 음악 감독이 되었다. 1960년대초에는 팔레르모의 시칠리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역임했다. 첼리비다케의 자택이 시칠리아 Lipari에 있었다. 1960년에는 시에나 음악원(Accademia Musicale Chigiana)에 입학해 1962년에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1963년까지 다녔다. 또 1960년대 초에는 스페인 방송 교향악단(RTVE)에도 종종 객원 지휘자로 출연하여 여기서 지휘한 영상과 음원들이 많이 남아 있다.

한동안 좀처럼 이탈리아, 스페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나 1960년대초 코펜하겐 교회에서 봉직하게 되면서 북유럽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1965년 스웨덴 방송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1965–1971). 이후 이탈리아에는 거의 발길을 끊었고[5] 스페인 객원 지휘도 크게 줄였다.

1971년 슈투트가르트 방송 교향악단에 취임했다(1971–1977). 이를 계기로 서독으로 활동 영역이 옮겨지게 되었다. 또 프랑스 방송국(Radio France) 소속의 프랑스 국립 관현악단의 상임지휘자를 역임(1973-1975)했으나 1년여만에 사임하고 말았다.

1970년대말에는 상임지휘자 교체기에 있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객원지휘자로 초빙되기도 했다.

1979년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이처럼 첼리비다케가 뮌헨 필을 맡기 전에 거의 방송 교향악단들과 일했다는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고, 덕분에 음반 녹음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녹음이 현존하고 있다. 뮌헨 필 역시 바이에른 방송국(BR)이 모든 연주를 녹음하고 있기 때문에 이점에서 방송 교향악단과 별차이가 없었다.

1996년 프랑스 파리 교외 자택에서 사망했다.

3. 음반 녹음을 꺼린 지휘자

첼리비다케는 예술의 순수성을 매우 추구하여 음반 녹음을 꺼리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사실 처음부터 음반 녹음을 꺼린 것은 아니었다. 데뷔 초인 1940년대 후반에는 꽤 열심히 음반을 녹음했는데, 소련의 베를린 봉쇄 위기로 전운이 감돌고 있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비행기를 몇번 갈아타고 얼마전까지 적성국가였던 영국 런던까지 건너가 DECCA에서 음반 녹음에 임할 만큼 열성을 보였다. 베를린필을 지휘한 이 시기의 녹음들은 의외로 양이 많아서 박스 음반으로 발매되어 있다. 그러나 어느시점부터 녹음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녹음을 혐오한다는 발언과는 모순되게도 뮌헨 필을 맡기 전까지 커리어는 거의 전부 방송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였다. 때문에 그의 연주의 상당수가 방송용 녹음으로 남아있다. 뮌헨 필 역시 공연녹음에 열심이었던 바이에른 방송국 산하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과 같은 홀에 상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공연이 실황으로 녹음되었다. 사실 그가 만년에 녹음을 전혀 안한 것도 아니다. 1990년 일본 도쿄 산토리홀에서 지휘한 브루크너 교향곡 6번, 7번, 8번 영상물이 그의 허가 아래 소니에서 공식 발매되었는데, 당시 첨단 매체였던 LD로 발매되어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아무튼 그는 극도로 녹음을 혐오하게 되면서[6] 자신의 사후 음반을 내지 말아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첼리비다케의 아들의 주도로 기록용으로 녹음해 놓은 음원을 음반화하였다. 당시 첼리비다케 음원 판권을 두고 메이저 음반사들의 입찰전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결국 입찰전에서 승리한 EMI에서 엄청난 양의 음반이 쏟아져 나왔다. 유력한 경쟁자였지만 입찰에서 탈락한 DG는 첼리비다케가 뮌헨 필 이전에 맡았던 슈투트가르트 방송 교향악단, 스웨덴 방송 교향악단 등의 음원을 음반화시켰다. 그리고 음반시장이 침체된 2000년대 후반, 염가 박스반까지 나오면서 아주 사골을 우려내고 있다.

4. 연주 성향

무진장 느리게 지휘하는 걸로 유명하다. "느려야 곡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나온다"는 철학이 있었다고 한다.[7] 선불교의 종교철학을 자신의 음악에 그대로 도입한 첼리비다케는 긴 호흡으로 한음 한음 연주하며 클래이맥스에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높은 산을 힘겹게 오를수록 정상에서의 카타르시스가 극대화되듯 그의 연주 역시 절정부에서는 무아지경의 희열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느리게 연주하는 것이 그가 심취했던 일본 선불교의 영향일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렇게 단정 짓기는 힘든 것이 첼리비다케가 선불교에 심취하기 시작한 것은 20대 때부터였는데, 젊은 시절에 그는 격정적인 제스처로 꽤나 바른 템포로 지휘하는 다혈질의 지휘자였기 때문이다.

첼리비다케가 젊은 나이부터 느린 템포를 추구한 것은 아니다. 베를린 필을 지휘하던 젊은 시절의 연주는 대부분 평균적인 템포 범위 안에 있었고, 제법 빠른 템포의 연주도 많았다. 이후 나이를 먹음과 비례하여 템포가 느려졌다. 대충 60대 이후부터 그런 경향이 두드러 졌으나 70대에 들어서는 80년대 중반 이후에서 사망직전까지 특히 더 그러하다.[8][9] 같은 곡이라 하더라도 60 ~ 70년대 라디오 심포니를 지휘할 때의 연주보다 80년대 뮌헨 필의 연주가 더욱 느리고, 뮌헨 필 시기도 임기초에서 임기말로 갈수록 비례하여 템포가 더욱 느려진다.[10] 다만 아주 유심히 살펴보면 비슷한 시기의 연주인 경우에는 뮌헨 안방에서 연주한 것보다 해외 순회공연에서 연주한 것이 공통적으로 약간씩 더 빠르다.

혈통적으로는 독일과 무관한 루마니아와 슬라브 혈통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첼리비다케는 자신을 항상 '독일의 지휘자'라고 강조했다. 이는 음악적 스타일에서 독일적이라는 의미였다. 그는 독일적 울림, 비브라토 등은 미국 등 다른 나라의 오케스트라가 흉내낼 수 없는 것이라 말했다.

기존의 곡을 혁명적으로 재해석하기로 유명하다. 위에 서술된 <청소부>라는 별명도 이때문. 그래서 그런지 지휘나 음악에서 호불호가 엄청나게 갈리고, 보통 클래식 입문자들에게는 추천하지 않는 지휘자이기도 하다.

안톤 브루크너[11][12]에 정통한 연주자로 잘 알려져 있는데 종교적인 브루크너의 교향곡들과 첼리비다케의 음악 철학은 환상적인 마리아주를 들려준다. 애청자라면 반드시 들어봐야 할 음반들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브루크너 지휘자 중 한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브람스, 슈만 등의 연주에도 뛰어난 집중력을 보여주지만, 베토벤에 있어서는 특유의 느린 템포로 인해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

공연 중 ""하는 기합 소리를 자주 넣는다. 또 가끔 지휘봉으로 보면대 등을 계속 치면서 박자를 맞추기도 한다. 이 소리가 음악에 대한 몰입을 방해한다는 의견이 있다.

5. 여담

심한 여성혐오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유별난 성격(독설과 독선)과 더불어 치명적인 단점으로 보인다. # 1980년 미국 출신의 여성 트롬본 연주자 에비 코넌트(Abbie Conant)는 뮌헨 필의 블라인드 오디션에서 합격했고, 이후 여성인 사실이 밝혀져 심사위원들이 경악했다고 한다. 가장 극렬한 반대를 한 이가 바로 첼리비다케. 여성 단원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 첼리비다케는 이후 블라인드 오디션을 없애버렸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녀를 괴롭혔다. 수석 주자로 뽑힌 코넌트에게 실력을 이유로 세컨드 자리를 줬고, 대화를 위해 자신을 찾은 코넌트에게 "그냥 남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80년대 시대상을 반영하더라도 첼리비다케의 주장은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녀가 법적인 행동을 고민하자 첼리비다케에 호의적이던 뮌헨 시는 외국인 허가 취소를 언급하며 코넌트를 협박했다.[13] 1982년 코넌트는 소송을 진행하였고, 자신이 남자보다 부족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신체검사까지 벌였다. 그러나 그 시각 첼리비다케가 코넌트 때문에 뮌헨 필을 떠날 것이고 그러면 단원들의 연봉이 삭감될 것이라는 악성 루머까지 돌았다. 첼리비다케는 재판정에 출석해 코넌트가 트롬본 주자에 부적합하다고 증언하였지만 재판은 코넌트의 승리로 끝났다.

그럼에도 첼리비다케는 코넌트에게 솔로 자리를 주지 않았고 남성 연주자 보조로 두었다. 심지어 낮은 급여를 줬고 이에 코넌트는 두 번째 소송을 시작했다. 90년대까지 이어진 소송은 슈피겔지를 통해 보도되며 큰 스캔들로 비화됐다. 뮌헨 시 당국은 첼리비다케를 변호했다. 그동안 첼리비다케는 계속 뮌헨 필을 떠나겠다고 압박했으며 실제로 한 시즌 지휘를 맡지 않아 극장 수입이 폭락했다. 12년의 소송 끝에 1993년 코넌트가 최종심에서 승리했고, 수석지위를 맡을 것과 그동안 미지급된 보수에 대해서도 지급명령을 받았다. 코넌트를 괴롭혔던 뮌헨 시 담당자는 교체되었고 뮌헨 필 위원회 임원들도 재선에 실패했다. 코넌트는 1993년 3월 최종심에서 승리한지 얼마 후 트로싱엔 음악원(Trossingen Musikhochschule)으로 이직했다.

번스타인이 떠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그랬듯이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첼리비다케의 사후 내리막길을 타기 시작했다. 첼리비다케가 오기 전에 뮌헨 필이 아주 훌륭한 오케스트라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시원찮은 오케스트라도 아니었고, 첼리비다케 이후에 인지도 있는 지휘자들이 연이어 재임하고 있다. 첼리비다케 시절이 전성기였음은 분명하지만 이후 내리막을 탔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치 못한 평가다.

지휘자에 대해 "모든 지휘자는 음악을 즐겁게 만드는 위장한 독재자다"고 평하기도 했다.

원래 흑발의 심한 곱슬이었다. 그러나 흰머리가 나면서 차츰 직모로 바뀌었다. 1970년대 초 아직 검은 머리와 흰머리가 공존하던 시절도 꽤 곱슬이었는데, 70년대 말 완전히 백발로 바뀌면서 직모 헤어스타일로 완전히 바뀌었다.

5.1. 타 지휘자에 대한 독설

특유의 독선적 성격으로 다른 지휘자들을 비난한 것으로도 꽤 유명하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전혀 음악을 만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음표도. 순전히 음표 공장에 불과하다.
칼 뵘: 마치 감자푸대가 지휘하는 것과 같다.[14] 그는 평생 음악을 한 마디도 지휘해 본 적이 없다.[15]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끔찍하다.[16] 그는 재능있는 사업가이거나 아니면 청각장애인이다. 카라얀이 유명한 것은 코카콜라가 유명한 것과 같은 이치다.
게오르그 솔티: 뛰어난 피아니스트지만, 지휘자로서 그저그런 귀를 지녔으며, 테크닉도 형편없다.
라파엘 쿠벨릭: 큰 음악가이지만, 작은 지휘자다.[17][18]
레너드 번스타인: 그는 내 지휘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자다.[19]
카를로스 클라이버: 그는 음악이란 무엇인지 한 번도 체험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로린 마젤: 칸트를 논하는 두 살 짜리 어린애
클라우디오 아바도: 고통스럽다(고문이다).[20] 전혀 재능이 없는 자. 화가 난다. 나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3주를 버틸수 있지만 그가 지휘한 음악을 들으면 3시간 안에 심장마비가 일어날 것이라고 장담한다.
리카르도 무티: 비범한 재능을 지녔다. 하지만 토스카니니만큼이나 무지하다.[21]

첼리비다케의 독설에 대응하여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슈피겔지에 첼리비다케를 비꼬는 을 투고한 것은 유명하다. 클라이버는 이미 죽어 천국에 가 있을 토스카니니의 이름을 빌어 첼리비다케를 비난했는데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 브루크너 등이 하나같이 첼리비다케의 연주템포가 틀렸다고 지적했으며, 유명한 선불교의 권위자도 첼리비다케가 선불교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꼬집은 것.[22]

나중에 여행차 일본에 갔던 클라이버와 공연차 뮌헨 필을 이끌고 일본에 갔던 첼리비다케가 같은 루프트한자 비행기[23] 일등석에 앉았으나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일화도 유명하다.

5.2. 작곡가 첼리비다케


작곡가로서도 4곡의 교향곡과 피아노 협주곡, 레퀴엠 등을 작곡하는 등 나름 활발한 활동을 했지만, 현재까지 녹음, 출판된 곡은 UNICEF 자선 기금 모금을 위해 슈투트가르트 남서독일 방송 교향악단과 1979년 5~9월 녹음한 후 1980년 음반으로 낸[24] 어린이를 위한 13부[25] 구성의 오케스트라 모음곡 '주머니 속의 정원(Der Taschengarten)' 1곡뿐이다. 이 곡은 1978년경 작곡되었고, 사망 10주기인 2006년 8월 14일 뮌헨에서 공개 연주된 바가 있다. 4곡, 10~12곡이 뛰어나다. 다만 곡의 타겟을 잘못 잡은 듯한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첼리비다케가 쓴 해설 첫 발매된 LP 음반


[1] 그레고리력이 아닌 첼리비다케가 태어났을 당시 루마니아에서 통용되던 옛 율리우스력으로 따지면 1912년 6월 28일이 된다.[2] 푸르트벵글러, 카라얀, 뵘 등.[3] 당시 베를린 필이 제시한 개런티는 미국 오케스트라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었다.[4]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루마니아어는 라틴어에서 갈라져 나오면서 각각의 언어가 분화된 기간이 짧기 때문에 유사성이 매우 높아서 서로 어느정도 소통이 가능하다. 보통 못알아듣는 부분은 주로 근대 이후 만들어진 새로운 전문 용어들이다. 프랑스어의 경우 가장 이질적이라고 하는데 발음이 특이하게 변해서 그렇다. 그래서 프랑스어는 차라리 글로 보면 대부분 이해한다고 한다.[5] 1967년까지 예정된 스케줄을 소화했다.[6] 녹음을 싫어하게 된 계기는 선불교의 영향이 컸다는 것이 중론이다. 선불교의 空에 심취하면서 음악은 단 한번 일회성으로 사라지는 것이 옳다는 철학이 세워졌고, 거기에 완벽주의적인 첼리비다케의 성격이 실연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음반을 혐오하게 되었다는 것이 이유라고[7] 연주영상 감상 시 관악기 주자들과 성악가들의 고통이 보는것만으로 느껴질 정도.[8] 첼리비다케가 70대가 되자 늙어서 몸이 예전처럼 못따라 주어서 그렇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60년대까지만 해도 첼리비다케는 지휘를 매우 열정적으로 하였는데 나이가 들어 지휘하는 영상을 보면 앉아서 지휘를 하는것이 열정적이지 못하다.[9] 하지만 꼭 그렇다고 볼수만은 없는게 카라얀은 자신이 70대에 들어서 몸이 불편할 때도 템포는 젊을 때처럼 유지되었다.[10] 예를 들어 그가 40대 후반에 연주한 베토벤 합창 교향곡이 68분에 끝나는 반면 뮌헨 필에서 연주한 것은 80분에 가까운 길이를 자랑한다.[11] 첼리비다케는 그를 "브루크너의 존재는 나에게 신이 내린 가장 큰 선물이다"고 찬양했다.[12] 참고로 브루크너의 교향곡 3번, 4번, 8번의 음반을 세계 최초로 녹음한 엘리아후 인발이 1960~1962년 첼리비다케로부터 지휘를 사사한 인물이었다.[13] 당시 3류 취급받던 뮌헨 필을 세계최고의 오케스트라로 만든 첼리비다케의 권력은 실로 막강하여 시 당국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를 본인의 의견 관철을 위해 악의적으로 이용한 것. 코넌트가 찾아간 독일여성인권사무국에서조차 자신들은 힘이 없으니 음악감독이 바뀔 때 까지 참고 기다리라고 권유했다고 한다.[14] 사족으로 그가 지휘할 때 구부정하게 서 있는 폼을 빗대어 낙타라고도 했다.[15] 영어 번역 원문: didn't conduct a single bar of music in his life. 혹은 has not conducted a single bar of music in his life. 혹은 Karl Böhm never conducted a note music . 혹은 He never led music in his life.[16] horrible[17] Ein großer Musiker, ein kleiner Dirigent.[18] 독일어 groß는 위대하다(great)는 뜻도 있지만, 단순히 물리적으로 크다(big)라는 의미도 있다. 쿠벨릭이 장신에다가 풍채가 크지만, 음악적으로는 작은 인물이라고 비꼰 것.[19] 하지만 나중에 그는 번스타인 사후에 자기가 봤던 지휘자 중에서 재능이 넘쳤다고 이야기했다.[20] Eine Qual.[21] Hat ungewöhnliches Talent, ist aber ein Ignorant wie Toscanini[22] 클라이버의 말이지만 이 투고글에 나오는 토스카니니(?)의 또 다른 말에 의하면 푸르트뱅글러는 그런 사람 모른다고 하고(...) 브루노 발터는 죽도록 웃어댔다면서 첼리비다케의 그런 다른 지휘자 평가를 조롱했다.[23] 클라이버가 자주 연주하던 바이에른 국립 관현악단과 뮌헨 필하모닉 모두 뮌헨에 기반한 악단들이다.[24] 그리고 이 녹음은 생전에 첼리비다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유일한 음반이다. 사후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첼리비다케 세트를 만들면서 재출반되었다.[25] 그 중 1부와 13부는 같은 곡으로 하여 수미상관을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