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7:23:20

클랜시 브라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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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경,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때의 클랜시 브라더스. 왼쪽부터 리엄, 패디, 토미, 톰.

멤버 생년월일 포지션 관련항목/키워드
패디 클랜시1922.3.7보컬, 하모니카1998.11.11 사망, 활동기간 1956~1974, 1977~1998
토머스 클랜시1924.10.29보컬1990.11.7 사망, 활동기간 1956~1974, 1977~1990
리엄 클랜시1935.9.2보컬, 기타2009.12.4 사망, 활동기간 1956~1974, 1990~1996
토미 메이컴1932.11.4.보컬, 밴조, 틴 휘슬2007.8.1 사망, 활동기간 1956~1969


이건 결성 당시 멤버들만 따진 것. 멤버 교체 이후까지 따지면 복잡하니 본문 참조.



1963년 <Dinner with President>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클랜시 브라더스. <Kelly the Boy from Killane>을 부르고 있다.


1. 개요2. 멤버3. 아이콘4. 데뷔 전 행적5. 데뷔와 성장, 전성기6. 안티의 등장7. 토미 메이컴 탈퇴 이후8. 토미 메이컴과 리엄 클랜시9. 재결성10. 리유니언 투어11. 1980년대 후반12. 잠깐의 부흥13. 흑역사, 그리고 그 이후14. 한국에서의 위상15. 음반

1. 개요

누가 뭐래도 아일랜드의 포크 음악계에서 단연 1위에 드는 전설적인 음악 그룹이다.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의 최종 보스. 아일랜드 포크 음악을 하나의 대중음악 장르로 자리잡게 한 1등공신이며, 대중음악계에서 활동한, 현대적 의미에서 최초의 아일랜드 포크 음악 그룹이기도 하다.

클랜시 브라더스가 아일랜드에서 받는 인기는 정말로 대단한데, 그것은 한국으로 따지자면 완전 한류 스타급이라 할 수 있기 때문. 아일랜드 그룹이지만 미국에서 조직되었고 미국에서 앨범을 내며 미국에서 활동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바야흐로 진정한 아일랜드 류(流)스타. 문자 그대로 완전 1960년대 그룹이다. 위에 나와 있듯 결성 당시 멤버들은 20년대, 30년대생으로 현재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 고려시대 그룹으로 취급하면 곤란하다! 엄연히 클랜시 브라더스나 그 멤버들의 앨범은 아일랜드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팔리고 있고, 컴필레이션이거나 미공개 음원을 공개하는 앨범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니까.[1] 한국에서는 더블리너스에 비하면 인지도는 낮은 편이나, 아일랜드 음악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제법 알려져 있는 듯. 네이버다음에서도 소수이긴 하지만 클랜시 브라더스 앨범을 서비스하고 있고, 최신 앨범이긴 하지만 한국 사이트에서도 앨범을 판다. 다만 이것은 레이블빨일 수도 있는데, 1961년부터 1970년까지 콜롬비아 레코드(현재의 소니뮤직)가 레이블이었다. 또한 이 기간이 클랜시 브라더스의 전성기이기도 했고, 아일랜드 포크 음악이 화려하게 발전한 시기이기도 했다.

2. 멤버

멤버들은 1922~1935년 사이에 티퍼레리 주의 캐릭-온-수어에서 태어난 로버트 클랜시(Robert Clancy)와 조안 맥그래스(Joan McGrath)의 네 아들들이 포함되므로, 그룹 이름도 클랜시 브라더스이다. 하지만 이렇게 4명만이 활동한 시기는 1969년부터 1971년까지 딱 2년간. 그 외에는 항상 깍두기 형제가 아닌 다른 멤버가 항상 있었다.
  • 1956~1969: 패디 클랜시, 톰 클랜시, 리엄 클랜시, 토미 메이컴
  • 1969~1971: 패디, 톰, 보비 클랜시(1927~2002), 리엄
  • 1971~1974: 패디, 톰, 리엄, 루이스 킬런(1934~)
  • 1977~1990: 패디, 톰, 보비, 로비 오코늘(1952~)
  • 1984~1985: 특별 이벤트로 1956~1969 멤버로 잠시 복귀.
  • 1990~1996: 패디, 보비, 리엄, 로비
  • 1996~1997: 패디, 보비, 핀바(1970~)
  • 1997~1998: 패디, 보비, 핀바, 에디 딜런
자세한 설명은 하단 참조.

3. 아이콘

클랜시 브라더스의 트레이드 마크는 흰 스웨터이다. 원래 뉴욕 날씨가 아일랜드 날씨보다 더 추운 관계로 클랜시 형제들의 어머니가 방한용으로 보내 준 것인데, 뒤에 메이컴 것도 보내 준 것. 그런데 이게 얼떨결에 클랜시 브라더스의 유니폼이 되어 버렸다. 이후 콜롬비아 레코드에서 나온 클랜시 브라더스 앨범 재킷 사진은 모두 흰 스웨터를 입고 찍은 것들이다.

4. 데뷔 전 행적

  • 패디 클랜시(1922~1998): 1922년 3월 7일, 티퍼레리 주 캐릭-온-수어 태생. 젊었을 때는 IRA에서 독립운동도 했고, 2차 대전에도 참전했다. 1947년 캐나다로 건너와 온갖 노가다 아르바이트 자리를 전전하다가 1951년 미국으로 건너와 영화배우가 되었다.
  • 토머스 클랜시(1924~1990): 1924년 10월 29일, 같은 곳 태생. 이하 행적은 패디 클랜시와 일치한다.
  • 리엄 클랜시(1935~2009): 1935년 9월 2일, 같은 곳 태생. 10대 후반에는 연예계에 조금씩 발을 들여놓았으나 본격적으로 데뷔는 하지 않았다. 1955년 로또 우연한 기회에 데뷔를 하게 되었는데, 미국에서 형 패디, 톰 클랜시와 알고 지내던, 아일랜드를 찾아온 포크송 수집가 다이앤 해밀턴의 눈에 띈 것. 얼떨결에 이렇게 본인은 물론, 어려서부터 절친이었던 토미 메이컴과 함께 포크송 수집 앨범을 통해 데뷔하게 된다. 듀엣을 부른 것은 아니고 리엄 클랜시와 토미 메이컴이 각자의 집에서 각자 몇 곡을 부른 것인데, 아무튼 이렇게 정말 얼떨결에 데뷔를 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956년 영화배우로 데뷔하려고 미국으로 건너와 먼저 미국으로 와 있던 두 형과 절친 토미 메이컴을 만나게 되었다.
  • 토미 메이컴(1932~2007): 1932년 11월 4일, 북아일랜드 아마 주 케디 태생. 8살 때부터 성당 성가대원이었다. 리엄 클랜시와 둘도 없는 절친. 1955년 역시 영화배우 활동을 하려고 미국으로 건너와서 인쇄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2톤짜리 인쇄 프레스에 손이 깔렸다. 산재 배상은 받았는지? 이런 상황에서 패디, 톰, 리엄을 만나게 되었는데...

5. 데뷔와 성장, 전성기

1956년 네 멤버들은 미국에서 만났다. 모두 공식 직업은 영화배우. 그러나 이미 패디 클랜시는 그 전 해부터 트래디션 레코드라는 음반 회사의 사장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다이앤 해밀턴이 수집한 곡들을 모은 앨범도 사실 트래디션 레코드에서 나왔다. 제목은 <The Lark in the Morning>. 1956년 이 네 멤버들은 <The Rising of the Moon>이라는, 아일랜드 포크 음악 가운데 레벨 송들을 14곡 뽑아 한데 모은 앨범을 발매하게 되는데, 사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재미로 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 이들은 모두 가수가 아닌 영화배우라 아직 공식적으로 그룹 이름도 없었고, 음원 자체의 질도 아주 조잡해서 패디 클랜시의 하모니카 말고는 어떠한 반주 악기도 없었다. 말이 그룹이지 사실상 솔로 가수 4명이었다. 몇몇 트랙에선 다 함께 곡을 불렀지만 그것조차도 박자가 서로 맞지 않는 등, 도무지 팔기 위한 앨범이라고는 할 수가 없었다. 그래 보여도 명실상부한 인디 레이블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영화배우였고 전문 가수가 아니었기 때문. 게다가 틴 휘슬과 드럼을 다룰 수 있는 토미 메이컴은 산업재해 사고로 인해 손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으니... 이렇게 네 멤버들의 앨범은 그냥 단순한 취미활동 정도로 끝날 분위기였다. 그리고 세 멤버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영화판으로 복귀하여 드라마, 영화에 출연하는 평범한 연기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 앨범이 의외로 엄청난 히트를 기록한 것이다. 당시 아일랜드인은 '하얀 흑인' 취급을 받으며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정말 엄청난 히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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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랜시 브라더스 첫 앨범. <The Rising of the Moon>

3년간 전혀 음악 활동 없이 연기에 집중하던 네 멤버들은 1959년에 본격적으로 앨범을 내기 위해서 다시 뭉쳤다. 물론 이것은 사실 일종의 도박이었는데, 6개월간 음악 활동을 해 보고 시원찮으면 영화판 복귀, 괜찮으면 음악판 데뷔를 하기로 한 것. 참고로 이 때 패디 클랜시는 37세, 톰 클랜시는 35세였다. 이들은 1956년에 나온 조잡하고 허접한 뭔가 부족한 듯한 앨범을 다시 내기로 했다. 곡은 같은 곡을 부르되 녹음을 다시 한 것. 이 앨범은 하모니카 반주뿐만 아니라 토미 메이컴의 틴 휘슬드럼 반주는 물론, 세션맨을 동원하긴 했지만 기타에 심지어 하프 반주까지 붙였다. 멤버들의 박자도 서로 잘 맞는 아주 괜찮은 앨범이 나온 것. 뿐만 아니라 새 앨범도 냈는데, 이번에는 드링킹 송들을 모아 앨범을 냈다. 역시 기타와 밴조는 세션맨을 동원했지만, 마지막 한 트랙에서는 리엄 클랜시가 기타를 쳤다. 참고로 이 앨범 표지에는 네 멤버들 뿐만 아니라 세션맨인 잭 키넌도 나오고, 리엄 클랜시는 이후 굳어진 귀요미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수염을 잔뜩 기르고 나와 못 알아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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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랜시 브라더스 두 번째 앨범. 맨 오른쪽이 리엄 클랜시이다.

이 두 앨범이 큰 성공을 거두자, 네 멤버들은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에 뛰어들게 된다. 그러니 사실상 클랜시 브라더스 데뷔는 1956년이 아닌 1959년인 셈. 아직까지 그룹 이름도 없었는데, 클랜시 브라더스란 이름도 이 때 나오게 된다. 1961년 3월, 클랜시 브라더스는 초대형 음반사인 콜롬비아 레코드와 5년 계약을 맺고, <A Spontaneous Performance Recording>이라는 콜롬비아 레코드 앨범을 내는데, 이 앨범이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다. 그래미 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흠좀무. 이때부터 클랜시 브라더스의 전성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 해에 클랜시 브라더스는 그룹 이름을 그대로 따서 <The Clancy Brothers and Tommy Makem>이라는 앨범을 자기네 레이블인 트래디션 레코드로 출판했는데, 레퍼토리는 앞서 나온 앨범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전자는 라이브, 후자는 스튜디오란 것이 다르다. 어쨌든 이 두 앨범이 모두 엄청난 히트를 올리면서, 본격적으로 클랜시 브라더스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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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미 상 후보에 오른 클랜시 브라더스 세 번째 앨범.

클랜시 브라더스는 1960년대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아일랜드 포크 음악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1964년 아일랜드에서 팔린 전체 음반의 3분의 1이 클랜시 브라더스 앨범이다! 1964년 패디 클랜시는 모은 돈으로 고향인 캐릭-온-수어에 농장까지 샀을 정도.


1967년 무렵, <Mountain Tay>를 부르고 있는 클랜시 브라더스.

6. 안티의 등장

한편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다더니, 아이돌도 아닌데 당시 아일랜드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안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는 그룹 성향이 아일랜드 광복을 부르짖는 노래를 많이 부르고, 멤버들 모두가 가톨릭을 믿는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64년 북아일랜드에 갔다가 친영파로 수구꼴통 극우 근본주의 먹사 목사인 이언 페이즐리(Ian Paisley, 1926~2014)라는, 문자 그대로 인간말종 북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들의 철천지 원수로부터 욕을 얻어먹은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멤버들 4명이 모두 완전 신실한 가톨릭 신자에, 메이컴은 북아일랜드 출신인데도 가톨릭을 믿고, 1집은 전 곡이 다 영국 개새끼 영국 제국의 핍박과 착취에 저항하는 레벨 송에다가, 레퍼토리에 레벨 송이 항상 빠지질 않으니 어디 가만 있었겠는가.

물론 이렇게 안티들이 어그로를 끌수록, 가톨릭을 믿으며 북아일랜드 독립을 지지하는 클랜시 브라더스 팬들은 더욱 열혈한 지지를 보냈다. 클랜시 브라더스가 아일랜드 광복을 주제로 한 노래를 통해 아일랜드인들의 반영 투쟁의식을 강하게 고취시켰기 때문. 특히 북아일랜드 출신인 토미 메이컴의 존재는 북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들에게 엄청난 호소력이 있었다. 때문에 이러한 안티들의 깽판 만행이 오히려 팬들의 지지에 기름을 부었고, 클랜시 브라더스는 문자 그대로 슈퍼스타로 도약했으니... 결과적으로 안티들만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버린 것. 망했어요.

7. 토미 메이컴 탈퇴 이후

토미 메이컴은 사실 싱어송라이터. 1966년도에 처음 토미 메이컴의 자작곡이 클랜시 브라더스 앨범에 수록되었다. 1968년에는 토미 메이컴의 곡들 가운데 가장 명곡인 <Four Green Fields>가 클랜시 브라더스 앨범에 수록되었는데,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앨범은 현재 절판되었지만, 컴필레이션 앨범에 수록된 이 트랙의 음원은 구입 가능하다. 심지어 국내 사이트에서도 팔고 있음.) 이러한 상황에서 1968년 토미 메이컴은 멤버들과 합의하여 1969년을 끝으로 탈퇴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다른 멤버들의 동의하에 1969년 토미 메이컴은 그룹을 탈퇴했다.
그러나 토미 메이컴은 멤버들 가운데 유일하게 2가지 악기를 다루고 있었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새로 들어온 멤버는 보험회사 사장(사실 이것이 가업이었다)으로 아마추어 가수였던(실제로 앨범을 내기도 했다) 셋째형 보비 클랜시. 문제는 다룰 줄 아는 악기가 기타하모니카로, 리엄과 패디와 겹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2명의 세션맨이 들어오게 되는데, 이미 2인조로 활동하고 있던, 기타를 치는 에디 퓨리(1944~)와 밴조, 틴 휘슬을 연주하는 핀바 퓨리(1946~) 형제. 핀바 퓨리가 일리언 파이프도 다루는 관계로, 이 라인업에서 나온 두 장의 앨범에서는 일리언 파이프 소리를 들을 수 있다.


1970년경, <Beer, Beer, Beer>를 부르고 있는 클랜시 브라더스.

그러나 이 두 세션맨은 1년 만에 그만두고, 1971년 보비 클랜시도 동생 리엄과 치고 받고 싸우다가 의견 충돌이 생긴 것으로 보이는 탈퇴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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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경의 클랜시 브라더스. 왼쪽부터 리엄, 보비, 톰, 패디이다. 가운데 물을 경계로 왼쪽은 30년대생, 오른쪽은 20년대생이다.

그리고 정말 의외의 인물이 멤버로 가입을 했는데, 잉글랜드 출신의 루이스 킬런(1934년생). 루이스 킬런으로 말할 것 같으면 초기 잉글랜드 포크 음악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슈퍼스타 가수이고, 최초로 콘서티나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들고 노래를 반주하는 데 사용하도록 시도하여 성공을 거둔 인물이다. (보통 콘서티나는 솔로로 연주를 하거나 다른 사람이 노래할 때 선율을 깔아 주는 역할을 하는 악기이다.) 다행히도 루이스 킬런은 밴조, 틴 휘슬은 물론 콘서티나와 스푼까지 다양한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관계로 클랜시 브라더스 음악에는 새로운 변화가 오게 된다. 사실 루이스 킬런은 이미 1960년대 말에 클랜시 브라더스의 세션맨(콘서티나)으로 앨범에 출연한 적이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 루이스 킬런 덕택에 클랜시 브라더스 앨범에서 콘서티나의 부드럽고 따뜻한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클랜시 브라더스는 1960년대 전성기 때만큼은 아니어도 나름대로 인기를 끌게 되는데...

그 와중에 폭탄이 터졌다. 1974년 그룹이 공중분해된 것.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멤버들이 각자 갈 길을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룹은 결국 공중분해되었고, 패디 클랜시는 목장 경영, 톰 클랜시는 연기, 리엄 클랜시와 루이스 킬런은 솔로 활동으로, 각자 길을 찾아 흩어지게 되었다.


1970년대 TV 출연 방송분. <Irish Rover>라는 곡을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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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경의 클랜시 브라더스. 맨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패디, 루이스, 리엄, 톰.

8. 토미 메이컴과 리엄 클랜시

아무튼 리엄 클랜시는 이렇게 솔로 활동에 뛰어들었고, 1965년에 이어 두 번째 솔로 앨범도 냈지만... 엄청난 빚 때문에 결국은 파산. 196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무렵에 비하면 정말 비참한 결과였다. 얼마나 돈이 없었는지 치즈 광고의 커머셜 송까지 불렀을 정도. 그런데 그게 또 앨범으로 나와서 리엄 클랜시 디스코그래피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흠좀무. 결국 리엄 클랜시는 달려드는 빚쟁이들이 귀찮았던지 법원파산을 신청하고 캐나다도망이사를 간다. 캐나다에 처월드처가가 있었기 때문. 그런데 하필이면 이 때 리엄의 절친인 토미 메이컴이 캐나다에서 솔로 가수로 아주 잘 나가고 있었다! 리엄은 토미와 손을 잡고 TV 프로에 듀엣으로 출연하게 된다. 이 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 모두 자기네가 아일랜드 포크 음악의 역사를 바꿀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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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 메이컴과 리엄 클랜시.

1975년 토미와 리엄은 마침내 풀 타임 듀엣을 결성하였고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유명 뮤지션인 아치 피셔가 PD 겸 세션맨으로 토미와 리엄의 동역자를 자처하고 나섰으니, 본격적으로 별다른 이름 없이 그냥 '토미 메이컴&리엄 클랜시' 라고 하는 두 사람의 듀엣 활동이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1976년 토미, 리엄, 아치 피셔가 함께 프로듀스한 토미&리엄의 첫 앨범이 나왔다. 그런데 이 앨범의 마지막 트랙, <And the Band Played Waltzing Matilda[2]>를 싱글로 발매한 것이 1977년도 아일랜드 음원 차트 1위를 찍었다. 흠좀무. 물론 이 곡은 호주 노래이지만 음원 차트 1위를 찍었다는 것에 대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토미와 리엄은 과거의 클랜시 브라더스 시절보다 훨씬 더한 엄청난 인기를 누리게 된다. 이번에는 클랜시 브라더스 시절과는 달리 대체로 아일랜드 본토에서 인기를 구가했으니 그 의미는 더욱 크다고 할 수 있겠다. 1978년 토미와 리엄이 발매한 앨범 <Two for the Early Dew>는 명실상부한 이 듀엣의 최대 히트 앨범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앨범에 실린 트랙 <Red is the Rose>와 <Morning Glory> 가 1979년도에 아일랜드 차트 3위와 7위를 기록한 것. 정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토미와 리엄 듀엣의 인기는 치솟았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빚쟁이들을 피해 파산 신청까지 했던 리엄 클랜시 입장에선 문자 그대로 대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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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 1위를 기록한 싱글.


1977년. <And the Band Played Waltzing Matilda>를 부르고 있는 리엄 클랜시. 장소는 아일랜드 더블린.


1983년. <Four Green Fields>를 부르고 있는 토미 메이컴과 리엄 클랜시. 장소는 아일랜드 더블린.

9. 재결성

1977년, 3년간의 개인 활동 끝에 패디 클랜시와 톰 클랜시는 클랜시 브라더스 재결성을 시도했다. 1971년 탈퇴한 보비 클랜시도 함께했다. 신기한 것은 보비 클랜시가 그 사이에 솔로 활동을 하면서 밴조에 바우란까지 다루기 시작한 것. 참고로 보비 클랜시는 다른 멤버들과 달리 본업이 보험사 사장인 아마추어이다. 흠좀무. 그리고 리엄 클랜시에게도 가입을 제안했지만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당시 리엄 클랜시는 절친인 토미 메이컴과의 듀엣 활동을 정말 제대로 즐기고 있었기 때문. 현아한테 원더걸스 다시 가입하겠냐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게다가 리엄 클랜시 스스로가 막내인 관계로 형들과 나이 차가 너무 많이 나서(패디 클랜시와 13살, 톰 클랜시와 11살), 아무리 형들이라지만 결코 메이컴만큼 편한 관계가 되지 못했을 듯. 서양에선 3살 차이면 형, 동생 이런 것 없고 그냥 친구다. 결국 리엄 대신, 기타와 만돌린을 치는 조카 로비 오코넬(1952~)이 가입을 하게 된다. 이 라인업은 어떻게 보면 최악의 라인업이고, 어떻게 보면 그나마 괜찮은 라인업인데, 판단은 각자 알아서 할 문제. 하지만 풀타임 그룹으로 복귀한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파트타임이었다. 보비 클랜시는 보험사, 톰 클랜시는 연기, 패디 클랜시는 목장 경영을 계속한 것. 때문에 이 라인업은 5년이나 지난 1982년에 와서야 앨범을 내게 되었다. 1973년 이래 9년만의 클랜시 브라더스 앨범인 것. 다행히 이 앨범은 그렇게까지 조잡하고 저급하진 않고, 나름 괜찮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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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1990년까지의 클랜시 브라더스 라인업. 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톰, 패디, 보비, 로비.

10. 리유니언 투어

한편 리엄과 토미 듀엣은 소녀시대도 아니고 싸이가 부럽지 않은 인기를 누리며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의 아이콘이 되었으니... 1984년, 이렇게 잘 나가던 이 듀엣의 매니저는 문득 뜬금없는 제안을 꺼낸다. 그것은 바로 클랜시 브라더스가 결성될 당시의 라인업으로 한 번 다시 뭉쳐 보자는 것. 이것을 리유니언 투어라고 한다. 1984년 4월, 15년 만에 패디, 톰, 리엄 클랜시와 토미 메이컴이 다시 뭉쳤다. 이들은 아일랜드 RTE 방송국의 최고 인기 토크쇼로, 한국으로 따지자면 세바퀴쯤 되는 <레이트 레이트 쇼>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을 시작으로 리유니언 투어에 들어가는데, 말이 투어지 사실상 1기 라인업으로 복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들은 <Reunion> 이라는 제목의 앨범을 내고, 아일랜드와 미국, 심지어 스코틀랜드까지 찾아다니며 투어를 했는데, 그 기간이 1985년 가을까지 거의 2년 동안이었으니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1984년 <The Holy Ground>를 부르고 있는 클랜시 브라더스. 장소는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11. 1980년대 후반

1986년 1월, 리엄과 토미는 다시 듀엣 활동을 시작했고, 클랜시 브라더스도 원래 라인업으로 복귀했다. 그런데 이 때부터 둘 다 망했어요. 물론 전자의 경우 1986년도에 앨범과 싱글도 많이 내고 여전한 인기를 끌었으니 망했다고 하긴 어렵지만, 1988년에 듀엣 활동을 마침내 끝내게 된 것. 물론 토미와 리엄 사이에 불화는 없었다. 단지 서로 솔로 활동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고 서로 합의 끝에 듀엣 활동을 중단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아일랜드 포크 음악 역사상 최고의 듀엣이 갈라지게 된 것은 하지만 아무래도 아쉬운 일.
그래도 이것은 클랜시 브라더스에 비하면 나은 일이다. 1988년 1월 클랜시 브라더스는 새 앨범을 냈는데, 레이블도 이전까지 앨범을 내던 Vanguard가 아닌, Folk Era라는 이상한 회사에서 냈고, 음원 자체의 품질도 보컬과 반주가 완전 따로 노는 정말 저급 그 자체인 앨범이었다. 멤버들 모두 이 앨범을 완전 쓰레기 취급을 한 것. 게다가 여기 실린 곡들은 상당수가 정말 마르고 닳도록 불러서 질릴 정도가 되어 버린 곡들이라 독창성도 없고, 그렇다고 예전에 나온 음원들보다 더 질이 좋냐 하면 그것도 아니어서 완전 엉망이고, 녹음 자체가 엉터리로 되어서 음원의 품질이 완전 개판 5분 전이었으니, 멤버들이 이 앨범에 만족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 게다가 이 앨범이 톰 클랜시가 녹음한 마지막 앨범이고, 클랜시 브라더스 최초의 오리지널 CD 음반이기도 하다. 흠좀무.

12. 잠깐의 부흥

1990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든다. 톰 클랜시가 위암으로 진단받은 것. 결국 톰 클랜시 대타로 리엄 클랜시가 들어온다. 1974년 이후 16년 만의 복귀인 셈. 사실 리엄 클랜시는 1988년부터 몇 차례 로비 오코넬 대타로 형들과 함께 공연한 적이 있다. 그러나 위암으로 투병 중인 형을 대신해 멤버로 들어온 것이었으니 부담이 엄청났을 터. 결국 톰 클랜시는 1990년 11월 7일, 위암으로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1991년 봄부터 클랜시 브라더스는 새 라인업으로 활동을 재개하게 되는데, 나름 부활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 방송에도 여러 차례 출연하고 'Irish Festival Cruises' 라는 행사에도 출연하며, 전성기 때만큼은 못해도 나름대로 인기를 끌고 다녔다. 귀요미 리엄 클랜시의 복귀 영향이 큰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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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의 클랜시 브라더스.


1992년 3월 17일. <The Wild Colonial Boy>를 부르고 있는 클랜시 브라더스.

1992년 12월에는 밥 딜런의 데뷔 30주년 기념 콘서트에도 출연하였다. 밥 딜런 노래인 <When the Ship Comes in>을 클랜시 브라더스가 부른 것. 밥 딜런은 리엄 클랜시의 절친이고, 클랜시 브라더스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 때는 멤버 4명뿐 아니라 솔로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던 토미 메이컴도 함께했다. 혹시라도 밥 딜런 30주년 기념 콘서트 라이브 앨범을 갖고 있다면 이 트랙을 틀어 보자. 한국에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클랜시 브라더스 트랙이다. 곡 소개하는 목소리가 리엄 클랜시 목소리다.


1992년 12월 16일. 밥 딜런 데뷔 3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공연하고 있는 클랜시 브라더스와 토미 메이컴.

근데 이 문제의 '아이리시 페스티벌 크루즈' 가 결국 클랜시 브라더스를 막장으로 몰고 가고야 말았다. 이게 망했으면 상관이 없는데 너무 대박을 터트린 것. 결국 멤버들 사이에 돈을 놓고 갈등이 벌어지게 된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라더니. (티모테오 1서 6장 10절)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1995년 가을 7년 만의 클랜시 브라더스 앨범이자, 무려 22년 만의 스튜디오 앨범인 <Older But No Wiser> 가 나오게 된다. 이 앨범은 아이리시 포크를 처음 듣는 사람도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는 것이 레퍼토리에 아이리시 포크보다 팝송이 더 많다. 트랙에는 밥 딜런(참고로 리엄 클랜시의 또 다른 절친임) 노래 2곡도 있고, 그 유명한 <Those were the Days>도 있으니, 아이리시 포크를 처음 듣는 사람에게 추천할 만한 앨범. 물론 스타일은 모두 아이리시 포크 스타일이다. 하지만 이 앨범은 결국 클랜시 브라더스의 마지막 앨범이 되고야 말았다. 1996년 초, 리엄 클랜시는 물론 로비 오코넬까지 함께 그룹을 탈퇴했기 때문이다.

13. 흑역사, 그리고 그 이후

리엄 클랜시와 로비 오코넬의 탈퇴는 이후 2년간 클랜시 브라더스의 짧은 역사를 완전한 흑역사로 만들었다. 탈퇴 직전 클랜시 브라더스는 '페어웰 투어' 를 미국과 아일랜드에서 한 차례씩 진행함으로써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았지만, 이후로도 남은 멤버 둘, 그러니까 패디와 보비 클랜시가 클랜시 브라더스의 명맥을 잇고자, 보비의 아들 핀바와 함께 3인조로 활동한 것. 물론 이름은 여전히 클랜시 브라더스이다. 그러나 패디 클랜시 말고는 오리지널 멤버가 없다는 데서 오는 이질감, 그리고 그룹의 익숙한 얼굴들이 사라진 데서 오는 공백감 등으로, 이 라인업은 클랜시 브라더스의 말년을 완전한 흑역사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1960년대를 풍미한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의 전설적인 아이콘에겐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말년. 1997년 초 아일랜드계 미국인 가수 에디 딜런이 가입하면서 다시 4인조로 복귀했지만, 이질감과 공백감으로 인해 더 이상 예전의 클랜시 브라더스가 아니었다. 사실 이걸 클랜시 브라더스라 부를 수 있는 것도 참 웃긴 것이 패디와 보비 두 명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백브라더스는 백인덕, 백호 둘이긴 하지만 이 라인업으로 나온 앨범은 단 1장도 없다. 앨범을 내면서 활발히 활동하지는 않고, 그냥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 그러니 여기에 대해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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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흑역사 라인업. 1996년 말쯤으로 보인다.

반면 그룹을 이렇게까지 만들어 놓고 탈퇴한 리엄 클랜시와 로비 오코늘은 과거 토미 메이컴&리엄 클랜시 듀엣의 부활을 꿈꾸고 야심차게 듀엣 활동을 시작했으나, 얼마 뒤 리엄의 막내아들 도널 클랜시(1975~)가 합류하면서 트리오로 전환한다. 이들은 리엄 클랜시의 개인 스튜디오에서 엄청나게 화려한 세션 팀을 꾸려 1997년, 1998년 두 장의 앨범을 셀프 프로듀스해 발행했는데, 레퍼토리도 참신하고 반주 악기도 다양해서 앨범 질 자체는 좋은 편이다.
한편 이 와중에, 1998년 패디 클랜시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도 죽음을 앞두고 리엄과 패디, 보비는 서로 화해했고, 마지막으로 셋이 함께 공연을 하기도 했다. 아일랜드 포크계의 레전드를 망쳐 놓은 흑역사는 어쩌려고 패디 클랜시의 죽음으로 클랜시 브라더스는 해체되었다. 리엄이 돌아온다면 모를까 보비 하나뿐인데 클랜시 브라더스란 말을 쓸 수는 없잖아? 그리고 보비 클랜시는 핀바, 에디 딜런과 함께, 3인조로 활동을 이어 나간다. 클랜시 브라더스의 마스코트인 흰 스웨터를 계속 유니폼으로 입었다. 이 트리오는 나름대로 선전했으니, 앨범도 몇 장 내고, 공연도 많이 다니고, 멤버들 개개인의 솔로 앨범도 내면서, 나름 성공적인 활동을 하긴 했으나, 아무래도 과거 클랜시 브라더스의 영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

한편 나름 양질의 앨범을 내며 활발하게 활동하던 리엄 클랜시, 로비 오코넬, 도널 클랜시 트리오는 1999년 뜻하지 않은 암초를 만난다. 세 사람의 거주지가 서로 갈라져서, 도무지 풀타임 그룹으로 활동할 수 없게 된 것. 클랜시 브라더스 자체를 말아먹는 병크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만든 야심작 트리오가 결국 이렇게 무너지고 말았다. 아마도 이것은 리엄 클랜시 인생에서 최대의 실패인 듯. 아무리 금전 문제가 시급하더라도 다 형들인데, 2년만 더 버티다가 패디 클랜시 사망에 맞춰 깔끔하게 해체시켰으면 이런 흑역사는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지나간 일이니 다 접어두자.
한편 보비 클랜시는 1999년부터 특발성 폐섬유증이라는, 폐가 섬유질화되어 결국 죽음에 이르는 무서운 병에 걸린다. 그래도 보비 클랜시는 지금부터 갈 데까지 가볼까 끝까지 음악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고 프로도 아닌 아마추어가 호흡 곤란으로 서서 공연하기 어려워지자 의자에 앉아 공연하며 2년을 더 버티다가, 2001년 말 정말 도무지 버틸 수 없는 지경이 되자 결국 은퇴를 선언하고, 그룹은 핀바와 에디 딜런의 듀엣으로 바뀌게 된다. 보비는 2002년 9월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1988년 이후 솔로로 계속 활동하며 나름 인기몰이를 하던 토미 메이컴은 1989, 1990, 1992, 1993, 1995, 1996, 1998년에 솔로 앨범을 발매를 했으며, 나이 따위는 그냥 무시한 채 2000년대에도 활발하게 공연을 다녔다. 메이컴은 2000년대 중반쯤 폐암 판정을 받았지만, 은퇴는커녕 오히려 더 포텐 터트리기에 돌입, 죽기 불과 몇 달 전까지도 라이브 공연을 강행했다. 흠좀무. 토미 메이컴은 2007년 8월,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토미 메이컴의 세 아들들은 1992년부터 메이컴 브라더스라는 트리오로 활동했는데, 토미 메이컴의 90년대 앨범 작업에도 함께했다. 2004년 미키 스페인, 리엄 스페인 형제가 합류하여 퀸텟이 되었고, 이름도 메이컴&스페인 브라더스로 바꿨다. 토미 메이컴 말년에는 함께 공연하는 것은 물론, 토미 메이컴 단독 공연에도 멤버(들)이 세션맨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현재도 메이컴&스페인 브라더스는 계속 활동하고 있는데, 멤버 1명의 탈퇴로 콰르텟으로 바뀌었다.

리엄 클랜시는 1999년 이후 솔로로 계속해서 활동했다. 2000년에는 홈페이지를 개설했고, 2002년에는 자서전도 냈다. 오리지널 앨범은 내지 않았지만, 2005년과 2006년에는 오리지널 몇 곡을 컴필레이션 앨범에 끼워서 앨범을 냈는데, 의외로 2006년도 앨범 <Yes, Those Were The Days>가 대박을 터트렸다. 그리고 같은 해에는 팟캐스트도 개설하는 등 온라인을 통해 팬들과 소통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참고로 리엄 클랜시는 1935년생으로 이순재, 이회창과 동갑이다. 2006년도에 앨범이 대박을 터트리자 리엄 클랜시는 고무를 받아 70을 넘긴 많은 나이에 오리지널 앨범 작업에 들어가게 되었고, 2008년 10월 오리지널 앨범인 <The Wheels of Life> 를 냈다.


2008년 <The Broad Majestic Shannon>을 부르고 있는 리엄 클랜시. 장소는 미국 뉴욕.
사실 이 앨범은 대부분이 모던 곡(1960년대 이후에 나온)들이고 트래디셔널 곡은 2곡밖에 없는데다 그나마도 아일랜드 곡도 아니라서, 전통적인 클랜시 브라더스 앨범들과는 차이가 있지만, 앨범 품질은 매우 훌륭하다. 하지만 이렇듯 말년의 불꽃을 태우는 리엄 클랜시의 발목을 잡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셋째형이 앓았던 특발성 폐섬유증. 이 병의 악화로 리엄 클랜시는 2009년 5월 마지막 공연을 끝으로 음악계에서 은퇴했다. 그런 속에서도 자신의 일생을 회고한 다큐멘터리 촬영은 끝까지 강행했고, 결국은 이 다큐멘터리 촬영을 마치고, 2009년 12월 4일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루이스 킬런은 1974년 탈퇴 이후로 솔로로 활동하며 잉글랜드 포크 음악계에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았다. 기타나 밴조도 아니고 콘서티나를 자기 노래를 반주하는 데 사용하는 장르를 최초로 개척한 인물이라는 타이틀이 붙을 정도. 그리고 많은 앨범을 발매하며 잉글랜드 포크 음악계에서 나름 스타로 활동을 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고, 2009년쯤에 70이 넘은 나이에 느닷없이 여자로 성전환을 했다! 이거야말로 성 정체성을 깨달은 할배의 등장이다! 남자였을 때 이혼을 3번이나 했는데, 아마도 스스로 남자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결혼 생활에 상당한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걸 젊었을 때 한 게 아니고 2009년(75세)이 되어서야 했다는 것. 2008년 말에 남자로 나온 아래 영상과, 2010년 초에 여자로 나온 영상으로 보아 2009년도에 성전환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렇게 여자가 되면서 이름도 남성형인 루이스 킬런이 아니라 루이자 조 킬런(Louisa Jo Killen)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2010년도에는 이 이름으로 다른 가수 앨범에 피처링을 했다. 루이자 조 킬런은 2013년 8월 9일,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008년 11월의 남자 루이스 킬런.


2010년 5월의 여자 루이자 조 킬런. 비디오를 보면 목소리도 여전히 굵고 남자였을 때 팔 근육이 남아 있어서 남자가 여장한 것처럼 보인다.

로비 오코넬은 1999년 이후로 계속 솔로 가수로 활동을 했는데, 2006년 도널 클랜시와 다시 손을 잡았다. 도널 클랜시는 다누라는 음악 그룹의 멤버이긴 했지만, 이 그룹은 풀타임이 아닌 파트타임인 관계로 가능했던 것. 보비 클랜시의 딸 이파 클랜시도 합류하여 클랜시 리거시(The Clancy Legacy)가 결성된다. 클랜시 리거시는 2006년 이후로 파트 타임 그룹으로서 계속하여 활동을 해 오고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파트 타임인 관계로 자주 출연하진 않는다. 대체로 도널 클랜시는 다누 멤버로, 나머지 둘은 솔로로 나온다. 현아가 포미닛 멤버로 더 많이 나오지 트러블메이커 멤버로 더 많이 나오지는 않는 것처럼.

핀바 클랜시와 에디 딜런은 듀엣으로 얼마 정도 더 활동하다가, 핀바 클랜시가 아일랜드로 돌아오면서 완전히 솔로 가수가 되었다. 에디 딜런은 지금도 솔로로 활동하고 있으며, 핀바 클랜시는 솔로로 잠깐 활동하다가 2007년 말, 셀틱 우먼의 남자 버전으로 기획된 하이 킹스(The High Kings) 멤버로 가입하였다. 하이 킹스는 유명 가수의 아들들 4명이 모인 포크음악 그룹인데, 기존 포크음악 그룹과의 차이점은 좀 더 대중성이 강화되었다는 것. 간단히 말해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의 씨엔블루나 FT 아일랜드라 하겠다. 그리고 하이 킹스는 포크 리바이벌 당시에 비해 정말로 현저히 변화한 환경에 잘 맞추어, 예전 클랜시 브라더스, 아니 그 이상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2011년 12월 31일, <Finnegan's Wake>를 부르고 있는 하이 킹스.

14. 한국에서의 위상

간단히 말해 일반인들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물론 한국에서도 아일랜드 포크 음악 듣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 많이 듣는 아티스트가 대부분 정통 포크 스타일이 아니라 팝, 록 등등 다른 분야와 결합된 형태의 아티스트들이다 보니, 클랜시 브라더스의 인지도는 상당히 떨어지는 것이 현실. 한국에서 아일랜드 포크 음악을 듣는다고 하면 코어스, 클라나드, 엔야, 셀틱 우먼 등등을 주로 떠올리는데, 사실 이들은 모두 정통 포크 스타일이 아니다. 이들보단 인지도가 덜하지만 그나마 정통 포크 스타일인 아티스트에는 더블리너스가 있다. 그런데 클랜시 브라더스는 진짜 매니아들 아니면 잘 모르는 듯.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한국에 안 알려진 그런 아티스트는 아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일단 국내에서 앨범 구입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 물론 네이버, 다음, 멜론, 아이리버 뮤직, 싸이월드 뮤직 등에서 소수지만 앨범을 MP3 파일 형태로 서비스하긴 한다. 그리고 <In Person At Carnegie Hall : The Complete 1963 Concert> 같은 경우에는 상당히 많은 음반 쇼핑몰에서 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앨범들은 해외 사이트를 통해서만 구입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이용 가능한 다운로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는 그나마 낫다. 대부분은 번거롭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 국제 배송을 신청해야 한다.

결정적인 이유는 클랜시 브라더스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는 것. 물론 두산백과와 위키백과에도 소개되어 있고, <신현준의 월드뮤직 속으로> 에도 틀린 내용이 몇 개 있긴 하지만 소개되어는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일반인들은 클랜시 브라더스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아일랜드 포크 음악 매니아들 이야기. 아무튼 클랜시 브라더스야말로 현대 아일랜드 포크 음악의 시초가 되는 아티스트이자, 1960년대를 풍미한 아일랜드 포크의 아이콘임엔 틀림없다.

15. 음반

여기 소개된 앨범들 가운데 *가 있는 것은 앨범 자체가 CD나 디지털 형태로 재발매되어 현재도 구입할 수 있는 것들. 물론 아일랜드에서 이야기고, 한국에서 구입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는 않다. 한국에서도 쉽게, 국내 사이트나 인터넷 다운로드를 통해 구입할 수 있는 것으로 확인된 앨범에는 ** 표시가 되어 있다.(직접 구매하여 국제 배송을 신청하거나, 지오패스나 아마존 24 같은 해외 구매 대행 사이트를 이용하지 않고 구매할 수 있는 것들.) 가끔 같은 앨범인데 레이블이 다르거나, 제목이 다르거나, 음원은 같은데 트랙 배열과 제목이 서로 다른 경우도 있고, 트랙이 많은 앨범의 경우 일부만 나온 경우도 있다.

1. 클랜시 브라더스
트래디션 레코드
** The Rising of the Moon (1956년 첫 발매, 1959년 재녹음 발매)
** Come Fill Your Glass with Us (or Irish Songs of Drinking and Blackguarding) (1959)
** The Clancy Brothers and Tommy Makem (1961)
콜롬비아 레코드
** A Spontaneous Performance Recording (1961)
* Hearty and Hellish! A Live Nightclub Performance (1962)
** The Boys Won't Leave the Girls Alone (1962)
** In Person at Carnegie Hall (1963)
The First Hurrah! (1964)
Recorded LIVE in Ireland (1965)
Isn't It Grand, Boys (1966)
Freedom's Sons (1966)
The Irish Uprising (1966)
** In Concert (1967)
Home, Boys, Home (1968)
Sing of the Sea (1968)
The Bold Fenian Men (1969)
Christmas(1969)
Flowers in the Valley (1970)
오디오 피델리티 레코드
* Welcome to Our House (1970)
Show Me The Way (1972)
Save the Land! (1972)
Live on St. Patrick's Day (1973)
뱅가드
** Clancy Brothers Greatest Hits (1973)
* The Clancy Brothers Live (1982)
** Reunion - 샤나키 레코드 (1984)
** Tunes n Tales of Ireland - 포크 이어러 레코드(1988)
* Older But No Wiser - 뱅가드 (1995)
** Ain't It Grand Boys - 콜롬비아 레코드(소니뮤직)(1995) 이전에 공개된 적이 없는 1961~1966년 사이에 녹음된 음원들을 공개한 앨범이다.
** In Person At Carnegie Hall : The Complete 1963 Concert - 콜롬비아 레코드 (2009) 1963년 앨범 <In Person At Carnegie Hall>은 1963년 3월 카네기 홀 콘서트의 일부 트랙만 들어 있는 앨범인데, 나머지 곡들까지 다 모으고, 그 이전의 콘서트에서 녹음되어 원래 앨범에도 들어 있던 두 곡도 덧붙여 2009년 발매. 일종의 익스팬디드 에디션이다.
* Carnegie Hall : 1962(2009) : 위의 앨범에 설명된 두 곡이 공연된, 1962년 11월 카네기 홀 콘서트 전체가 녹음되어 미공개 상태로 있었는데, 1995년에 나온 위의 콜롬비아 레코드 앨범에서 몇 곡이 공개되었다. 이 앨범은 그 공연의 전체를 녹음한 것이다.

2. 토미 메이컴&리엄 클랜시
** Tommy Makem and Liam Clancy (1976)
** The Makem & Clancy Concert (1977)
** Two for the Early Dew (1978)
** The Makem and Clancy Collection (1980)
** Live At The National Concert Hall (1983)
** We've Come A Long Way (1986)
3. 리엄 클랜시, 로비 오코넬, 도널 클랜시
** Clancy, O'Connell & Clancy (1997)
** The Wild And Wasteful Ocean (1998)

4. 리엄 클랜시
* Liam Clancy (1965)
Farewell To Tarwaithie (1974)- 1983년 The Dutchman으로 이름 바꿔 다른 레이블로 재발매
Kerrygold Cheddar Cheese (1975년경)
** The Dutchman (1983)
Home From The Sea (1989)
** Irish Troubadour (1999)- 1965년도 솔로 앨범의 익스팬디드 에디션. 녹음되었으나 공개되지 않은 곡들까지 덧붙여서 발매되었다.
The Mountain of the Women (2002)
** Liam Clancy's Favourites (2005)-컴필레이션인데 일부 오리지널 트랙도 포함한다.
* Yes, Those Were The Days – The Essential Liam Clancy (2006)
* The Wheels of Life (2008)

5. 토미 메이컴
** Songs of Tommy Makem (1961)
Tommy Makem Sings Tommy Makem (1968)
In the Dark Green Wood (1969)
** The Bard of Armagh (1970)
** Love Is Lord of All (1971) - 이상 2개 앨범이 합본으로 1995년에 재발매되었다.
Listen...for the rafters are ringing (1972)
Recorded Live - A Roomfull of Song (1973)
In the Dark Green Woods (1974)
Ever the Winds (1975)
4 Green Fields (1975)
Lonesome Waters (1985)
** Rolling Home (1989)
** Songbag (1990)
** Live at the Irish Pavilion (1993)
Christmas (1995)
** Ancient Pulsing Poetry With Music (1996)
** The Song Tradition (1998)

이것 외에 컴필레이션 앨범들은 일일이 리스트를 만들기 어려울 정도. 국내 사이트에서 구입 가능한 컴필레이션 앨범에는 1992년도 <Luck of the Irish>와 1993년도 <Irish Drinking Songs>(단 이 앨범에 수록된 트랙 가운데 몇 개는 더블리너스 트랙임)가 있다. 둘 다 완전한 컴필레이션은 아니고 전자는 4트랙, 후자는 2트랙이 미공개 음원이다. 그리고 완전 컴필레이션인 1994년도 앨범 <Wrap the Green Flag>, 2000년도 앨범 <Super Hits>, 2001년도 앨범 <The Best of the Clancy Brothers and Tommy Makem>도 구입 가능하다. 네이버 뮤직에서 클랜시 브라더스 앨범을 상당히 많이 팔고 있는데, 스트리밍은 불가능하고 다운로드만 된다. 그것도 트랙 하나하나는 안 되고 앨범 전체만 팔고 있다. 다음 뮤직에서도 몇 개 팔고 있는데, 이 경우에는 다른 앨범들처럼 다음 뮤직에서 제공하는 모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그 밖의 앨범들 가운데 *이 1개만 있는 것은 아마존이나 이베이를 직접 이용하거나 아마존 24, 지오패스 등의 해외 구매 대행 사이트에서 구할 수도 있으나, *이 없는 것은 절판되었다는 뜻이므로 아마 한국에서 구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라 보면 된다. 걱정할 건 없다. 컴필레이션에서 일부나마 앨범에 소속된 트랙을 들어 볼 수는 있으니까.



[1] 포크 밴드 클랜시 브러더스와 토미 메이켐의 역사적인 카네기홀 실황을 담고있는 1963년 컴플리트 콘서트. 밥 딜런, 오데타 등 포크 라이브의 진수를 접할 수 있는 컬렉터스 에디션이 2009년에 발매되었다. Clancy Brothers And Tommy Makem - In Person At Carnegie Hall (Legacy Edition)[2] Waltzing Matilda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비공식 국가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한 노래다. Waltzing은 오스트레일리아 속어로 걸어다닌다는 뜻이고, Matilda는 노래 속 주인공(swagman, 즉 방랑자)이 들고 다니는 침낭 이름이다. 자세한 사항은 여기(영문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