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스파르타의 두 왕 중 한명이었던 클레오메네스 3세로부터 전쟁의 명칭이 비롯되었다. 그는 스파르타를 예전의 강국으로 만들기 위하여 군대를 강화하는 개혁을 시행하였고, 아카이아 동맹에 속한 북쪽의 메갈로폴리스를 포위하였다. 이에 아카이아 동맹이 전쟁을 선포했다.
당시 스파르타를 누르고 그리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었던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3세까지 참전하면서 헬레니즘 중반기의 대규모 전쟁이 되었다. 초기에는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원을 얻어낸 스파르타가 아르카디아(펠로폰네소스 반도 중앙부)를 석권하며, 리카에움 전투(BC 227)에서 승리하였고, 딤메 전투(BC 226)에서는 아르고스 중심의 아카이아 동맹군에 대승을 거두어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제패하였다.
그러자 그리스의 통일을 바라지 않던 마케도니아가 개입하게 되었고, 클레오메네스 3세는 더 이상의 팽창을 중단하고 펠레폰네소스 반도의 입구인 코린토스 지협의 성벽을 요새화하며 버텼다. 그러나 후방의 아르고스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스파르타 군대는 남쪽으로 후퇴하여, 라코니아(스파르타가 위치한 펠레폰네소스 반도 남부 일대) 방어에 주력하게 된다.
게다가, 안티고노스 3세는 프톨레마이오스 3세에게 소아시아의 일부 영토를 넘겨주는 대가로 스파르타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끊어내어, 클레오메네스 3세를 고립시켰다. 용병 월급 주기도 힘들어진 그는 스파르타의 예속 농민인 헤일로타이에게 자유를 준 후 무장시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며 결전을 준비했다.(BC 223년)
스파르타는 아르카디아에서 스파르타로 통하는 길목을 모두 요새화하며 버텼으나, 그 고갯길 중 하나인 스파르타 동북면의 셀라시아(BC 222년)에서 대패하면서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고, 클레오메네스 3세는 스파르타 시민들에게 안티고노스 3세의 요구에 순응하라는 부탁을 하며 이집트로 피신하였다.
마케도니아 군대는 스파르타에 입성한 첫 외부 세력이 되었으나, 안티고노스 3세가 약탈을 금하여 평화롭게 이루어졌다. 그는 스파르타를 클레오메네스 3세 이전으로 되돌리고, 북방 민족의 침입을 격퇴하러 마케도니아로 돌아갔다.
이 전쟁으로 스파르타는 일개 폴리스로 전락하게 되었고, 그리스에 대한 마케도니아의 패권이 재확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