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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dro I de Aragón | ||
가문 | 히메네스(세메노) 왕조 | |
생몰년도 | 1068년 ~ 1104년 | |
출생지 | 아라곤 왕국 | |
사망지 | 아라곤 왕국 | |
재위 기간 | 아라곤 왕국 국왕 | 1094년 - 1104년 |
팜플로나 왕국 국왕 | 1094년 - 1104년 | |
아버지 | 산초 레미리스 | |
어머니 | 우르헬의 이자벨 | |
이복형제 | 페르난도 산체스, 알폰소 1세, 라미로 2세 | |
배우자 | 아키텐의 아그네스, 아라곤의 베르타 | |
자녀 | 피에르, 아그네스 | |
종교 | 기독교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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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라곤 왕국 3대 국왕, 팜플로나 왕국 13대 국왕.왕호는 스페인어로는 '페드로 1세', 아라곤어로는 '페로 1세', 바스크어로는 '페트리 1세'이다.
2. 생애
1068년경 아라곤과 팜플로나 왕국의 국왕 산초 레미리스와 우르헬 백작 에르멘골 3세의 딸인 이자벨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이복형제로 페르난도 산체스, 알폰소 1세, 라미로 2세가 있었다. 그의 삼촌인 우르헬 백작 아르멘골 4세는 자신의 아들과 형제가 사망할 경우를 대비해 그를 상속인으로 지명하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1085년, 그는 소브라베와 리베고르가 공작으로 선임되어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다. 1086년 1월에 자카에서 아키텐 공작 기욤 8세의 딸인 아그네스와 결혼했으며, 1087년 10월 26일 팜플로나에 있는 아버지와 합류한 뒤 그곳 주교들의 권리를 재확인했다.1083년 아버지가 정복한 그라우스를 사수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으며, 1086년 카스티야와 레온 국왕 알폰소 6세가 무라비트 왕조의 유수프 이븐 타쉬핀과 맞붙은 사그라하스 전투가 벌어졌을 때 직접 군대를 이끌고 레온군에 가세했지만 패배를 면치 못했다.1087년 에스타다를 공략했고, 1088년 몬테아라곤을 점령했으며, 1089년 6월 24일 몬존을 점령함으로써 아버지가 우에스카를 본격적으로 공격할 발판을 마련했다.
1094년 6월 4일 우에스카를 포위 공격하던 아버지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자 병사들의 추대를 받아 아라곤과 팜플로나의 왕위에 올랐다. 이후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교황청에 왕국을 봉헌한 아버지의 서약을 준수하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이에 교황은 아라곤의 왕과 왕비는 교황의 허락 없이는 파문을 받을 수 없음을 보장하는 교령 <쿰 유니버시스 상크테(Cum universis sancte: 모든 성도들)>를 반포했다.
그는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레콩키스타를 전개했다. 1095년 나발과 살리나스 드 트리요를 공략하여 바르바스트로와 우에스카로 진출할 발판을 마련했으며, 1096년 우에스카를 재차 포위했다. 1096년 11월 15일 알코라즈 전투에서 우에스카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사라고사의 타이파 알 무스타인 빌라흐를 격파했다. 11월 27일 우에스카 공략에 성공한 뒤 이 도시를 아라곤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한편, 페드로 1세는 보리아나에서 발렌시아에 거점을 삼고 할거하던 엘 시드와 동맹을 맺었다. 1096년 엘 시드를 만나고자 발렌시아로 떠난 그는 발렌시아 왕국의 국경지대인 베니카델에서 엘 시드와 대면했다. 이후 발렌시아로 나아가다가 바이렌에서 알 무스타인의 조카인 무함마드의 습격을 받았지만 격퇴하고 엘 시드와 함께 발렌시아에 입성했다. 그는 몬순의 영주 라미로와 엘 시드의 맏딸 크리스티나를 결혼시킴으로써 엘 시드와의 동맹을 돈독하게 다졌다.
1100년, 페드로 1세는 에브로 계곡에서의 공세를 재개하여 1099년부터 포위 공격을 받고 있던 바르바스트로를 정복한 뒤 여세를 몰아 사리녜나를 공략했다. 이 무렵 제1차 십자군 원정이 선포되자, 그는 이에 가담하려 했다. 하지만 산 후안 데 라 페냐 수도원의 수도자들의 간곡한 요청을 받은 교황 파스칼 2세는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들을 상대하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것만큼의 가치가 있다"며 아라곤 왕의 예루살렘 순례를 막았다. 그 대신, 사라고사를 조속히 공략할 것을 촉구했다. 페드로 1세는 교황의 뜻에 따라 1101년 프랑스-카탈루냐 기사들의 도움을 받으며 사라고사를 공격해 그해 6월부터 포위 했다. 그러나 사라고사의 방비가 강건했고 병력도 부족했기에 더 이상 몰아붙이지 못했고, 단지 사라고사 인근에 쥬시볼(Juslibol) 요새를 짓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페드로 1세는 정복한 영토에 인구를 채우기 위해 노력했다. 여러 주요 도시에 특권을 부여했으며, 가스코뉴 등 아라곤 왕국과 가까운 국가의 민중들에게 이주를 권장했다. 점령지에 이주한 주민들은 현지에서 방위 임무를 수행하되 원정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혜택을 누렸다. 또한 교황청에 주교들을 현지로 보내 가톨릭을 전파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기독교를 왕국 전역에 전파해 통치를 원활하게 하는 동시에 우르헬 교구의 확장을 저지한다는 목적이 담겨 있었다.
1103년 무라비트 왕조의 유수프 이븐 타쉬핀이 엘 시드가 세웠던 발렌시아 왕국을 재정복한 뒤 아라곤에 쳐들어왔다. 무슬림들은 아라곤 왕국의 남부 일대를 석권한 뒤 우에스카를 위협했다. 그는 이에 맞서 페랄타 데 칼라산츠를 장악했고, 우르헬 백작 아르멘골 6세와 함께 피라세를 포위해 공략에 성공했다. 1104년에는 사라고사를 재포위했으나 이번에도 공략에 실패했다.
1104년 9월 28일, 페드로 1세는 사라고사 공략에 실패한 뒤 우에스카로 귀환하던 중 발다란에서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아키텐 공작 기욤 8세의 딸인 아그녜스와 결혼했고, 1097년 아그네스가 사망한 뒤 베르타[1]와 결혼했다. 아그네스와의 사이에서 피에르, 아그네스를 낳았지만 각각 1103년과 1104년에 사망했고, 베르타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페드로 1세가 이렇듯 자식을 남기지 못한 채 사망했기에, 아라곤과 팜플로나 왕위는 이복형제인 알폰소 1세에게 넘어갔다.
[1]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름이 이탈리아어인 '베르타'인 것으로 볼 때 이탈리아인 부모를 둔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