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 <colcolor=#000000,#ececec>1912년 10월 7일 |
페루 리마 | |
사망 | 2002년 6월 4일 (향년 89세) |
페루 리마 | |
국적 | [[페루|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
재임기간 | 제49대 대통령 |
1963년 7월 28일 ~ 1968년 10월 3일 | |
제52대 대통령 | |
1980년 7월 22일 ~ 1985년 7월 28일 | |
정당 | [[민중행동당| 민중행동당 ]] |
학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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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루의 제49대(1963~1968), 52대(1980~1985) 대통령이다.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가 군사 쿠데타로 실각,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가 다시 군사 쿠데타로 실각했고 군정 종식 후 다시 대통령으로 재집권해 민주적으로 임기를 끝마친 정치 이력을 가지고 있다.2. 생애
1912년 리마에서 유명한 정치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라파엘 벨라운데 디에스 칸세코는 저명한 교수로서 호세 루이스 부스타만테 이 리베로 대통령(1945~1948)의 총리를 역임했고 할아버지 마리아노 안드레스 벨라운데는 재정부 장관을 지냈다. 진외증조부 페드로 디에스 칸세코는 대통령(1863, 1865, 1868)이었다. 1924년 정부의 탄압을 피해 프랑스로 이주하여 프랑스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30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1935년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건축학부를 졸업했다. 덕분에 그는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게 되었다.그는 잠시 멕시코에서 지냈고 1936년 페루로 귀국하여 유명한 건축가로 명성을 높였다. 1943년 리마의 공과대학에서 건축과 도시계획을 강의했으며 후일 대학교의 토목 및 건축학부 학장이 되었다. 1944년 정계에 진출하여 국민민주전선(FREDENA)을 창당하였다.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 마누엘 오드리아(Manuel Odría) 장군의 쿠데타로 잠시 정계를 떠났고 1956년 오드리아가 물러나자 복귀했다. 같은 해 중도주의 정당인 민중행동당을 창당했다. 좌파 정당인 미주혁명인민동맹(APRA)의 개량주의적 대안 정당으로 조직된 이 정당은 1956년 선거에서 대선은 패배했지만, 총선은 상원 5석, 하원 21석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962년 선거에서도 패하였지만, 부정선거 의혹으로 인해 선거 무효가 되면서 다음 해 치러진 선거에서 드디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벨라운데는 "페루인에 의한 페루의 정복"이라는 구호 하에 강력한 국가 주도 개발을 추진했다. 그에 따르면 "오직 우리의 내륙지대에 눈을 돌려,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야생 지대를 정복해야만 남아메리카가 최종적으로 진정한 발전을 이룰 것"이었다.# 해안지대와 북부 내륙지대를 잇는 고속도로와 광대한 관개 시스템 및 수력발전소 건설이 추진되었다. 하지만 거창한 계획과 달리 경제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했고 1967년에는 자국의 솔화를 큰 폭으로 평가절하했다. 1968년 미국계 석유회사인 스탠더드오일오브뉴저지(Standard Oil of New Jersey)[1]에 거액을 주고 스탠더드오일오브뉴저지가 소유한 석유회사 IPC의 시설을 인수하기로 이면합의한 사실이 공개되면서 여론의 거대한 비판에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IPC 국유화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국제 금융기구로부터 대출도 받지 못하게 되자 적자재정과 외국의 상업차관에 의존하여 경제를 꾸렸는데 경제위기를 악화시킬 뿐이었다. 군부의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를 위시한 일단의 좌익 정치군인들은 벨라운데 정부가 외국에 주권을 팔아넘겼다고 분개하여 1968년 10월 3일 무혈 쿠데타로 벨라운데를 축출했다.
실각 후 미국에 머무르며 하버드 대학교, 존스 홉킨스 대학교,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강의했다. 1980년 군정 종식 후 대선에 출마하여 44.9%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권좌에 복귀했다. 선거 중 페루의 마오주의 무장조직인 빛나는 길이 다른 좌파정당의 선거 참여에 반대하여 무장반란에 나서면서 2000년까지 7만의 인명이 희생된 페루 분쟁(Peruvian conflict, 1980~)의 시작을 알렸다. 벨라운데는 자유시장 개혁을 시도했지만 2기 내내 좌파의 무장반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 외채 증가, 1982~1983년 엘니뇨로 큰 고통을 겪었고 1985년 선거에서 그의 약점을 능숙하게 활용한 APRA 사무총장 알란 가르시아에 패배하여 임기를 끝마치게 되었다.[2] 직후 다른 전직 대통령처럼 종신 상원의원(Senador Vitalicio)으로 재직했다.[3] 2002년 6월 4일 리마에서 별세했다.
[1] 엑손모빌의 이전 이름. 스탠더드오일이 독점 판결을 받고 해체되면서 여러 회사들로 나뉘었는데, 이 중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기업이 스탠더드오일오브뉴저지를 칭했다. 스탠더드오일오브뉴저지는 지주회사라는 자부심으로서 스탠더드오일의 첫글자 S와 O의 발음을 활용해 에소(Esso)로 이름을 바꿨다가 1972년 엑손(Exxon)으로 개명했다. 엑손은 1966년 모빌(Mobil)로 사명을 변경한 스탠더드오일오브뉴욕(Standard Oil of New York)을 1999년 인수하여 세계 최대의 석유회사인 엑손모빌로 거듭났다.[2] 가르시아는 집권 후 무려 96%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후대의 나이브 부켈레 외에는 적수가 없다시피할 정도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오히려 테리 시기보다 경제, 치안 모두 더 악화시켜놔 말년에는 지지율이 9%로 떨어지며 초라하게 퇴장했다. 그나마 그가 밀어준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본인도 퇴임 16년 후인 2006년 대통령 재선에 성공하며 어느 정도 체면치레는 했다.[3] 해당 특권은 1993년 개헌으로 폐기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