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15:17:47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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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000>
페루 공화국 제50대 대통령
후안 프란시스코 벨라스코 알바라도
Juan Francisco Velasco Alvarado
파일:220px-Juan_Velasco_Alvarado_1971.jpg
출생 <colcolor=#000000,#ececec>1910년 6월 16일
페루 카스티야
사망 1977년 12월 24일 (향년 67세)
페루 리마
국적
[[페루|]][[틀:국기|]][[틀:국기|]]
재임기간 제50대 대통령
1968년 10월 3일 ~ 1975년 8월 30일

1. 개요2. 생애
2.1. 집권 이전2.2. 집권 이후2.3. 몰락2.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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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루의 제50대 대통령(1968~1975)이다. 1968년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했다. 1975년 쿠데타로 물러나고 1977년 사망했다.

2. 생애

2.1. 집권 이전

1910년 페루 북부 피우라 인근의 해안 도시 카스티야의 가난한 가정에서 출생했다. 1930년 초리요스 사관학교(Escuela Militar de Chorrillos)에 수석 입학하여 4년 후 역시 수석 졸업하고 보병소위로 임관했다. 1937년 중위로 진급했다. 1940년 대위로 진급하고 같은 해 미주혁명인민동맹(APRA)의 활동가 콘수엘로 곤살레스 포사다(Consuelo Gonzales Posada)와 결혼했다.

1945년 소령, 1949년 중령, 1955년 대령, 1959년 준장, 1965년 소장으로 진급했다. 1952년 사관학교 교장이 되어 학교 개혁을 담당했다. 1953년부터 1954년까지 제5사단 소속 보병대대의 대대장을, 1955년부터 1958년까지 보병학교 교장을, 1960년부터 1961년까지 제2경사단장을 역임했다. 1962년 주프랑스 대사관의 국방무관으로 파견되었다가 1964년 귀국 후 제1군구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1968년 1월 육군총사령관 및 페루군 합참의장으로 임명되었다. 1968년 10월 3일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민선 페르난도 벨라운데 테리 대통령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했다.

2.2. 집권 이후

파일:Sello_Reforma_Agraria.jpg
1969년 발행된 페루의 우편
일하는 자에게 토지를(Tierra para el que la trabaja)
벨라스코와 그의 추종자들은 군사혁명정부(Gobierno Revolucionario de la Fuerza Armada)를 자칭했다. 임기 중 혁명적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토지개혁과 국영화, 원주민 권리 증진을 위한 정책을 시행했다. 이것은 육군총사령관과 합참의장을 겸직하던 시절 군부 내의 좌경 성향의 대령들과 함께 작성한 미래 국가의 청사진인 이른바 잉카 계획안(Plan Inca)을 따른 것이었다.

벨라스코는 집권 첫 해부터 외국계 회사를 국영화했다. 1968년 미국계 석유회사인 IPC를 시작으로 1969년 국제 전신·전화회사(ITT), 1970년 체이스 맨하탄 은행[1] 등을 무상몰수하여 국영화했다. 이 조치는 미국의 반발을 사서 향후 양국 정부간 첨예한 대립을 일으켰다.

1969년 6월 24일 농지개혁법을 공포하여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농지개혁법의 주요 목표는 대지주와 중소지주의 토지를 몰수하고, 농민이 소유한 협동조합을 구성하고, 전통적인 농민 공동체를 재조직하고, 농민들의 공동 노력을 통한 농산업을 형성하는 것 등이었다. 개혁법 공포 이틀 후 북부 해안지대의 사탕수수 대농장에 군대를 보내어 몰수하는 것을 시작으로 1979년 6월까지 1만 5,826개 필지로 나뉜 최소 900만 헥타르의 토지를 수용하여 37만 농가에 분배했다. 이것은 전임 벨라운데 정부의 온건한 농지개혁 결과를 압도하는 것으로 당시 정부는 546개 대농장으로 나뉜 100만 헥타르를 수용했다. 이렇게 수용된 토지는 대한민국이나 일본처럼 농민들 소유로 분배되어 자영농을 육성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약 1만 5천개 필지) 집산화를 위한 1,708개 협동조합을 조직하는데 사용되었다. 사유지를 몰수당한 지주들은 20~30년 만기의 연이율 4~6% 채권으로 보상을 받았다.

원주민의 지위 향상을 위한 문화정책을 펼쳤다. 가장 중요한 문화정책은 1975년에 매년 5월 27일을 원주민 언어의 날(Día de las Lenguas Originarias)로 지정한 것이다.[2]

대외적으로는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소련과 관계를 개선하되 공산주의자들은 강력히 탄압했다. 1975년 태평양 전쟁에서 칠레가 페루로부터 얻은 아리카(Arica) 일대를 볼리비아의 다른 영토와 교환하는 식으로 칠레-볼리비아 국경분쟁을 종결하려고 하자 전쟁도 불사하겠다면서 강경하게 반발했다.[3] 벨라스코의 지나친 급진 정책은 국내의 우파 세력과 미국의 거센 반발을 샀으며 1973년 석유파동으로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였다.

2.3. 몰락

1975년 8월 29일 온건파 군인 총리였던 프란시스코 모랄레스 베르무데스의 쿠데타로 실각했다. 정계에서 은퇴 후 고향에 은거했는데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1977년 12월 24일 리마 시내의 군사병원에서 별세했다.

2.4. 여담

베네수엘라우고 차베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정치인 중 하나이다. 아직 사관생도였던 1974년 아야쿠초 전투 승리 150주년을 기념하여 페루를 방문한 베네수엘라 사절단 가운데 차베스가 있었는데 벨라스코의 연설과 이상에 감화되었다고 한다.
[1] 2000년 하반기, 투자은행인 JP모건과 합병하면서 JP모건 체이스로 사명을 변경했다.[2] 페루는 스페인어 외에도 숫적으로 가장 우세한 케추아어를 비롯한 48개 원주민 언어가 사용된다. 같은 언어로 분류되나 상호소통이 힘든 방언까지 감안하면 언어의 숫자는 더 늘어날 수도 있다.[3] 당시 칠레의 행동은 태평양 전쟁의 강화조약으로 페루로부터 받은 영토를 페루 정부의 동의 없이 임의로 교환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는 1883년 안콘 조약(Treaty of Ancón)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