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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平南國중국 윈난성에 세워졌던 반청주의 이슬람 국가.
윈난 지역 출신 판사이[1] 두문수(杜文秀, Dùwénxiù, 두원슈, 1828~1872)가 직접 수립했다.
현대 중국에서는 두문수 반란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격하 목적으로 그런 건 아니고 정부 차원에서 농민 출신이었던 두문수를 높이 평가하고 있기 때문에 그를 기념하는 문물들이 윈난성에 보존되어 있다.
2. 역사
19세기 중반 청나라는 소수민족을 심각하게 탄압하여 이에 대한 저항이 강했다. 평남국이 이슬람 국가라는 이유로 후이족(이슬람교도)만의 운동이라고 간단하게 평가하는 경우도 있으나, 실제로는 해당 지역의 한족과 후이족 그리고 바이족(백족) 등이 함께 청나라의 부당한 차별에 저항했다.운남성에는 광산 등의 이권을 두고 한인 상인과 회민 상인들 간의 다툼이 심했다. 하지만 청나라 관리들은 일방적으로 한족의 편을 들었다. 1845년 영창에서 회민 학살사건이 발생했는데 두문수는 여기서 가족과 약혼녀를 잃었다. 두문수는 이듬해 북경까지 가서 고발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자 두문수는 1856년 10월 몽화(蒙化)에서 거병하여 대리(大理)를 점령하였고 나아가 운남성 서부를 장악하였다. 그는 반란군에 의해 지도자로 추대되어 총통병마대원수(總統兵馬大元帥)[2]가 되었고, 대리를 수도로 평남국을 건국하였다.
평남국은 세금을 줄이고 군대를 확장했으며, 문화와 단결을 중시하여 후이족, 한족, 바이족의 사이를 개선하려 했고 이문학(李文學, Lǐwénxué, 리원쉐)이 이끌던 이족 반군과도 제휴하였다. 청나라와의 전투에서도 좋은 성과를 거뒀다. 그들은 스스로 대리국의 계승자로 생각했다.
8년간 전성기를 누리던 평남국은 1867년을 기점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두문수는 1867년부터 1869년까지 곤명을 포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로 인해 평남국의 기세가 꺾였고 태평천국 운동을 진압한 청나라는 운남포정사(雲南布政使) 잠육영(岑毓英, Cényùyīng, 천유잉)을 앞세워 평남국을 공격했다. 여기에는 청나라에 항복한 후이족 반군 지도자 마여룡(馬如龍, Mǎrúlóng, 마루롱)의 세력도 가담했다.[3]
위기에 몰린 두문수는 1872년 유도형(劉道衡, Liúdàohéng, 류다오헝)을 사자로 보내 대영제국에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영국은 청나라와 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하여 거부했다. 그리고 그 사이 잠육영이 지휘하는 청군이 수도 대리를 함락시켰고, 두문수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두문수 사후에도 잔당들은 저항했지만 이마저도 1874년 모조리 진압되었고 평남국은 완전히 멸망했다.
3. 군대
평남군은 한족식과 기독교의 것을 따와 노란색 복장을 입은 태평천국군과 달리 명나라의 군복을 사용했으며 이 때문인지 부명멸청을 외치던 한족들에겐 거의 상징이나 다름 없었다.4. 평가
이슬람 색채가 강하긴 했으나 평남국은 민족 간의 화합을 위해 관료를 등용할 때도 여러 민족을 다양하게 등용하는 등의 정책을 취했다. 애초에 후이족만을 위한 국가였다면 멸만흥한 이라는 구호를 외치던 한족들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후이족과 한족은 종교만 다를 뿐 실질적으론 같은 민족이나 다름 없어서 밑의 구호도 나온 것이다.5. 여담
- 현재 대리국 고성 박물관 자리는 제독부 관공서 자리였다.
- 외교 문서에서 두문수는 스스로를 술탄 술라이만이라고 칭했다. 청나라와의 전쟁을 성전이라 칭하여 이슬람적 색채를 띄었으며, 관료들은 후이족과 한족, 바이족을 포함하여 다양하게 등용했다.
- 더 넓은 의미에서 남중국인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도 했다. 군복을 명나라의 것[4]으로 하여, 安漢反淸(한(족)을 안녕하게 하고, 청조에 반대하자)이라는 표어를 내걸었다. 다음은 평남국이 내세운 安漢反淸의 메시지이다.
한(족)을 안녕하게 하고, 청조에 반대하자 安漢反淸 회족과 한족이 하나가 되어 봉기의 깃발을 세우자 오랑캐를 없애고 중화를 되살리자 부패를 잘라내자 사람들을 곤경에서 구해내자 連回、漢為一體、 豎立義旗、 驅逐韃虜、 恢復中華、 剪除貪污、 出民水火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