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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040047><colcolor=#FFD700> 타이 왕국 초대 총리 꼰 후따싱 ก้อน หุตะสิงห์ | Kon Hutasingh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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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884년 7월 15일 |
| 시암 끄룽텝주 방콕 | |
| 사망 | 1948년 10월 1일 (향년 64세) |
| 말라야 연방 피낭주 조지타운 | |
| 재임기간 | 초대 총리 |
| 1932년 12월 10일 ~ 1933년 6월 21일 | |
| 부모 | 부친 후앗 후따싱 모친 깨우 후따싱 |
| 배우자 | 닛 후따싱, 츠이 후따싱 |
| 자녀 | 뚬 후따싱 |
| 학력 | 미들 템플 |
| 종교 | 불교 |
| 존칭 | 마노빠꼰 니띠타다 (มโนปกรณ์นิติธาดา) |
1. 개요
태국의 초대 총리.2. 생애
콘 후타씽은 1884년 7월 15일 방콕에서 중국계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수안쿨라브 윗타얄라이학교와 법무부 법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영국 런던의 미들 템플에서도 수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등록 기록은 없다. 학업 후 법무부에서 근무하며 승진해 프라야 마노빠꼰 니띠타다라는 칭호를 받았고, 1918년 라마 6세의 추밀원 의원이 되었다. 1932년 시암 혁명 후 인민당은 자신들의 권력욕을 감추기 위해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청렴한 인물로 평가된 마노빠꼰을 초대 인민위원회 의장으로 선출했고, 이후 직함은 ‘총리’로 바뀌었다. 그는 헌법 제정과 함께 시암 최초의 입헌정부를 이끌었으나 실질적으로 인민당의 꼭두각시였다. 1933년 프리디 파놈용이 사회주의적 경제 계획안인 ‘노란 표지 문서’를 제출하자 왕은 이를 공산주의적이라 비판했고, 마노파꼰은 프리디를 축출하기 위해 내각을 해산하고 헌법 일부를 정지시킨 뒤 의회를 폐쇄하고 사법부 기능을 중단시켰다. 프리디는 프랑스로 망명했고, 마노파꼰은 ‘4월 쿠데타’ 또는 ‘조용한 쿠데타’라 불리는 사건을 주도해 공산주의자 탄압법을 제정하며 반공정책을 강화했다. 이후 언론과 좌파 활동을 검열했으나 이러한 독재적 조치로 인해 인민당 내 반발이 커졌고, 결국 1933년 6월 프라야 파혼 폰파유하세나 등 군 지도자들이 내각에서 사퇴하며 그의 몰락이 시작되었다.1933년 6월 20일, 프라야 파혼과 다른 군 지도자들이 주도한 시암 쿠데타가 일어났다. 프라야 마노빠꼰은 즉시 총리직에서 해임되었다. 프라야 파혼은 스스로를 두 번째 총리로 임명하고 정부를 장악했다. 프라디폭 국왕은 그의 임명을 수락했다. 마노빠꼰은 이후 영국령 말라야 페낭으로 추방되어 1948년 64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