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06 12:51:45

프라야 파혼 폰파유하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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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일생


파일:파혼 하세.jpg

1. 개요

영어 : Phraya Phahonphonphayuhasena / 태국어 : พระยาพหลพลพยุหเสนา (생애 : 1887년 3월 29일 ~ 1947년 2월 14일)

태국의 제2대 총리이다.

2. 일생

프라야 파혼 폰파유하세나는 중국계 아버지와 몽족 어머니 사이에서 방콕에서 태어났으며, 1913년 가족이 ‘파혼요틴’이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그는 출라촘끄라우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독일 리히터펠데의 프로이센 육군사관학교에서 공부했다.[1] 이후 덴마크에서 공학을 배우다 자금 부족으로 귀국했다. 1931년 프라야 파혼 폰파유하세나로 승진했고, 1932년 육군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사 총사’로 불린 혁명 세력의 핵심 인물로, 인민당의 지도자 중 한 명이자 입헌 혁명을 주도해 전제군주제 종식을 선언했다. 1933년 프리디의 사회주의 경제안으로 헌정 위기가 발생하자, 프라야 파혼은 쿠데타를 일으켜 무혈로 정권을 장악하고 제2대 시암 총리가 되었다. 즉위 직후 왕다파의 반란인 보워라뎃 반란을 진압해 권력을 공고히 했으나, 이후 내각 분열과 1937년 부동산 부패 사건으로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었다. 1938년 예산 문제로 내각이 사퇴하고 쁠랙 피분송크람이 후임 총리가 되었다. 그는 이후 공직에서 은퇴해 제2차 세계대전 중 군 총감으로 일했으며, 1947년 뇌출혈로 사망했다. 생전 높은 관직을 지냈음에도 사망 당시 가족은 장례비조차 부족했다고 전해진다.
[1] 이 곳에서 프라야는 헤르만 괴링의 급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