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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릿 타나랏(สฤษดิ์ ธนะรัชต์, Sarit Thanarat 1908년 6월 16일 - 1963년 12월 8일)
쁠랙 피분송크람을 쿠데타로 몰아내고 새로 태국의 독재자가 된 인물 다만 워낙 짧게 독재를 했던 지라 잠깐 거쳐갔던 독재자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릿 타나랏은 태국 방콕에서 "캄보디아 왕실 편년사"의 번역작가로도 유명한 라완 루안디트아난 소령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4살 때부터 7살까지 모친의 집안이 있던 무크다한에서 자랐고 7살에는 소학교에 들어갔다. 출라촙끄라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태국군의 주요 직책들에서 일하다가, 사릿 타니릿은 쁠랙 피분송크람에게 발탁되었고 1949년 일어난 이른바 "왕궁반란 사건" 때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송크람 정권에서 일어난 여러번의 쿠데타를 막은 것을 바탕으로 타나랏은 송크람의 신임을 받았고 그 신임을 바탕으로 그리고 쿠데타를 방지한다는 이유 아래 자신의 정치적인 영향력 또한 커져갔다. 그러나 1957년 치러진 태국 총선거의 부정선거라는 의혹이 짙어지자 타나랏은 송크람과는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1958년 9월 18일 수많은 쿠데타들이 이미 실패했음에도 쿠데타를 일으켰고 성공하였다. 이에 송크람과 파오 샤놈 내무대신을 추방하고 잠시동안 폿트 살라신에 이어서 타놈 끼띠카쫀 육군중장을 수상으로 임명했지만 다시 부정선거라는 구실로 1959년 2월 10일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태국 수상에 취임하며 독재정치를 시작했다.
이후 태국은 민주주의가 맞지 않는다고 말하며, 태국 국왕에게서 절대권력을 얻은 이후 태국의 관료기관과 군 조직을 통치기반으로 반대파들을 탄압했다. 훗날에도 주구장창 써먹게 되는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공산주의자와 반체제 인사 그리고 언론인과 문학가들을 무차별적으로 체포해서 감옥에 넣어버렸고, 타나랏은 왕실을 들먹이면서 국민결속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독재정치를 정당화했다. 그래서 이때부터 태국의 국왕은 마치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고 이러한 상황은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타나랏의 독재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불력[1] 2502년 임시헌법"이 있다. 이 헌법은 고작 2page 분량에다가 20개 정도의 조항밖에 없는 간단한 법조문이지만 헌법 제 17조에는 국가안정을 위해서 태국의 수상은 합법적인 대응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는데, 이는 훗날 박정희가 사용하는 긴급조치와 똑같았다. 그리고 타나랏은 이 헌법 17조를 바탕으로 독재정치를 실시하며 살인과 강간, 방화 등을 저지른 중범죄자들에게 공개처형을 했으며, 태국의 조직폭력단과 불량배들을 사회정화를 위한답시고 "캉 소이"라고 불리는 잔인한 형벌을 사용했다. 캉 소이는 약 1년 정도 징역형을 사는 것에 불과하지만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좁은 방에 범죄자들을 가둔 이후 식사를 외부에서만 공급하는 방법의 형벌이였기 때문에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고 이 형벌은 태국 내에서 공포의 상징처럼 되었다. 다만 이런 무자비한 형벌로 인해 매우 혼란스러웠던 태국사회의 질서가 회복되고 범죄도 감소했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타나랏 통치 시기에는 화재사건이나 중범죄의 발생빈도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런 잔혹한 통치와는 달리 아편재배를 금지했으며, 일본과 미국을 비롯한 유럽국가에서 차관을 빌려서 상당한 수준의 경제성장을 했다. 물론 많은 군인과 퇴역장성들이 기업을 설립해서 태국 군부의 자금줄을 담당하는 부정부패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또한 농업에서 공업으로 전환하는 개발정책을 실시해 도로를 만들고 여러가지 개발독재를 실시하며 기업하기에 좋은 법을 만들기도 했다. 1962년에는 이른바 "신산업 투자권장법"을 제정하며 해외 기업들이 직접 투자를 하는 일도 가능해져서 토요타를 비롯한 일본의 자동차 회사들도 이때 태국으로 대거 진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타나랏은 권력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1963년 12월 8일에 방콕에서 간부전으로 사망했다. 항년 55세. 사후 태국의 독재자는 타놈 끼띠카쫀이 계승했다.
타나랏은 태국의 독재자들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독재정치를 실시했지만, 혼란스러웠던 태국 사회를 바로잡고 전쟁 후 피폐해진 태국을 성장시켰다는 영웅이라는 두 가지 평가가 현재 태국에 존재한다고 하며, 민주화에 성공한 현재의 태국은 사실 타나랏의 경제 성장 때문에 가능했다는 주장도 있다.
[1] 불교의 달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