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9 13:46:46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

파일:800px-Anne-Louis_Girodet-Trioson_006.jpg
풀네임샤토브리앙 자작, 프랑수아-르네
(François-René, vicomte de Chateaubriand)
출생 1768년 9월 4일
프랑스 왕국 생 말로
사망 1848년 7월 4일 (향년 79세)
프랑스 제2공화국 파리
사상 전통적 보수주의, 군주주의
정당 초왕당파
종교 가톨릭무종교(무신론)가톨릭
배우자 셀레스테 뷔송 드 라 비녜
(1772년생, 1792년 결혼, 1847년 사별)

1. 개요2. 인생3. 저술 활동4. 한국어 번역서5. 여담

[clearfix]

1. 개요

프랑스의 불문학 작가이자 전기 작가, 정치인이다. 프랑스 낭만주의의 선구자이자 불문학에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하나로 거론되고 있다.

피에르-시몽 발랑슈와 함께 19세기 전반의 가장 위대한 왕당파 지식인이자 문학가로 거론된다.[1]

2. 인생

1768년 9월 4일 생 말로에서 11세기 때부터 이어진 명문 귀족가문 브르타뉴 샤토브리앙 가문의 둘째 아들[2]로 태어나 시종들에 의해 키워지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살았다.

프랑스 혁명의 초기에 아메리카로 여행을 가고 "아탈라"와 "아메리카 여행기" 등을 출판한다.

처음에는 자유주의적 성향에 근거하여 프랑스 혁명을 긍정적으로 보았으나 혁명 세력이 귀족 척결을 목표로 하면서 형이 처형당하고 본인 역시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자 이때부터 평생 혁명에 부정적이었고, 1792년 프랑스 혁명전쟁 와중 왕당파 군대에 참가해 혁명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고 부상을 입자 영국으로 피난을 갔다. 이때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앙으로 회심하게 되었고, 번역과 저술 일을 하며 생계를 근근히 이어나간다. 1800년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해외로 추방된 귀족들에 대해 대거 사면령을 단행하자 프랑스로 돌아가 문학 비평 잡지를 편집하는 일을 한다. 1802년에는 가톨릭 신앙에 대한 변증서인 <기독교의 정수>를 출간했다. 이후 나폴레옹으로부터 교황청 주재 프랑스 대사관에 임명되었으나, 나폴레옹이 루이16세의 사촌인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을 처형할 것을 명령하자 실망해 직을 내던졌다. 1806년부터 1807년까지 그리스, 오스만, 이집트, 스페인과 북아프리카를 여행해 그 기억을 "파리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정"에서 회고한다.

프랑스로 돌아온 이후에는 강경한 반 나폴레옹주의자로서, 나폴레옹을 네로에 비유해 비난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결국 파리에서 추방되고, 이후 자기 영지로 돌아가 조용한 생활을 보낸다. 이후 나폴레옹이 쫒겨났다가 다시 복위하자, 다시 한번 나폴레옹을 비난하는 책자를 썼고 그 직후 루이 18세와 함께 백일천하 동안 겐트로 망명했다.

이후 부르봉 왕정복고 시절에는 프랑스로 다시 돌아와 왕정주의자로써 활동했다. 귀족 출신인데다 프랑스 혁명으로 형이 처형되어서 왕당파 성향이 강하게 생긴 것으로 보인다. 복고 직후 내무장관으로 임명되기도 했으나, 1815년 총선에서 강경한 초왕당파가 압승을 거뒀을 때 루이 18세가 정치적 부담을 느끼고 의회를 바로 해산해 버리자 이를 비난하는 바람에 내무장관 직을 잃고 만다. 이후 1820년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의 암살 여파로 총선에서 초왕당파가 다시 압승을 거두자 루이 18세를 다시 지지하기 시작해, 긴 외국 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차례 외교관으로 파견되었다. 1822년부터 1824년까지는 루이 18세 휘하에서 외교부 장관의 직책을 맡았었다. 그러나 1824년 총선의 결과로 온건 보수파 내각이 성립되자 직에서 물러났다. 1815년부터 1830년까지, 즉 왕정복고의 처음부터 끝까지 상원의원이었으며, 1828년부터 29년까지 교황청 주재 대사를 맡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적이었으나 사회적으로는 개방된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혁명에 대한 에세이, 기독교의 정수, 그의 저작물들은 대부분 그의 강경 왕정주의자로써의 면모를 보여준다.

3. 저술 활동

혁명에 대한 에세이1796년
아탈라1801년
기독교의 정수 1802년
르네1802년
파리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정1811년
보나파르트부르봉에 대하여1814년
베리 공작의 생애에 대한 회고록1820년
나체즈 족[3]1826년
마지막 아벵세라지인(Abencérage)의 모험1826년
미국 여행기1827년
역사 연구1831년
베리 공작부인의 감금 사건에 대한 회고1833년
랑세의 생애1844년
무덤 너머의 회상1849년

4. 한국어 번역서

  • 아딸라-르네 마지막 아벵세라지인의 모험, 신곽균 옮김, 새미, 2006
  • 샤토브리앙:생말로에서 생말로까지[4], 신용우 옮김, 책과나무, 2018
  • 랑세의 생애, 신용우 옮김, 책과나무, 2023

5. 여담

그의 이름을 딴 샤토브리앙 스테이크가 유명하다.


[1] 둘 모두 어린 시절 프랑스 혁명 당시의 충격적 경험으로 인해 평생을 혁명을 증오하게 되었다는 점도 동일하다[2] 첫째인 형 장 바티스트 오귀스트(1759 ~ 1794)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콤부르(Comburg) 백작이 되었지만 프랑스 혁명기에 단두대에 처형되었다.[3] 빅토르 위고가 이 책을 읽고 '샤토브리앙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당시의 위고는 그랬으나 후대에 들어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 빅토르 위고의 모습으로 변했다. 샤토브리앙이 18세기 말~19세기 초 보수주의 문인의 상징이었다면 위고는 19세기 친서민 친빈민 문인의 상징일 정도.[4] 무덤 너머의 회상 편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