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6 06:22:16

프리드리히 리스트

1. 개요

독일의 역사학파 경제학자. 리스트가 활동하던 당시 독일의 공업은 발전이 뒤떨어져 있었다. 리스트가 망명하여 잠깐 지낸 적이 있던 미국의 공업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독일에서는 농산물 수출을 주도하고 있었던 융커, 즉 대농장주들은 자유무역을 주장했다. 영국에 농산물을 수출하고 공산품을 수입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 신흥자본가들은 국내거래에서는 지방국가들 간의 관세 폐지 등 자유거래를 추구했지만 대외적으로는 보호무역을 요구했다. 리스트는 이러한 독일 토착자본가의 요구를 이론으로 뒷받침하려고 하였다.[1]

2. 생애

1789년 남부 독일 뷔르텐베르그주의 수도 로이틀링겐에서 피혁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1817년에 튀빙겐대학 정치행정학 교수가 되었고, 그 후 독일 자본가들의 조직인 ‘상공업동맹’의 법률고문으로 일했다. 1821년에 유권자들 명의를 사칭하여 의회에 제출한 청원서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유죄판결을 받았고, 1825년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미국에서는 해밀턴의 보호무역에 공감하고 교류하면서 보호무역 논쟁을 주도했다. 1832년 귀국했으나 또다시 박해를 받아 1837년에 파리로 망명했다. 1841년에 주저,『정치경제학의 국민적 체계』를 저술했다.

3. 주장

리스트는 경제이론과 경제정책의 목표를 생산력을 중심으로 한 국민경제의 자립에 두었다. 그는 부를 많이 가지고 있더라도 소비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는 힘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결국 더 가난해질 것이므로, 부를 생산하는 힘이 부 자체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했다. 생산력에는 개인적, 자연적, 사회적, 정치적, 물적 생산력이 있는데 물적 생산력 중에서 공업생산력을 가장 기초적인 것으로 보았다. 전체 경제의 기반이고, 정치적 독립과 문화적 발전의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리스트는 생산력을 키우는 방법으로서 국내적으로는 관세동맹을 통해 통일적이고 자유로운 국내시장을 창출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보호무역을 주장했다. 자유무역이론은 앞선 공업국인 영국이 다른 나라가 자신을 본받지 못하도록 하는 데 악용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어떤 사람이 정상에 도달했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서 자기를 따라 올라올 수단을 빼앗기 위해 자기가 올라온 사다리를 차버리는 것은 매우 흔히 사용되는 교활한 책략이다.”

리스트는 일반적으로 경제발전은 목축단계, 농업단계, 농공업단계, 농공상업단계를 거치게 되며 각국은 경제발전단계가 다르다고 했다. 뒤에 따라오는 나라는 앞선 국가를 따라잡은 후에야 자유무역에 찬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유아기의 산업이 힘을 키운 후에 자유무역세계의 싸움에 내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리스트의 보호무역 이론은 선진국 중 독일, 미국, 일본 등 후발 선진국의 공업화를 위한 이론으로 정립되었지만 2차대전 후 개발도상국의 공업화를 위한 보호무역의 필요성과 정당성도 뒷받침해주었다. 많은 개발경제학자들은 개도국에 대한 보호무역의 필요성에 동의했다. 그리고 보호무역 논리는 농업과 문화산업 등 식량안보와 같은 특수한 기능을 갖고 있거나 다양성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분야에도 응용될 수 있었다.

4. 한국과의 관련성

박정희 시절 대한민국 정부와 학계가 밀어주던 학자이다. 한국과 타이완 관련 전문가인 Robert Wade는 박정희 시절 한국의 서점가에 가면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저서가 앞쪽 서가에 놓여있었다고 한다. 그 시절이나 현재 그가 서구권에서 듣보잡 취급을 받는 것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위상이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How asia works를 쓴 Joe Studwell은 한국이 자유무역과 시장개방을 추구하는 IMF와 세계은행의 주장을 따르는 대신 일본의 만주국 개발계획과 리스트의 주장을 따른 것이 한국 경제개발 성공의 주된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1] 출처: 고등학교 국제 경제 교과서(부산광역시교육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