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성악가 프리츠 분덜리히 Friedrich "Fritz" Karl Otto Wunderlich | |
출생 | 1930년 9월 26일 |
바이마르 공화국 쿠셀 | |
사망 | 1966년 9월 17일 (향년 35세) |
서독 하이델부르크 대학 병원 | |
사인 | 실족사 |
직업 | 성악가 |
성부 | 테너 |
활동 기간 | 1950년 ~ 1966년 |
[clearfix]
1. 개요
독일 출신의 리릭 테너로 모차르트 작품과 리트(lieder. 독일어 예술 가곡)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불과 35살의 나이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1]2. 생애
1930년 9월 26일 라인란트-팔츠 지역의 도시 쿠셀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바이올린 연주가였고 아버지는 지방 합창단을 지휘했다. 잠시 동안 분덜리히 일가는 여관(inn)을 운영하기도 했다. 프리츠의 아버지는 나치의 압력으로 직업을 잃은 데다가 전쟁(1차대전) 중 입은 부상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결국 아버지는 프리츠가 다섯살일 때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소년시절 빵집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이웃과 빵집을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그의 음악적 재능과 아름다운 목소리에 대해 이야기해서 음악 공부를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프라이부르크 음악 아카데미에서 장학금을 받으면서 호른과 성악을 공부했다.
졸업한 후에는 슈투트가르트의 뷔르템베르그 국립가극장에 취업했다. 배역이 없을 때는 알바로 가극장 오케스트라의 4번 호른을 맡기도 했다.
분덜리히는 곧 재능있는 - 특히 모차르트 작품을 잘 소화하는 - 젊은 테너로 알려졌고, 곧 독일 전역에 그 명성이 퍼져나갔다. 20대가 지나기 전인 50년대말 이미 독일의 여러 가극장에서 모차르트 작품을 중심으로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나중에는 리릭 테너의 레퍼토리 전반으로 확대된다. 30세 무렵인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최고의 무대인 바이에른 국립가극장과 빈 국립가극장, 잘츠부르트 페스티벌 등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60년대 초부터 카라얀, 칼 뵘 등 당시 독일에서 활동하던 최고의 지휘자들과도 함께 공연하기 시작했고, 곧 마에스트로들이 가장 아끼는 테너가 되었다.
또 바로크 및 고전주의 종교음악에도 자주 출연하게 되었다.
또 오페라의 명성을 바탕으로 슈베르트, 슈만 등 독일 리트(가곡)을 취입하기 시작했고, 여러 전설적인 가곡 녹음을 남기게 되었다.
전형적인 리릭 테너로 간주되기 때문에 독일 오페라의 중요한 한 축을 맡고 있는 바그너의 헬덴 테너 영역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분덜리히는 모차르트 오페라와 리트 종교음악에서 본인이 성취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탄호이저,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의 작품에서 비중이 크지 않는 조연/단역을 맡아 노래하기도 했다.
1964년에는 말러의 대지의 노래를 처음 공연했고, 얼마 후 오토 클렘페러의 지휘로 동곡을 녹음하여 호평을 받았다. 주로 유명 헬덴테너들이 많이 부르는 곡인 만큼 향후 분덜리히의 헬덴테너로 도전 가능성에 대해서도 기대하는 평론을 얻기도 했다.
3. 레코딩
분덜리히가 활동할 당시에 독일의 극장에서는 오페라를 원어 대신 독일어로 연주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따라서 리골레토, 돈 카를로스 등 그가 남긴 오페라 녹음 중 대부분이 독일어로 부른 것이다. 분덜리히는 특히 독일어 레퍼토리를 잘 불렀고, 카를 뵘이 지휘한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녹음에서 타미노 왕자의 배역을 맡아[2] 평론가들로부터 절찬을 받는다.타미노 왕자의 아리아 'Dies Bildnis ist bezaubernd schön'
분덜리히의 크리스탈처럼 투명한 목소리와 또렷한 발음, 지적이며 절제된 해석은 피아니스트 후베르트 기젠과 함께 슈베르트와 슈만의 독일가곡을 인상깊게 연주하게 된다. 그가 연주한 슈만의 시인의사랑은 이 장르의 황금과도 같은 표준으로 남아 있고, 수많은 테너들이 그의 해석을 따르고 있다.
로베르트 슈만 '시인의 사랑'
루트비히 판 베토벤 '아델라이데'
맑고 고운 음색으로 감미로운 노래를 잘 소화했지만 그렇다고 파워풀한 노래를 못 부른 것도 아니다. 다짜고짜 B flat 으로 질러주고 마무리는 Hi C 로 끝나는 '그라나다(Granda)' 를 들어보자.
그가 남긴 다른 유명한 레코딩으로 칼 리히터가 지휘한 바하의 성탄절 오라토리오가 있다. 슈츠, 텔레만, 북스테후드 등 바하 이전의 성가도 녹음했고, 크리스타 루드비히와 함께 오토 클렘페러가 지휘하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구스타프 말러의 대지의 노래[3]를 녹음했다.
사망 직전에는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하이든의 천지창조를 녹음하고 있었다. 아리아는 모두 녹음했지만 레시타티브는 아직 녹음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그의 죽음으로 나머지 부분은 베르너 크렌이 기용되어 녹음되었다. 그래도 분덜리히가 카라얀 지휘 하에 부른 실황공연 몇 개는 남아있다. 천지창조도 카라얀과 빈 필하모닉의 전곡 실황이 남아있다.
4. 갑작스러운 죽음
1966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에서 노래했으나, 2주 후 그의 미래가 보장된 거나 다름없는 커리어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끝나고 만다. 분덜리히의 취미는 자동차, 총, 사냥으로 휴가 겸 친구의 시골 별장으로 사냥 여행을 떠났는데, 계단에서 굴러떨어졌고[4] 하이델베르크 대학 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끝내 숨을 거두었다. 그의 무덤은 뮌헨의 발트프리드호프 묘지에 있다.38살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테너 마리오 란자(1921~1959)등과 함께 20세기에 안타깝게 요절한 명가수 중 한명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