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피털루 학살(Peterloo massacre)은 1819년 8월 16일 잉글랜드 맨체스터의 성 피터 광장(St. Peter's Fields)에서 영국군 기병대가 의회 체제 개혁을 요구하는 집회를 하던 비무장 시위대에게 돌격하여 18명을 죽이고 400~700여 명을 다치게 한 사건이다. 이름의 명칭은 아서 웰즐리의 대표적인 전적인 워털루 전투를 비꼬아 피터-루라고 부르는데서 비롯되었다.2. 전개
당시는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직후로, 영국은 오랜 전쟁을 치르며 물가가 상승한 상태였다. 이에 영국 부르주아 계층은 물가를 정상화(하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영국 지주계층은 곡물 물가만큼은 유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이를 둘 다 받아들였고, 결국 서민층의 임금은 이전의 1/3 혹은 그 이하수준으로 하락했지만 곡물값은 유지되었다(곡물법 참고). 당시 영국의 의회정치는 한 선거구의 투표권자가 10명인 곳 등 소수의 부자만이 투표할 수 있었으므로 서민층의 의견은 반영되지 못했기에 '곡물법 폐지'와 '보통선거권'은 서민의 생존권 보장이나 다름없었다.맨체스터와 인근지역은 영국을 대표하는 공업지대였으므로, 이러한 조치에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조치에 반대하는 집회를 조직한 것은 현지 붓 수공업자이자 급진적 신문인 <맨체스터 옵서버(Manchester Observer)>의 창간인 중 한 명인 조지프 존슨(Joseph Johnson)이었다. 지역 면직물 수공업자이자 개혁가인 존 나이트(John Knight)와 <맨체스터 옵서버>의 편집장 존 새커 색스턴(John Thacker Saxton)도 집회 조직에 참여했다. 1817년 맨체스터 인근의 세인트 피터 광장에 모인 5000명의 시위대는 평화롭게 해산했다. 그러나 이들의 지도자들은 체포되어 당시 영국에서 보장되던 인신보호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구금되었고, 정부는 시위대의 목소리를 묵살했다. 결국 상황이 악화되는데 지친 시민들이 점차 시위에 가담했고, 결국 1819년 8월에는 6만명[1]의 시위대가 세인트 피터 광장에 집결했고, 이들중엔 '곡물법 폐지', '보통 선거권', '투표용지 사용'[2] 등의 현수막을 든 이들도 많았다. 특기할 점은 이 시위를 주도한 이들이 멋쟁이(best dressed) 파벌이었다는 것이고 이들은 금주, 절제, 비폭력을 모토로 내세웠다. 쉽게 말해 '술 먹고 봉기를 일으킨 천것들'이 아니라 좋은 옷을 입은 시민들의 합법적인 평화시위를 천명한 것이다.
이에 당국은 제15경기병연대, 맨체스터-살포드 의용기병대, 기타 흉갑기병대, 보병대와 포병대가 포함된 군대를 파견했다. 연설이 시작되자 현지 치안판사 윌리엄 헐튼은 '나는 그들의 시민권이 공중도덕을 유지하는 데 부적합하다고 판단합니다. 즉시 행동하십시오'라는 쪽지를 군부대에게 보냈고 연사들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반란분자들의 시민권은 무시하고 싹 죽여 버리라는 명령이었다. 참고로 헐튼은 치안판사인 동시에 지주이며 탄광 소유자이기도 했으니, 정부 조치의 최대 수혜자이기도 했다.[3]
영장을 집행하려던 경찰은 군중의 저항에 부딪혔고 이내 싸움이 벌어졌다. 바로 이때 요맨리 기병대가 군중을 향해 돌격했다. 최초의 사망자는 2살배기 아기 윌리엄 필즈와 아기를 안고 있던 어머니 앤 필즈(Anne fileds)였다. 그 짧은 아비규환 속에서 11명이 죽고 6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중상자중에 사망하는 자들이 추가되어, 사망자는 조산으로 산모와 함께 사망한 아이를 포함 총 18명으로 늘어났다. 사망자들의 대부분은 기병대의 말발굽에 밟히거나 칼을 맞아 사망했다. <맨체스터 옵서버>는 이 사건을 '피털루 학살(Peterloo Massacre)[4]'이라고 불렀다. 로버트 젠킨슨 내각은 '피털루'라는 표현을 만든 맨체스터 옵저버의 편집장을 체포해 구속했다.[5]
하지만 이 조치에 대한 불만을 잠재울 수 없어서, 이에 반대하는 시위는 전국적으로 번져나갔고, 1821년에는 광업지대인 슈롭셔의 콜브룩데일이라는 지역 광부들이 신더스(Cinders) 언덕에서 시위를 벌였는데, 이번에는 요먼리 기병대가 총격을 가해 시위대에 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시위 주동자들은 체포되어 그중 한 명이 교수형을 당했다. 시민들은 이를 '신덜루'라고 비꼬았다.
결국 곡물법은 1846년에 가서야 폐지되었다.[6] 참고로 1846년이면 아일랜드 대기근이 한창인 시절이다. 한마디로 사람들이 수십만명씩 굶어죽는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야 곡물 수입물가를 낮췄다는 이야기. 1856년에는 학살현장에 곡물법 폐지를 기념하여 자유무역회관이라는 건물이 세워졌으나, 이후로도 영국정부는 이 사건의 피해자와 그 책임을 공식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회피했으며, 결국 2007년에 가서야 맨체스터 시의회에 의해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진 명판이 학살현장에 설치됐다.
"1819년 8월 16일, 남성, 여성, 어린이를 포함해 60,000명의 민주화 개혁가들이 모인 평화로운 집회가 무장 기병대의 공격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15명이 죽고, 600명이 넘게 다쳤다."
3. 여담
- 워털루 전투 참전용사출신으로 시위에 가담했던 존 리스는 이 경험을 워털루보다도 끔찍했다고 진술했다. 적국인 프랑스 군대와 싸운 워털루보다는 비무장한 자국의 민간인을 학살한 피털루가 더 끔찍하긴 했을 것이다.[7] 존 리스 역시 기병대의 칼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한달이 못되어 사망했다.
- 사망자들 중 일부는 시위대가 아니라 정부 측 특수경찰[8]이었는데, 대부분 이들을 시위대와 구별하지 못한 기병대의 돌격에 휘말려 죽었다.
[1] 연구자들에 따라 다르나 최소 3만명, 최대 15만으로 추산한다.[2] 1819년에는 공개투표를 하던 터라 비밀 선거를 요구하는 구호였다.[3] 또한 치안판사인 주제에 대놓고 범법자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회사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에게 임금으로 현금이 아닌 상품권을 지급했는데, 이는 당시 영국에서 불법이었기 때문. 참고로 해당 상품권은 그가 경영하던 상점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상품권이었다.[4] 성 피터 광장과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를 합성해 만든 표현[5] 아서 웰즐리는 피털루 학살이 벌어진 9년 후에야 수상으로 취임했고, 막 정치에 입문한 상태였기에 억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경 우파 이미지에 딱 알맞는 이름이었기에(...)[6] 참고로 이를 주도한 사람이 존 러셀 백작으로, 유명한 수학자, 철학자 겸 평화운동가로 노벨문학상을 탄 버트런드 러셀의 할아버지다.[7] 5.18 민주화운동 때도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가 "나는 월남에서 베트콩도 죽여봤지만 저렇게 사람을 죽이는 놈들은 처음 보았다"고 울분을 토한 사례가 있다.[8] 이름은 특수경찰(Special Constabulary)이지만, 자치 혹은 보조경찰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