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하비 콕스 Harvey Cox | |
본명 | 하비 갤러거 콕스 주니어 Harvey Gallagher Cox Jr. |
출생 | 1929년 5월 19일 ([age(1929-05-19)]세) |
미국 펜실베이니아 피닉스빌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학사) 예일 대학교 (석사) 하버드 대학교 (박사) |
종교 | 개신교 ,(침례회), |
직업 | 목사, 신학자, 사회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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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침례교 목사이자, 신학자, 사회운동가이다. 그 자신은 개신교의 목사였지만, 그의 신학 이론은 남아메리카의 가톨릭계에서 해방신학이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를 불러왔고, 종교를 넘어서 흑인 민권 운동같은 미국 내의 여러 사회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며, 사실상 미국의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인물들 중의 하나로서 큰 명성을 얻고있다. 개신교 교회가 자본주의에 물들어 기업화되는 것을 경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2. 생애
1929년에 펜실베이니아 주의 피닉스빌에서 태어났다. 1951년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받은 후, 1955년에는 예일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1963년에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57년에 침례교 목사 안수를 받았다.1965년에는 그에게 기독교 신학자이자 사회운동가로서의 불멸의 명성을 안겨준 저서인 《세속도시》를 집필하여 출판하였으며, 당시에 활발하게 일어났던 흑인 민권 운동에 참여했다. 같은 해부터 1969년까지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연구를 했다. 이때의 연구에서 콕스는 미국 개신교계에서 만연해있던 교회의 기업화로 인한 각종 부패상과, 사회문제에 대해 외면하는 태도를 맹렬히 비판했고, 이는 당시 남아메리카의 가톨릭계에서 각광받고 있던 해방신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1962년부터 1963년까지는 서독의 서베를린에 거주하면서 동독에 있던 개신교 교회들과 하버드 대학교 간의 연락을 주선하는 업무를 했고, 미국으로 귀국한 뒤에는 흑인 민권 운동에 참여하고자 보스턴의 흑인 거주지역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3. 신학 이론
하비 콕스의 신학은 종교계의 세속화로 압축해서 설명이 가능하다. 당시 미국의 보수적인 개신교 신학자들은 점차로 금욕주의적이고 공동체주의적인 부분이 퇴색하는 것에 대해 큰 우려를 했는데, 하비 콕스는 자신의 저서인 세속도시를 통해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개인주의와 세속주의의 확산을 자유주의와 진보주의가 자라나는 근본이 된다고 보아서 오히려 긍정했고, 되려 속세와 유리되는 경향이 교회의 발전에 악영향을 끼친다며 비판을 했다.또, 성서무오설에 근거해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비판했고, 개인이 종교의 교리에 집착하여 얽매이는 것도 부정적으로 여겼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개신교 자체의 종교 개혁이 필요하다고 보았는데, 이 개혁은 교회 내부의 변화로만 그치지않고 세속사회와 교회 간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수준으로, 더욱 급진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때문에 개인이나 교회가 세속사회를 무시한 채 영적인 영역에만 기대는 것을 반대하고, 모든 신학적 담론은 현실 세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4. 저서
- 《세속도시》
- 《예수 하버드에 오다》
- 《종교의 미래》
- 《신이 된 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