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한기동(韓基東) |
생몰 | 1898년 3월 13일 ~ 1997년 7월 29일 |
출생지 | 평안남도 평양시 |
사망지 | 충청남도 서산군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한기동은 1898년 3월 13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장단군 진남면으로 이사갔고, 1919년 3.1 운동이 전국에서 벌어지자 진남면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심했다. 3월 26일 밤, 그는 장단군의 이창영(李昶永)·정순만(鄭順萬)·백태산(白泰山)·이성구(李成九)·양세영(梁世瑛) 등 100여명의 군중들과 함께 동장리(東場里)에 있는 사립 성화학교(聖化學校)를 출발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부근 일대를 시위 행진했다. 이후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하던 그는 3.1 운동 직후 전협·최익환(崔益煥)이 조직한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여 조직책을 맡았다. 그는 김가진, 전협, 정남용·송세호·이을규(李乙奎) 등과 함께 의친왕을 상하이로 망명시켜 망명정부를 세우고 제2의 독립만세시위를 추진하기로 계획했다.1919년 10월 김가진이 먼저 상하이로 떠난 후, 그는 11월 9일 전협의 지시에 따라 정남용, 송세호, 이을규 등과 함께 의친왕을 수행하여 상하이로 출발하기로 했다. 이들은 11월 11일 수색역을 출발해 간도 안동현으로 향했다. 한기동은 중간 상황을 전협에게 보고하기 위해 개성에서 하차하여 서울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의친왕 망명 계획은 사전에 일본 경찰에 탐지되고 말았고, 결국 의친왕 일행은 안동역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경찰의 추적을 받은 끝에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출판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뒤 1922년 8월 15일에 출옥했다.
[1]
이후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조용히 지내던 그는 8.15 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6.25 전쟁 발발 후 충청남도 서산군으로 피난해 그곳에 정착했으며, 1997년 7월 2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한기동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90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