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8 01:24:48

한스 악셀 폰 페르센


<colbgcolor=#CDC5BD><colcolor=#000000> 한스 악셀 폰 페르센
Hans Axel von Fersen
파일:Hans_Axel_von_Fersen.jpg
이름 한스 악셀 폰 페르센[1]
(Hans Axel von Fersen)
출생 1755년 9월 4일
스웨덴 왕국 스톡홀름
사망 1810년 6월 20일 (향년 54세)
스웨덴 왕국 스톡홀름
아버지 프레드리크 악셀 폰 페르센 백작
어머니 헤드비그 카타리나 드 라 가르디에
형제 헤드비그, 소피아, 파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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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웨덴귀족. 생전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염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2. 생애

그는 프랑스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불륜상대이자 조력자로서 세상에 그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첫눈에 반한 운명적인 사랑은 아니었고, 과연 육체적 관계가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나, 왕비와 페르센 사이에는 깊은 정신적 사랑이 있었다는 증거가 많이 남아 있다. 특히 페르센은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어머니이자 왕비라고 언급했다. 어쨌든 당시 프랑스 내에서도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소문은 공공연했던 것으로 보인다. 페르센은 염문을 피하고 또 경력을 쌓기 위해 프랑스군에 입대한 후 참전하는 등 베르사유에서 떠나있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다시 돌아온다.

페르센은 프랑스 혁명 발발 이후 철저히 왕당파[2]로의 소임을 지켰다. 페르센은 상당한 위험을 무릅쓰고 국내외적으로 고립된 루이 16세 일가에게 지원을 했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가 주도했고 페르센이 도왔던 바렌 사건은 실패하고, 페르센이 프랑스 국외에서 왕가를 지키려고 시도했던 모든 노력들 역시 실패로 끝났다. 결국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형당한다.

이를 브뤼셀에서 전해듣고는 크게 슬퍼하고 절망한[3] 페르센은 본국으로 돌아가 정치가가 되었다. 그는 민중에게 잔인한 태도를 취했고 그로 인해 신망을 잃었다. 또 루이 16세 부부의 마지막 남은 후손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가 포로 교환으로 프랑스에서 풀려나자 재산을 어느 정도 찾도록 도와주기도 했다고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받은 편지 관련은 2021년 11월 7일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기사

1810년 스웨덴 왕태자가 갑자기 사망하자 페르센이 왕태자를 독살했다는 루머가 널리 퍼졌는데, 그에 개의치 않고 장례식에 참석하려 거리로 나섰다가 분노한 민중들 중 선원인 오토 요한 텐더펠트에게 살해당했다. 그가 살해당한 6월 20일은 실패한 바렌 도주사건이 일어났던 날이기도 했다. 사후 오해가 풀렸으며 페르센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진다.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영향으로 흔히 미남으로 인식한다. 실제로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초상화에서도 이목구비가 뚜렷한데, 당대에도 그가 워낙 미남이라 어디에서나 인기가 많았다는 기록이 여럿 남아있다.

3. 대중매체

3.1. 베르사유의 장미

항목 참조.

3.2. 타임 프린세스

게임 타임 프린세스의 '마리 왕비' 편의 주요 인물 중 하나로 나온다.

실존인물을 바탕으로 재구성되면서도 베르사유의 장미의 페르젠에서 약간의 영향을 받았는지 마리 앙투아네트를 연모하면서도 충성을 바치는 인물로 나온다.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행보가 바뀐다.

3.3. 이노센트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순정남으로 그녀의 남편 루이 16세의 질투를 사기도 한다. 2부의 주인공인 마리 조셉 상송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냉혹한 현실을 일깨어주고 진심 어린 조언을 하는 캐릭터라면, 페르젠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죽는 그 순간까지 낙원이라는 환상에 깨어나지 못하도록 온실 속 화초로 살게 만든 캐릭터다. 이런 페르젠의 행동으로 인해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의 불안한 형국을 바로 보지 못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며 현실도피만 하다가 결국 모든 걸 잃고 단두대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이때문에 마리 조셉 상송도 페르젠을 가리켜 마리 앙투아네트의 정신적 성장을 막았다고 까고 일국의 왕비를 환상 속에서 죽게 만들었다고 경멸한다.

[1] 흔히 베르사유의 장미의 영향으로 페르 백작으로 알려져있지만, 페르센 백작은 독일계이긴 해도 엄연히 스웨덴 국적이었기 때문에 엄밀히는 한스 악셀 폰 페르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2] 당시 유럽 각국들의 왕실은 프랑스 혁명을 자신들에 대한 위협으로 느꼈으므로 외국인이 프랑스 왕실을 도왔다고 이상하게 볼 수만은 없다.[3] 얼마나 슬퍼했는지 누이에게 보내는 편지에 마리 앙투아네트를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였고 사랑하지 않는 순간이 한순간도 없었으며 내 모든 것을 다 바쳐 깊이 사랑했고 수천 번이라도 내 목숨과 바꿀 수 있었던 여인'이라고 표현하면서 어떻게 살지 모르겠고 그녀의 곁에서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 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