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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트 한슬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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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e0e0e0> 에두아르트 한슬리크
Eduard Hanslick
파일:한슬리크.jpg
이름 에두아르트 한슬리크(Eduard Hanslick)
출생 1825년 9월 11일
체코 프라하
사망 1904년 8월 6일 (향년 78세)
오스트리아 바덴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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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빈 대학교[1] (법학)
직업 음악 사학자, 음악 평론가

1. 개요2. 생애3. 비평 활동
3.1. 저서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Vom Musikalisch-Schönen)》에서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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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빈_대학.jpg[2]

에두아르트 한슬리크(Eduard Hanslick)는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의 음악 비평가이자 음악사학자로, 서구 근대 음악 미학의 중요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19세기 후반 당시 음악계에 커다란 파장을 준 저서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Vom Musikalisch-Schönen)》[3]를 통해 음악의 형식주의적 접근 방식을 제시하고, 음악 비평에서 감정 표현보다는 음악의 구조와 형식에 중점을 두어 음악 비평의 방향을 혁신적으로 이끌었다. 또한 기존의 음악 미학을 미학 일반의 문제에서 독립된 하나의 학문으로 발전시켰다.

2. 생애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는 1825년 9월 11일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고, 음악을 전공하기 위해 으로 이주하여 학문을 쌓았다. 1844년부터 음악 비평을 시작하며 음악에 대한 열정을 지속적으로 표현했다. 1849년에는 빈 대학교에서 법학을 학습하고 학위를 취득했지만, 법학보다는 음악에 대한 열정이 그를 이끌어 음악사학과 비평의 분야로 깊이 들어가게 되었다. 1861년부터는 빈 대학에서 ‘음악의 역사와 미학’ 교수로 임명되어, 대학에서 최초로 음악 미학과 음악사를 강의하며 학문적인 입지를 다졌다. 한슬리크는 음악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중요한 학자로, 그의 학문적 기여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음악 이론과 미학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3. 비평 활동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는 음악 비평가로서 그가 남긴 작품과 사상으로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음악의 미학적 본질을 감정 표현보다는 음악 그 자체의 형식과 구조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Vom Musikalisch-Schönen)》에서는 음악의 본질이 감정 표현이나 감동을 주는 데 있지 않고, 오직 음악적 형식과 그 자체의 미학적 가치에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음악 비평에서 감정적인 해석을 배제하고, 음악의 객관적인 요소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슬리크는 당시의 주요 작곡가들에 대해 적극적인 비평을 남겼다. 그는 리하르트 바그너안톤 브루크너의 음악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바그너의 음악에서 나타나는 과도한 감정적 표현과 브루크너의 음악에서 느껴지는 지나치게 복잡한 구조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으며, 이러한 작곡가들이 감정적인 요소에 지나치게 의존한다고 보았다. 반면, 그는 요하네스 브람스의 음악을 높이 평가하며, 브람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엄격한 형식과 음악적 균형을 칭찬했다. 브람스의 음악은 한슬리크의 형식주의적 미학에 부합했기 때문에, 그는 브람스의 음악을 지지하며, 그의 작품이 음악의 본질을 잘 반영한다고 평가했다.

한슬리크의 비평 활동은 음악 비평에서 형식주의적 접근 방식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감정이나 개인적인 해석을 넘어 음악의 본질과 형식을 분석하고, 음악을 미학적으로 평가하는 방식을 제시했다. 이러한 형식주의적 관점은 후에 음악 비평의 기초로 자리잡았으며, 그가 제시한 미학적 접근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음악 이론과 비평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3.1. 저서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Vom Musikalisch-Schönen)》에서

그의 저서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는 음악의 본질과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며 큰 영향을 미쳤다. 한슬리크는 음악의 아름다움이 음악 자체의 형식구조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그는 음의 높낮이, 길이, 강약과 같은 음악적 요소들이 조화롭게 결합되어 만들어지는 형식미가 음악의 의미를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음악에 특정한 이야기나 내용을 부여하는 표제음악을 비판하며, 음악은 순수하고 자율적인 예술로 자유롭게 해석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특히, 한슬리크는 음악이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고 강조했으며, 음악은 감정을 환기시킬 수 있을 뿐 그 감정의 구체적인 내용을 특정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음악이 사람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단지 음악의 부차적인 효과라고 저술하며, 이는 음악의 본질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감정 표현에 중점을 두던 낭만주의적 음악관과 대조를 이루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주장은 음악 작품을 감상하고 해석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공하며, 형식주의 미학의 기초를 마련했다.

다만, 한슬리크의 견해는 모든 음악을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음악은 단순히 형식미에 그치지 않고, 청중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해석에 따라 더 넓은 의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4]

한슬리크의 사상은 고전주의 음악의 질서와 균형을 중시하는 경향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고전주의 음악 미학과 연결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독일 낭만주의 미학과도 교차하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특정 학파에 속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4. 여담

  • 한슬리크의 음악 형식주의는 중국 위나라죽림칠현의 일원이었던 혜강의 음악적 사상과 상당히 유사하다. 혜강은 ‘음악에는 애락이 없다(聲無哀樂)’라고 주장했는데[5], 이는 한슬리크의 음악 미학과 공통되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한슬리크는 음악을 순전히 감정에 대한 작용만으로 특정짓는 행위를 ‘사람들이 포도주에 취한 상태에서 포도주의 본질을 규명하려 하는 것과 같다.'라고 주장하였고, 혜강은 음악에 애락이 있다고 보는 것을 ’술이 사람을 기쁘거나 슬프게 한다고 술 자체에 그 속성이 있다고 보는 것과 같다.’라고 주장하였다. 이 둘이 고대 중국과 근대 유럽 사람이라는 상당한 차이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의 감정 이론의 본질에 대해 술로 비유한 것은 상당히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는데, 한슬리크는 아름다움에 대해 그 존재 자체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미의 내재성을 주장한 반면, 혜강은 아름다움은 사람이 인식하지 않으면 그 가치는 없는 것이라는 미의 외재성을 주장하였다. 또한 한슬리크는 음악이 자연의 음 요소의 외부에 있는, 순전히 인간이 창조하는 인위적이고 정신적인 예술이라고 주장한 반면, 혜강은 음악의 진정한 본질은 자연에 있고, 가장 이상적인 음악은 바로 자연의 순수한 음 요소에 있다고 저술하기도 했다.
  • 그의 음악적 형식주의 사상에 따라서, 음악의 본질을 희석하는 표제음악이나 성악을 비판하며 기악을 음악의 본질 가장 잘 표현하는 장르라고 주장했다.
  • 당시 새롭게 떠오르고 있던 생리학, 심리학 등의 분야를 중요하게 보면서 이를 음악이 인간에게 주는 생리적 효과에 과학적인 측면에서 연관시켰다.
  • 당시 예술 간의 우월성을 나누는 행위에 대해 비판하며 각 분야의 예술은 서로 치환될 수 없는 단독의 요소라고 주장했다.

[1] 이후에 '음악의 역사와 미학' 교수로서 재임한다.[2] 에두아르트 한슬리크가 '음악의 역사와 미학과' 교수로서 재임하고 있던 19세기 후반 무렵의 빈 대학교[3] 그의 가장 대표적인로 저서로, 오랜 시간동안 음악 미학을 지배하고 있던 감정 이론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를 통해 기존의 음악 미학이 탈바꿈하는 계기가 되었다.[4] 다만, 한슬리크는 이에 대해 일반의 병적 감상 혹은 잘못된 주관적 인식이라고 설명할 여지가 있다.[5] 성무애락론(聲無哀樂論), 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