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20:48:45

헌제귀인 동씨

獻帝貴人 董氏
(? ~ 200년)
1. 개요2. 정사3. 연의4. 평가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이자 동승의 딸로 헌제의 후궁. 기주 하간국 사람.

2. 정사

연의의 영향으로 귀비(貴妃)라는 직위로 알려져있지만, 정사에서는 동귀인(董貴人)이라고 적혀있다. 삼국지 시대에 귀비라는 품계는 존재하지 않았다.[1] 귀비는 당(唐)대 이후 창설된 후궁 품계였으며, 연의에서 이 인물이 귀비로 나오는 것은 나관중 당시의 영향력 및 인지도에 따른 작가의 개작이다. '귀인'이라 하면 후한 때는 '황후 바로 아래인 최고위 후궁'이었으나, 나관중 당대에는 '귀비'가 후궁 최고위 품계였고, '귀인'은 한참 급이 낮은 품계였으므로, 시대상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동귀인의 아버지 동승은 여러 사람과 힘을 모아 조조를 제거하려고 했다. 그러나 200년 정월에 계획이 발각되어 헌제 본인과 유비 세력을 제외한 모든 관련자들이 처형당했다.[2] 연좌제로 쿠데타 관련자들의 삼족이 멸해지는데 동귀인까지 죽음을 당하게 된다. 후한서 헌제복황후전에 따르면 이때 헌제가 그녀가 임신 중이라고 사정을 봐달라고 빌었지만 소용없었고 조조가 처형을 지시하여 결국 죽임을 당했다.

3. 연의

연의에는 귀인이 아닌 귀비로 나온다. 상술하였듯 나관중이 살던 원말명초에는 후궁 품계가 후한 말과 많이 달라져, 변화한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 시대에는 황후 바로 아래 최고위 후궁이 귀비였다.

나관중본에서는 정사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동승의 딸로 나오지만, 어째서인지 모종강본에서는 동승의 누이동생으로 설정이 바뀌었다. 그래서 동귀비가 동승의 누이동생이라고 잘못 알려졌는데 사서에서는 100% 공통적으로 동승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연의에서는 마등도 동승의 쿠데타에 가담했지만 서량에 있어서 잡지 못했다고 나오는데 마등이 여기에 참여한 것은 연의의 창작이다.

정사에서는 당시 동귀인이 임신 중이라는 언급만 나오지만, 연의에는 임신 5개월이었다고 기간까지 구체적으로 설정됐다.

정사에서 헌제가 조조에게 사정했다는 대사는 자세하게는 알 수 없으나, 연의에서는 헌제가 조조에게 사정하는 대사가 좀 더 자세하게 창작되었다. 헌제가 동귀비가 임신 중이라 사정하자 후환을 남기면 안된다고 조조가 무시하고, 최소한 출산할 때까지만 목숨을 붙여 달라고 다시 사정하자 지 어미의 복수를 할 아이를 남기면 안 된다고[3] 또 무시하고 그대로 죽였다.

4. 평가

황제의 후궁인데다 임신까지 한 여성을 죽인 것으로 조조의 잔혹함이 돋보이게 되며, 복황후의 죽음과 비슷하게 조조가 악역 이미지를 쌓는데 공헌(?)을 한다. 이는 조조가 한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없다는 대표적인 증거로 제시된다.[4] 조조빠인 이문열도 이 부분만큼은 이때의 조조가 지나치게 잔혹했음을 강조하려고 했다는 건 부인하기 힘들며 이 사건이 바로 그 증거라고 이야기했다. 확실히 임산부까지 죽인 사례는 조조급의 위정자들 중에서도 희귀한 케이스다. 물론 유사 사례는 조조 말고도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쳐도 조조가 너무 막나간건 맞는 게, 조조 수준으로 막나가지 않은 이들이 더 많은건 사실이고 위소왕은 자신이 죽인 가씨가 품고 있는 자식이 선황제인 금장종의 자식이 아니라는 명분이라도 내세웠고 풍석범도 전 군주인 정극장이 정씨가 아니라 이씨라는 주장이라도 내세웠다. 즉 명분따윈 개나 줘버린 조조가 이들보다 질이 더 나쁘다. 위소왕이나 풍석범이야 "그래도 우린 남에게 어지러운 황통/왕통을 바로잡았지 않냐."고 할 수라도 있지[5][6] 조조는 어떻게 해명할 수 있는가? 즉 위소왕, 풍석범과 비교하여 조조가 가진 문제점은 죽인 것 자체가 잔인하다는 점 외에도 군주의 자식을 가진 여인을, 그것도 명분도 전혀 없이 죽여버린데 있다. 차라리 명분이라도 내세우면 납득하고 따를 사람이라도 생기지 아무도 안 믿을지 모르나 명분 비스므리한 것도 안 내세우면 "그래서 왜 죽였는데?" 라고 물으면 할 말이 없어진다. 더군다나 헌제도 동씨의 목숨을 구하려고 애를 썼는데도 기어이 죽여버렸던 것도 마이너스 요소, 적어도 위소왕은 금장종 사후에나 저런 짓을 했고 풍석범도 군주를 시해했다는 다른 문제점이 있지만 대놓고 군주 앞에서 저런 짓은 안 했다. 거기다 위소왕은 황족이고 풍석범도 외척이기라도 했지 조조는 당시 그냥 권신 A였다.[7] 누가 봐도 잔인한데다가 명분도 없다고 느낄 수밖에, 조조도 딱히 명분같은걸 내세우지 않은걸 보면 본인도 명분 같은건 필요없다고 느낀 모양이지만...

다만 한황실에 대한 충정이 없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소모되나 진지하게 따지자면 반론의 여지가 있다. 조조가 욕을 먹게 될 것이 뻔한 이런 일을 한 이유는 전한, 후한을 막론하고 궁중암투에서 밀려난 왕자가 살아남아 훗날에 등극, 보복하거나 뒷일을 추궁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전한의 명군인 한문제부터가 후궁의 아들이 살아남아 여씨가 세운 소제를 살해하고 등극하였으며, 한무제의 증손자인 선제무고의 화로 할아버지부터 부모까지 전부 죽었지만 살아남아 훗날 제위에 오른다. 채륜의 죽음도 화제 시절 후궁 송귀인이 자살형을 받은 것을 말리지 않은 것을, 훗날 등극한 송귀인의 손자인 안제가 추궁했기 때문이다. 당시 궁중암투에서 이런 일이 잦았기 때문에 조조와 같은 현실정치가는 훗날을 위해서 동씨를 처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동씨를 살려줬다간 자신에게 있어서 반발세력인 동씨와 동씨가 낳은 아이가 헌제의 외척을 중심으로 반 조조 세력에 더 보탬이 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8] 게다가 저리 멀리 갈 것도 없이, 삼국지연의가 시작되는 시점인 영제의 건만 보더라도 본격적인 난세의 시작이 외척과 환관에 의해 이루어졌다.[9] 경험적으로 자신과 적대하는 외척의 존재에는 크게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 실제로도 조씨 정권은 친인척에게는 중요한 권력을 부여해 정권의 안정성을 도모하였으나,[10] 이와 반대로 외척은 배척하였다.

다만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위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현실정치가로서 당시 조조가 취할 수밖에 없는 행동은 이것뿐이었다는 반론일 뿐이지 "조조의 행동이 끔찍한 악행"이었던 것은 변함이 없다. 죽은 사람이 황제의 후궁이었다, 그 복중의 아이가 황제의 씨였다 하는 것을 모두 논외로 해도, 임신 중의 여성을 태아와 함께 살해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악행이 분명하다.[11] 사형수가 임신한 여성일 경우 출산 이후로 사형을 미루거나 사형을 감면해 주는 건 문화권을 막론하고 사형제도가 자리잡은 곳에서는 거의 모든 인류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다.[12][13] 그것도 황제의 자식이다. 이 정도면 당대의 위정자들에게 최소 나쁜놈 최대 역적이라 욕먹어도 할 말이 없다.[14]

반대로 보자면 조조가 외척 문제에 대해 얼마나 예민하게 반응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후한의 조정은 외척과 환관의 발호로 멸망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만큼 이 두 존재는 암적 존재였다. 실제로 조조-조비 시기에는 유달리 외척에 혹독했다. 후한이 외척환관의 발호로 망해버렸으니 이상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 쳐도 자신의 아내를 자결케 했을 정도의 조비의 행동을 보면 외척에 유달리 혹독했던건 변하지 않는다. 다만 조씨-하후씨 친인척은 적극적으로 권력에 이용한 조조와 다르게 조비 부터는 권력의 안정성 문제로 외척은 물론 조씨 친인척까지 어느정도 배척함에 따라 역으로 황제를 보호해 줄 세력이 약해져 위나라는 사마씨 가문에게 휘둘리다 멸망하였다. 그리고 이걸 지켜보다 위나라를 계승한 사마씨의 진나라는 반대로 외척, 황족의 권력을 크게 높였는데 그걸 원인으로 국가 멸망 테크트리를 타게 된다. 결과적으로 조조는 후한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대에도 욕을 먹을게 뻔하지만 외척을 박살낸 것이다.

하지만 '외척과 환관은 후한을 멸망에 이르게 한 두 암적 존재'라는 해석 역시 다른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후한삼국지 관련 문서에서 자주 설명되지만 외척과 환관의 균형은 오히려 전한+후한 400년간 한나라의 조정을 지탱한 두 기둥이었기 때문이다. 한나라는 당시의 기술적, 사회적 상황에서는 대단히 높은 수준의 중앙집권제를 구축하고 있는 국가였고 따라서 황제는 자기 개인에게 집중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자신의 손과 발이 되어줄 친위세력을 가져야 했다. 그리고 이 친위세력의 역할을 했던 것이 (잠재적 제위 경쟁자인 다른 황족들이 아닌) 오직 현재의 황제 개인에게만 충성할 것이라 여겨지던 외척, 또는 환관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외척과 환관이 조정 중앙권력의 두 축이 되어 번갈아 주도권을 잡으면서 서로를 견제하고, 호족+사대부 세력은 중앙권력의 주도권에서는 거리가 있지만 실무와 지방 장악력을 담당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한나라 권력구조의 균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후한 말의 심각한 위기상황은 이 권력 구조의 균형이 무너저서 발생한 일, 즉 환관 세력이 독주하여 제위 계승에까지 개입할 정도로 강력해지자 견제받지 않게 된 권력인 환관세력이 부패와 무능을 드러냄으로서 벌어진 현상이라 볼 수 있으며, 두무하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환관 세력의 독주가 일어나자 사대부+호족 세력과 연합하여 환관 세력을 억제하려 시도한 것은 다름아니라 군권을 가진 외척 세력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결국 환관 세력의 억제를 통한 권력 구조 균형의 회복에 실패하면서 한나라가 결국 최종적인 멸망국면에 접어들고 말았다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조는 후한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대에도 욕을 먹을게 뻔하지만 외척을 박살낸 것이다'식의 관점이 공정하다고 말할수는 없다. 한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조조의 득세는 외척의 발호보다 전혀 나을 것이 없는 권신의 발호이고, 권신인 조조가 한나라 황제의 권위와 영향력을 무력화한 끝에 그 아들인 조비가 결국 한나라 유씨의 제위를 찬탈하는데 성공했음을 보면 '왜 역대 한나라의 황제들은 고질적인 궁중암투의 가능성을 감수하면서까지 외척과 환관에게 권력의 중축을 맡겨 호족+사대부 세력을 억제하려 들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명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귀인 동씨+거기장군 동승이라는 외척 세력을 숙청한 조조의 정치적 행보는 자신의 세 딸을 헌제의 비로 들여보내는 것, 즉 권신인 조씨 가문이 외척의 입지까지 차지하여 자신의 권력기반을 더욱 강화하려는 것이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차라리 '아직 제위까지 선양받을 수 있을지 여부가 전혀 불투명한 상황(즉 유씨의 천하가 계속되고 조조와 그의 가문은 유씨의 신하로 남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현실 정치가이자 한나라의 권신이던 조조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자기 가문의 장래를 보장받기 위해 한 정치적 행동'이며 '도덕적으로는 큰 비판을 받을 행동이었지만, 조조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선택을 할 만한 동기가 있었다'고 설명한다면 이는 물론 합리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두고 '후한의 문제점을 알고 있던 조조가 (그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당대에도 비판을 받을 것을 감수하고 내린 결단'이라는 식으로 해석한다면 이는 지나치게 조조에게 유리하게 편향적으로 해석한 것이라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당대 조조의 행적에 대한 평가로 보더라도 지나친 미화이고, 무엇보다도 '외척과 환관은 한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암적 존재'라는 관점 자체가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단순한 관점이라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 멸망 직후 등장한 왕조들의 사례와 비교해도 이 점은 일목요연하다. 위나라와 진나라는 그 성립 과정에서부터 한나라의 청류파(반 환관 성향 사대부-호족)세력을 주요한 기반으로 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환관 및 외척세력의 영향력을 상당 부분 배제한 새로운 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위나라는 어리고 정통성이 부족한 황제가 즉위하자 호족-사대부 출신 권신의 출현을 전혀 막지 못하고 단반에 모든 실권을 빼앗기고 말았고, 그 뒤를 이은 진나라는 이를 반면교사삼아 다른 집안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것만은 피하려고 종친들에게 군사력과 영토를 나눠준 결과 종친들의 집단 반란에 휘말려 나라가 거덜난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나라 시대 중앙권력의 양대 축이었던 환관과 외척이 배제된 뒤 그 빈자리를 채우고 실권을 장악한 것은 사대부-호족 세력들이었다. 이를 그저 '환관과 외척이 후한을 멸망에 이르게 한 두 암종이다'라는 단편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 암적 존재들을 제거하고 드디어 문제점을 해결한 것처럼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그 결과는 역시 위진남북조 시대의 혼란기와 그 혼란기를 거치며 형성된 문벌귀족이라는 정치적 괴물이다. 대부분의 왕조국가에서 왕조의 가장 핵심적인 목표가 '왕조의 유지'임을 생각해 본다면 이 새로운 체제의 안정성은 오히려 한나라를 400년간 유지해온 체제보다 훨씬 부족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위-진이 구축한 신체제는 환관/외척의 영향력을 배제하였으나 이를 대체할 새로운 장치를 제시하지는 못하였고, 그것이 370년에 이르는 긴 혼란기가 도래한 원인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 따라서 일단 환관/외척을 덮어놓고 '후한의 멸망을 초래한 원흉'이라고 단정하는 관점 자체가 지나치게 편협한 것이고, 여기서 더 나가 조조가 이 문제점을 알았기에 당대에 욕을 먹더라도 외척을 박살내려 했다는 해석에 이르면 이는 지나친 조조 우상화라 보아야 할 수준이 된다.

무엇보다 황제의 아이를 임신한 여인을 그냥 살해했다는 점은 멀게 보면 조조, 정확히는 조씨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후일 조조의 아들이 황제가 되어 조위를 건국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미 조조가 저런 폭거를 저질러놓은 상태라는 것으로 그 말인즉슨 또다른 누군가가 이를 충실히 본받아 같은 짓을 되풀이하지 말란 법 없다. 설혹 조씨 황실에서 이를 두고 따지려고 해도 "너네 선조도 그렇게 해서 제위를 얻었는데 나라고 못할 거 있냐?" 라고 비웃으면 그만. 실제로도 유송을 건국한 유유가 선양한 황제인 사마덕문을 죽였는데 후일 유송의 마지막 황제인 유준이 소도성에게 선양을 한 뒤 소도성의 부하인 왕경칙에게 자신을 죽이려고 하냐고 하자 "나아가서 별궁에 계시게 될 뿐입니다. 선조께서 사마씨에게 이렇게 했습니다." 라는 대답을 들었다.[15] 그렇기에 조위가 멀쩡하던 시기인데도 사마사가 야심을 품은 것이나 조모가 몸소 사마씨를 가로막으려고 하자 가충이 아무렇지도 않게 조모를 죽여버린 것들에 조조가 먼저 황실의 권위를 지나치게 무너뜨린 영향이 있었을 수 있다. 결국 조조가 이런 식의 폭거를 저지른 대가로 후손들은 자신들도 똑같이 폭거를 당할 걱정을 하고 살아야 하는 숙제를 남긴 셈이고 실제로 조위 또한 사마소 시군 같은 폭거를 당한 채 망한다.

덤으로 이 사건은 한나라 황실의 권위가 대체 어디까지 추락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허수아비라도 당시 재위중인 황제 헌제가 동귀인에 대해 살려달라 간청했는데도 신하인 조조가 기어이 숙청을 감행하는 구도는 헌제의 권위와 힘이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기 때문.[16] 나중에 조조는 복황후까지 죽여 확인사살을 한다.

[1] 후한시대의 내명부는 황후-귀인-미인-채녀-궁인의 5등급에 불과, 이전 및 이후 시대에 비해 매우 간소했다. 전한 때는 후궁 품계가 10여 등급으로 많았지만 이때도 귀비라는 품계는 없었다. 중국사의 후궁 제도 참조.[2] 유비는 이미 도성 밖으로 도망가 있어서 잡지도 못했다.[3] 이러한 논리는 초반 여백사를 죽일 때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살려두면 후환이 될 수도 있다는식의 변호론이 힘을 잃게 만드는 반례 중 하나다.[4] 혹여 이해가 안된다면 후궁이 수태한 자식은 황제의 자식이라는 점을 상기하자. 조조는 황제의 후궁을 죽이면서 태어나지도 못한 황제의 자식을 함께 죽인 것이다. 혹은 반 조조 세력에 대한 간접적 경고라든가 아니면 지록위마처럼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함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겠다.[5] 실제로 위소왕은 금장종과 같은 혈통인 데다가 금장종이 아들 없이 죽어서 제위 계승에는 문제가 없었다. 위소왕의 행위는 추정상 가씨가 출산한 자식이 아들일시 제위 계승을 주장하며 나설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함이지 권력 찬탈과는 거리가 멀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건 후순위였다. 만일 유럽이라면 충분히 권력 찬탈로 비칠 수도 있는 일로 유럽에서는 태아에게도 계승권을 인정해서 만일 군주가 죽었는데 아직 태어나지 않은 군주의 자식이 있으면 그 자식에게 계승권이 넘어간다. 대표적으로 알폰소 13세가 이런 방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물론 위소왕은 그런 여지를 차단하기 위해서인지 정당성 확보를 위해서인지 가씨가 간통했다고 주장했다.[6] 풍석범도 어린 군주를 앞에 세우고 실세 노릇하는 것에만 만족했다. 유교 정치를 내세웠던 조선시대에서도 임산부에게는 출산+100일 후 처형이라는 법이 있음에도 예외적으로 궁녀가 간통해서 처형하는 경우는 즉시 사형했다.[7] 조조의 딸이자 헌제의 두번째 황후인 헌목황후 조씨가 입궐한 건 동귀인 사후 13년 후다.[8] 물론 동씨 입장에선 아버지 동승이 죄인으로 죽은데다 친정도 싸그리 몰살당해 뒷배가 없고 뭘 나서기 힘들기는 한데, 고황후 박씨도 딱히 배경같은 게 없었음에도 아들 한문제가 무사히 황위에 오른 걸 감안하면 조조의 우려도 이상한 건 아니다.[9] 한나라가 타 중국의 통일왕조들과 다른 점은 전한, 후한 가리지 않고 중후반기에 고질적으로 어린 황제+외척과 환관의 집권&양측의 대립을 겪는다는 점으로 이런 상황 못지않게 궁중암투가 심했다. 심지어 태후조차 여기에 휘말려 죽곤 했다.[10] 허나 친인척이라고 해도 황위에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형제 등은 강력히 배척했다.[11] 더군다나 엄연히 재위 중인 황제가 직접 살려줄 것을 청했는데도 개무시하고 죽여버린 것에서 문제 있는 짓임이 확정이다. 만일 헌제에게 조조를 쳐낼 만큼의 권력이라도 있었다면 애초에 조조가 감히 회임 중인 후궁을 대놓고 시해하는 짓을 저지르지도 못했을 것이며, 기어이 동귀인을 죽였다면 그 대가로 역적이 되어 가문 전체가 멸족됐어도 할 말이 없었다. 조선시대에도 저것보다 급이 한참 낮은 중종의 서장자인 복성군을 죽인 김안로가 끝내는 본인이 중종에게 죽고 말았는데 그거보다 급이 도대체 몇급이나 높을 지 알 수 없는 이런 행위를 저지른 조조는 힘이 있으니 넘어갔지 감당할 힘이 없었다면 헌제가 먼저 안 나서도 조조를 지지하던 이들은 목숨 건지기 위해 조조를 반대하던 이들은 헌제의 눈에 들기 위해 다들 조조를 처벌해야 한다고 소리놓여 주장할 것이다.[12] 한 예시로 조선에서는 사형수라 할지라도 임산부인 경우에는 출산+100일 정도는 기다린 후에 처형했다. 물론 조선은 금형일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이런저런 일로 사형이 지체되는 일이 잦았지만 금형일이 아무리 그래도 봄~가을에 금지하는 것만 빼면 최대 3일(왕과 왕비 생일 전후로 3일과 고위직 관리가 사망할 시 그 이후 며칠간 애도하는 기간인 정조시일 중에는 처형을 할 수 없다.)인 것을 감안하면 최소 3달이나 미뤄주는건 예삿일이 아니다. 그나마 예외적으로 궁녀가 간통하여 처형하는 경우에는 임산부라도 처형했는데 이는 왕위계승과 관련된 아주 민감한 사안이라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13] 여성 인권이 매우 열악했던 이슬람교조차 창시자인 예언자 무함마드도 죄를 지은 임산부는 아기를 낳고 젖을 먹인 후에야 죽이라고 명령했을 정도다. 다만 무함마드는 적어도 7세기 중동 기준으로는 여성인권에 관심이 나름 있던 인물이기는 했다. 이슬람교가 여성인권이 시궁창인건 사실이나 이는 종교 자체의 문제보다도 시대의 변화에 중동 분위기가 못 맞추는게 더 크다. 당장에 중세 유럽의 여성인권도 현대에 비하면 낮기는 마찬가지였다. 외려 무함마드는 부인을 수십명을 두든 수백명을 두든 자유였던 당대에 최대 4명까지만, 그것도 엄청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할 수 있을 때에만 들이라고 하는 등 당대 기준으로는 나름 여성인권에 관심을 가졌다. 핵심은 모든 부인을 평등하게 대할 것, 여기에 부인을 더 맞이하려면 기존의 부인(들)의 허락까지 얻어야 한다.[14] 그래서인지 삼국에서는 유비가 조조에게 회임한 후궁을 죽인 것이 역적이 아니면 뭐냐고 묻는다.[15] 그리고 실제로 사마덕문처럼 결국 살해당한다.[16] 심지어 이 시절 조조는 관도대전도 치르지 않았기에 (오히려 이 의대조 사건이 관도대전의 발발 원인 중 하나다) 당시 중국 권력자들 중 1인자도 아니었다. 조조의 권위가 세다기 보다는 황실이 협천자를 하는 권신에게 목소리를 못 낼정도로 추락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