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muth von Mücke
헬무트 폰 뮈케[1]
1881.6.21.~1957.7.30.
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활약한 독일 제국 해군 장교다.2. 생애
2.1.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1881년 6월 21일, 독일 제국 작센 지방의 즈비카우(Zwickau)에서 출생했다. 18세에 제국 해군 사관이 되어 훈련함 샤를로테에서 근무했고, 나중에 전함 카이저 프리드리히 3세에서 근무하게 되었다.1903년 해군 소위로 임관하여 경순양함 님페에 배치되었다. 1910년에는 어뢰정 S.149의 함장이 되었다.
2.2. 제1차 세계 대전 중
1914년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뮈케 대위는 경순양함 SMS 엠덴의 부장이었다.(엠덴의 자세한 활약은 항목을 참조하라.)1914년 11월 9일 코코스 제도에서 뮈케는 함장 카를 프리드리히 막스 폰 뮐러[2] 중령의 명령에 따라 승조원 일부를 해군 육전대로 편성해 이끌고 상륙하여, 섬에 있었던 영국의 통신 중계소를 파괴했다. 그러나 호주 해군의 최신예 경순양함이었던 시드니의 갑툭튀로 엠덴은 격침당했고, 뮈케의 부대는 이를 목격하고 말았다.
2.3. 탈출
그 순간 뮈케의 눈에 띈 것이 영국 해군의 아예샤(Ayesha)였다. 말이 해군 함정이지 97톤짜리 범선에 불과했지만, 독일 해군 육전대에겐 마지막 남은 희망이었다. 마침 엠덴을 격침시킨 시드니가 엠덴의 석탄함인 부레스크를 나포하러 갔을 때를 틈타 뮈케의 부대는 탈출을 감행할 수 있었다. 인원은 장교 6명(군의관 1명 포함), 사병 47명이었다.우선 중립국이었던 네덜란드의 식민지 항구인 파당에 도착한(1914. 12. 27) 뮈케는 독일 상선 초이징(Choising)과 접선하는데 성공하여 당시 오스만 제국령이었던 예멘의 호데이다에 도착했다. 아라비아 반도에 도착한 뮈케와 그의 부하들은 오스만으로 가기 위하여 현지 오스만 관리들의 재정 지원을 확보하는 데 수개월의 시간을 썼다. 마침내 뮈케는 홍해의 동해안에서 제다로, 그후 헤자즈 철도의 남쪽 종착지인 메디나로 항해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작은 배 하나가 파라산 군도 근처의 산호초에 가라앉았고, 그들은 홍해를 따라 위험한 육로로 이동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제다 인근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수백 명의 무장한 베두인 부족원들에게 포위되어 3일 동안 전투를 치르게 되었고, 장교 1명과 사병 2명이 전사한 독일군은 메카의 에미르에 의해 구출되었다. 하지만 뮈케는 그 베두인 부족이 지니고 있었던 영국제 무기를 근거로, 그들이 영국군에게 매수되었다고 생각했으며 자신의 부대가 (영국군과 에미르 간의)정치적 거래의 인질이 될 것을 우려해 아랍어를 할 줄 아는 수병 1명을 항구에 보내 몰래 배를 준비하도록 했다. 밤의 어둠을 틈타 뮈케의 부대는 몰래 빠져나와 북부 헤자즈의 어촌 마을이었던 알 와지로 이동하는 데 성공했다. 거기서 그들은 헤자즈 철도에 도착할 때까지 더 내륙으로 이동했다.
마침내 1915년 5월, 뮈케와 48명의 생존자들은 알 울라 오아시스에서 기차를 타고, 동맹인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에 도착하여 독일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엠덴호 격침 후 무려 반년 만이었다.
2.4. 귀국 이후
뮈케는 귀국한 뒤 독일 제국의 영웅이 되었고, 1915년《The Emden》과《The Ayesha》라는 두 권의 저서를 출판했다. 두 책 모두 영어로 번역되어 미국에도 출판되었다. 1922년에는 저서 홍보를 위해 미국을 방문했는데, 적국의 군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영웅으로 환영받았다.1915년 미국 태생으로 독일에 입양되었던 카를라와 결혼하여 3남 3녀를 두었다.
1918년 종전 이후 뮈케는 독일 국가인민당에 입당했다가 독일 노동자당으로 정당을 바꿨는데, 이 독일 노동자당이 하필이면 훗날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이 되었다. 그래서 뮈케는 1926년 나치당 소속으로 작센 지방의회의 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1929년 그는 아돌프 히틀러의 지도력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나치당에 질리게 되었고, 당을 탈퇴한 뒤 평화주의적인 성향으로 전향하여 저서를 남기거나 강의하게 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총리가 되자 뮈케는 나치당에 대해 더더욱 반대의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나치당은 뮈케의 저서를 금서로 지정하는가 하면, 1936년에는 경고의 의미로 잠깐 동안 킬의 노동교화소에 보내기까지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다가오자, 뮈케는 해군 소속으로 다시 참전하고 싶다는 의사를 비쳤지만 그가 사상적으로 불온하다고 여긴 나치당은 1939년에 뮈케를 다시 함부르크의 수용소로 보냈다. 히틀러는 그를 전쟁 기간 내내 수감할 생각이었으나, 뮈케를 국가적 영웅으로 여겼던 함부르크의 국가지사(Reichsstatthalter) 카를 카우프만(Karl Kaufmann)이 병보석을 핑계로 뮈케를 몇 달 만에 풀어주었다. 그후 1940년에 뮈케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아렌스부르크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그 서슬퍼런 나치 정권조차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을 만큼, 뮈케는 범국민적인 전쟁 영웅이었다.
뮈케와 이름이 같았던 장남은 1943년 동부전선에서 전사했다.
1945년 패전 이후에도 뮈케는 평화주의를 지지했는데, 1950년대에는 서독의 재무장에 대해 반대하는 활동을 했다. 1957년 6월 30일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3. 기타
<HOI4>의 유명 모드인 <카이저라이히>에서 비중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아시아에서 복무했던 경험 때문인지 해군에 뿌리박고 연이어 진급한 끝에 독일령 동아시아의 총독[3]으로 등장한다.그러나 이 세계의 독일령 동아시아는 초강대국이었던 본국은 서서히 쇠퇴하고, 반대로 생디칼리슴 세력이 강성해지는 상황에서 인도차이나에서 혁명이 터지는가 하면 신흥 강대국이었던 일본 제국이 독일령 동아시아에 군침을 흘리는 등 굉장히 위태로운 상황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