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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나우두/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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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나우두의 클럽 경력을 정리하는 문서.

2. 유소년 시절

브라질의 벤투히베이루의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브라질리언 축구인들이 그렇듯이 빈곤에 시달리던 어린 시절 유일한 희망은 축구공이었다. 벌어진 앞니 때문에 내성적이고 수줍은 모습을 많이 보였지만, 축구를 할 때는 생기가 넘쳤다고 한다.

1986년 유소년 축구 팀에 입단하여 경이적인 득점력을 보이면서 지역 전체로 활약상이 퍼져 나갔다.

1990년 14세의 나이로 브라질 2부 리그의 상 크리스토방과 정식계약을 맺었다.[1] 당시 감독이었던 알프레두 감독은 경기가 풀리지 않을 때마다 선수들에게 "호나우두에게 패스해!"라고 외칠 정도로 골 잔치는 상 크리스토방에서도 이어졌다.[2] 그에게 골을 넣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전 브라질 대표 자이르지뉴[3] 그런 호나우두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후견인이자 에이전트로 나섰다. 자이르지뉴의 후원으로 좀 더 체계적으로 성장해간 호나우두는 브라질 U-17대표에 선발되었고 1993년 남미 청소년 대회 득점왕을 차지하였다.

이런 활약에 브라질 명문 클럽들은 영입경쟁을 펼쳤고 크루제이루 EC가 호나우두를 영입하게 된다. 크루이제루 청소년 팀에서도 활약은 이어졌으며 16살에 1군에 합류했다.

1993년 성인 대표팀으로 뽑히고 1994년 만 17세의 나이로 A매치 데뷔전을 치룬다. 1994 미국 월드컵에서 엔트리에는 포함되었으나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다. 크루제이루에서 뛴 60경기에서 58골을 넣으며 그는 자신의 가치를 높였고 1994년 여름, 네덜란드의 PSV 에인트호번로 이적했다.[4]

3. PSV 에인트호번

PSV 측에서는 불과 몇 년 전 네덜란드를 평정했던 호마리우에 대해 강렬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고, 같은 브라질 출신 공격수인 호나우두가 제2의 호마리우가 되어 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에레디비시에 입성한 호나우두는 인터뷰에서"첫시즌은 30골정도를 넣을 것"이라고 했는데 1994-95 시즌, 33경기에 출전해 30골을 몰아치며[5] 데뷔시즌 득점왕을 차지한다. 참고로 90년대 에레디비시는 준 빅리그 급으로 취급받았다.

1995-96 시즌 중반 부상으로 1996년 생애 첫 무릎 수술을 받았다. 부상 악몽의 시작. 그 부상 와중에서 리그만 13경기 12골, 시즌 21경기 19골을 넣어주었으니 여전히 경기당 0.9골을 몰아친 셈이다. 부상 회복 이후 96년 애틀란타 올림픽에 올림픽 대표로 출전하게 된다.[6] 비록 준결승전에서 브라질이 탈락하긴 했으나 호나우두는 자신이 출전한 경기는 준결승을 제외하곤 모두 이기며 자신의 존재를 세계에 알렸다.

단 두 시즌만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임팩트와 퍼포먼스를 보여주었고 이로 인해 2017 네덜란드 SportWereld 선정 네덜란드 리그 역대 외국인 선수 2위로 호나우두가 선정되었다. 1위는 PSV에서 6시즌 동안 활약한 호마리우. #

4. FC 바르셀로나

그는 신화에서 볼 법한 완벽함 그 자체였다. 나는 리오넬 메시를 좋아하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수 차례 경기를 뛰고 그를 흠모하며, 네이마르도 뛰어나고, 호나우지뉴도 특출났지만, 이를 한데 뭉뚱그리면 호나우두가 그 시즌에 이룬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 퀸턴 포춘[7]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의 활약을 통해 호나우두는 스페인 라리가의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하게 된다.

단 한 시즌밖에 뛰지 않았지만 1996-97 시즌 모든 대회에서 49경기 47골[8]을 기록했고, 바르셀로나의 일원으로 뛴 모든 경기는 팬들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UEFA 컵위너스컵에선 5골을 넣으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고, 리그에서도 37경기 34골로 득점왕을 차지한다. 다만 아쉽게도 라리가 우승은 실패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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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996년 10월 12일 콤포스텔라와의 리그 경기에서는 지금도 간간이 회자되는 6명 제끼고 단독 드리블 돌파&골을 작렬시켰고, 이 골은 이틀간 각종 TV 프로에서 180회 이상 반복 재생(...)되는 등 스페인 전역에 돌풍을 일으켰으며, 스페인 언론 마르카에서는 '축구의 왕'이 나타났다고 대서특필하기도 하였다.[10] 펩 과르디올라의 바르사가 차비 에르난데스안드레스 이니에스타에게서 시작되는 오복성 패스 티키타카를 시작으로 메시의 돌파로 마무리짓는 방식이고 2014-15 시즌부터의 바르사가 MSN 스리톱의 파괴력으로 마무리짓는 방식이라면, 당시 바르셀로나의 공격은 호나우두의 개인 기량에 크게 의존했다. 그야말로 원맨쇼를 1년 내내 펼치던 그는 전반기 리그 퍼포먼스만으로[11] 마티아스 자머와 단 '1포인트' 차로 발롱도르 2위를 기록하고 월드 사커나 프랑스 풋볼과 같은 축구 잡지에서는 고작 20살의 나이인 그가 이미 역사상 최고의 선수가 아니냐는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다.[12] 그 대신 FIFA 올해의 선수를 수상하며 세계 최고의 선수 반열에 올랐음을 공인받았다. 이때 나이가 20살. 역대 최연소 수상 기록이다.

에레디비시에 이어 라리가에서도 데뷔시즌 득점왕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는 등 시즌 내내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바르셀로나는 물론이요, 스페인 전역에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나 본인이 이적을 원했기에 바르셀로나에서의 짧은 경력을 마무리한다. 다음 행선지는, 자신이 갓 브라질을 떠날 때부터 계속해서 러브콜을 날렸던 모라티 구단주의 인테르였다.

이 시절 호나우두는 스탯에서도 커리어 하이 시즌이었지만, 흔히 얘기되듯 호나우두 원 루트라고 해도 좋을 만큼 공격에 깊은 관여를 했고 매우 성공적이었기에 여지껏 인구에 회자될 만한 플레이를 보여줬다. 하지만 이 때 호나우두가 무조건적으로 찬양되기에는 수비전술이나 공격효율 등의 한계가 엿보인 건 사실이다. 호나우두가 영입된 바르셀로나는 전 시즌보다 실점이 늘어나 리그 최소 실점 6위(48실점)에 그치게 되어 라리가 우승에 실패했다. 연계와 공중볼에 약한 탓에 잠그는 팀에는 다른 타입의 공격수들보다 고전하는 호나우두의 근본적 약점과 더불어 상대편에게도 기회를 안겨주던 특성을 시사한다.[13][14]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호나우두가 단순 월드 클래스를 넘어서 를 소환할 정도의 임팩트를 보여줬다는 점만은 부정하기 어렵다.

여담으로 이당시 47골을 최근 월드 클래스의 공격수들의 골수랑 별 차이가 없다며 저평가하기도 하지만, 당시 4대 스트라이커로 불린 앙리, 세브첸코, 반 니스텔루이 등이 20~30골대를 평균적으로 기록한것을 고려하면 득점력만으로도 경이로운 수치이다. 또한 당시 호나우두가 보여준 득점력 이외의 경이로운 퍼포먼스는 말할 필요도 없다.

1996/97 시즌: 49경기(선발 49경기) 47골 12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라리가 37 37 0 34 9
위너스컵 7 7 0 5 1
코파 델 레이 4 4 0 6 1
수페르코파 1 1 0 2 1
합계 49 49 0 47 12

5.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통산 98경기 59골 12도움
나는 엄청난 선수들을 수없이 겪었다. 하지만 아무 고민 없이 최고를 뽑을 수 있다. "호나우두다." 그는 다른 행성에서 온 것 같은 존재였다. 나는 호나우두가 전성기를 달리던 인테르 시절 그를 만났다. 당시 그는 다른 인간들은 불가능한 일들을 해내곤 했다. 누구와도 견줄 수 없었다. 호나우두는 축구의 역사에서 마라도나, 펠레와 함께 신전에 들어가야 할 거대 존재다. 하지만 본인은 분명히 아쉬울 것이다. 부상만 아니었으면 앞의 2명을 제치고 역사상 최고의 선수가 될 수도 있었을 테니까.[15]
- 잔루이지 부폰

바르셀로나에서의 짧은 경력을 마무리하고 이탈리아 세리에 A의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 이적했다. 구단 프런트도, 선수단도 그의 입단을 진심으로 반겨주었다.

등번호의 얽힌 일화가 유명한데 당시 인테르 주전 공격수였던 이반 사모라노가 호나우두의 9번을 달고있었다. 1997-98 시즌에 호나우두는 10번, 사모라노는 9번을 달고 뛰었지만, 1998 월드컵 이후 이탈리아 전설의 10번 로베르토 바조가 온 이후 호나우두가 10번을 바조에게 양보하여 호나우두의 등번호가 없어지며 상황이 꼬이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나이키에서 호나우두의 R9 마케팅을 하고 있어 9번을 달라고 구단에 압박까지 들어와 계약에 지장이 갈 수 있는 매우 난감한 상황이 닥치자, 사모라노가 9번을 호나우두에게 양보하여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사모라노도 칠레의 영웅이라 할만큼 정상급의 선수였고 충분히 9번을 유지할 자격은 되었기에 구단측에서도 난감해 했지만, 더 나은 후배를 위해 본인이 순순히 양보한 것이다. 그리고 이후 사모라노 본인은 그 유명한 1+8번을 달게 되었다.[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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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알바로 레코바와 함께 데뷔전을 치렀고 1997-98 시즌 32경기 25골로 리그 득점 2위에 올랐다. 그리고 세리에 A 올해의 선수와 올해의 외국인 선수를 모두 석권하고 팀에 UEFA컵 트로피를 안겨주었다.[18] 당시 세리에 A는 세계 최고의 리그 자리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었으며, 특유의 견고한 수비와 거친 몸싸움으로 공격수의 무덤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호나우두는 율리아노, 페라라, 몬테로, 코스타쿠르타, 말디니, 네스타, 칸나바로, 튀랑 등 내로라하는 수비수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하며 상대 수비진을 유린하는 존재였다.

1997년 그는 다시 한 번 FIFA 올해의 선수를 수상했고, 그 해에 발롱도르까지 차지했다. 이때 차지한 발롱도르는 역대 최연소 수상 기록이다.[19] 이로써 호나우두는 FIFA 올해의 선수, 발롱도르 모두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수상하게 되었다.[20]

이런 호나우두를 두고 이탈리아에선 "경이로운 자(Il Fenomeno)"[21], 세계 각국의 언론들은 "마라도나 이후 등장한 최고의 카리스마"라는 찬사를 보냈다. 전성기의 디에고 마라도나와 비교되던 인테르 첫 시즌의 호나우두

1997/98 시즌: 47경기(선발 47경기) 34골 5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32 32 0 25 3
UEFA 컵 11 11 0 6 2
코파 이탈리아 4 4 0 3 0
합계 47 47 0 34 5

그러나 자신의 대관식이 될 줄 알았던 월드컵 결승전에서 프랑스에 패해 우승이 좌절되자 낙담한 호나우두는 부상과 부진에 빠져 98-99 시즌을 리그 14골,[22] 챔스 1골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로 마감했다. 인테르는 리그는 8위에 챔피언스리그는 8강에서 98-99 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만나 탈락하고만다.

1998/99 시즌: 28경기(선발 25경기) 15골 4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19 17 2 14 2
챔피언스 리그 6 6 0 1 2
코파 이탈리아 2 1 1 0 0
세리에 A 플레이-아웃 1 1 0 0 0
합계 28 25 3 15 4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1999년 11월 21일 레체와의 경기에서 무릎 부상까지 당하며 99-00 시즌도 대부분의 시간을 재활센터에서 보내게 된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반년간의 고된 재활을 거쳐 2000년 4월 12일 SS 라치오와의 코파 이탈리아 결승 1차전에서 그라운드에 복귀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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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입된 지 7분만에 부상이 재발해 버렸다. 오른쪽 무릎 슬개건이 완전히 끊어져버린 것. 이 복귀전에서 당한 부상은 특히나 치명적이었는데 2년이라는 시간을 재활로 날려버린 것은 물론 호나우두의 전성기까지 함께 끝내버렸기 때문이다.[23] 당시 전 세계의 뉴스가 호나우두의 부상 장면을 보도하면서 '이제 축구의 신은 끝났다'라고 애도하는 특집 방송을 내보냈을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단주 마시모 모라티는 '호나우두는 나의 양아들이다'라는 말까지 해가며 재활을 지원했다.

1999/00 시즌: 8경기(선발 5경기) 3골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7 5 2 3 0
코파 이탈리아 1 0 1 0 0
합계 8 5 3 3 0

2002년도 봄쯤에 그라운드에 나타나 인테르에서 세심한 출장 시간 조절을 받으며 서서히 몸을 데운 호나우두는 2002 한일 월드컵에서 우승은 물론 득점왕(8골)까지 차지하며 축구 황제의 부활을 알리게 된다. 그러나 그는 왕자의 귀환이 스쿠데토주세페 메아차로 가져올 것이라는 인테르 팬들의 염원을 저버리고 레알 마드리드 이적설을 뿌리며 모라티 구단주를 압박, 결국 이적 승낙을 받아낸다.[24] 격앙된 인테르 팬들은 호나우두를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맹비난했으며 후에 그가 AC 밀란과 계약하여 밀라노로 복귀할 때 '너같은 놈은 관광객으로라도 밀라노에 발을 들여놓으면 안 된다'라는 플래카드를 경기장에 걸어놓으며 성대한 환영식을 열어주었다(...).[25]

호나우두의 인테르 시절을 종합해보면 그야말로 시련의 연속이었다. 냉정하게 말해 제대로 공헌한 적은 첫 두 시즌뿐이고, 그나마 부상으로 절반은 날려먹은 2번째 시즌을 제외한다면 제대로 활약한 때는 데뷔시즌인 1997-98 시즌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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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치오전 대패로 눈물짓는 호나우두
여담으로 2001-02 시즌 인터 밀란은 세리에 A 33라운드까지 리그 1위를 수성하고 있었는데, 호나우두 역시 약 4달 만에 경기에 출장하면서 3경기 4골 1어시스트[26]로 인테르의 1위 수성에 활약을 하면서 본인의 첫 스쿠데토 커리어와 더불어 인테르의 1989년 우승 이후 13년만에 스쿠데토를 노릴 수 있었다. 그러나 시즌 최종전 라치오와의 경기에서 2-4로 패하면서 같이 스쿠데토를 경쟁중이던 유벤투스와 로마에게 밀려 3위로 고꾸라져버렸고, 결국 염원하던 스쿠데토는 커녕 챔피언스리그 본선 진출에서 만족해야 했다. 본인도 충격먹었는지 벤치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2001/02 시즌: 16경기(선발 10경기) 7골 2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10 9 1 7 2
UEFA 컵 5 1 4 0 0
코파 이탈리아 1 0 1 0 0
합계 16 10 6 7 2

6. 레알 마드리드 CF

177경기 104골 34도움

2002-03 시즌을 앞두고 호나우두는 레알 마드리드의 갈락티코스 정책의 일환으로 €46M의 금액으로 이전 소속팀이던 바르셀로나최대 라이벌레알 마드리드 이적하게 된다. 2002년 10월까지는 부상으로 빠졌지만, 이후 부상에서 복귀한 호나우두는 레알 마드리드 데뷔전에서 멀티골을 기록했다. 이후에도 팀의 주포로 맹활약을 펼치면서 첫 시즌 23골을 넣어 팀의 라리가 우승에 기여했고, 2002년 발롱도르FIFA 올해의 선수를 수상하게 된다.[27]

올드 트래포드에서 진행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UEFA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은 일명 "3샷 3킬"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데 이 경기에서 그는 단 3번의 슈팅으로 해트트릭을 완성하며 레알 팬들은 물론, 맨유 팬들로부터도 기립 박수를 받았다. 준결승에 올라가 알레산드로 델피에로파벨 네드베드, 잔루이지 부폰이 이끄는 유벤투스를 만나 1차전 홈에서 선제골을 넣어 2:1 승리에 기여했다. 2차전 유벤투스의 파상공세를 막지 못해 2:0으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교체 출전하여 PK를 얻어내지만 루이스 피구가 실축하고, 이후 네드베드에게 결승골을 얻어맞고 탈락하고 만다.[28]

2002/03 시즌: 44경기(선발 41경기) 30골 8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라리가 31 29 2 23 5
챔피언스 리그 11 10 1 6 3
코파 델 레이 1 1 0 0 0
인터컨티넨탈컵 1 1 0 1 0
합계 44 41 3 30 8

2003-04 시즌에는 12월 3일 펼쳐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자신의 축구인생 최단 시간 골(14초)을 터트렸다.[29] 하지만 시즌이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호나우두가 부상으로 쓰러졌고, 팀도 챔피언스리그 8강에서 AS 모나코를 만나 탈락한다. 거기에 리그에서도 우승에 실패하고 최후의 보루였던 코파 델 레이마저 결승에서 패하며 결국 무관에 그치게 된다. 그나마 본인은 리그에서 24골[30]을 기록하여 커리어 2번째 라리가 득점왕을 차지했다.

2003/04 시즌: 48경기(선발 46경기) 31골 13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라리가 32 31 1 24 9
챔피언스 리그 9 9 0 4 2
코파 델 레이 5 4 1 2 1
수페르코파 2 2 0 1 1
합계 48 46 2 31 13

하지만 2004-05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체중이 불어나면서 경기력이 급속도로 하락하기 시작한다.[31] 경기장 안 뿐만 아니라 바깥에서도 게으른 태도로[32] 일관했던 호나우두는 팀 동료와 언론 및 팬들로부터 비난과 야유를 피할 수 없었다. 거기에 레알 마드리드의 상징이자 심장같은 존재인 라울 곤살레스와의 불화설까지 나돌았다.[33] 그럼에도 리그에서 21골을 넣은 것을 보면 천부적인 골 결정력만큼은 건재했다고 볼 수 있다.

2004/05 시즌: 45경기(선발 42경기) 24골 1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라리가 34 32 2 21 8
챔피언스 리그 10 10 0 3 3
코파 델 레이 1 0 1 0 0
합계 45 42 3 24 11

2005-06 시즌은 초반 폼을 끌어올려 7경기 7골을 득점하지만, 마드리드 더비에서 2골을 넣고 해트트릭을 하기 직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수비수 페레아에게 살인 태클을 당해 쓰러지고 말았다. 골은 수비수의 자책골로 판정되었다. 이 부상에서 복귀했을 때 그의 체중은 더욱 늘어나 있었고 폼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복귀전은 홈에서 펼쳐진 엘 클라시코였는데, 팀은 국대 후배 호나우지뉴를 막지 못하고 3:0으로 패배했다. 최종기록은 리그 23경기 14골. 초반에 7골을 넣은 것을 생각하면 부상의 여파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2005/06 시즌: 27경기(선발 25경기) 15골 2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라리가 23 21 2 14 2
챔피언스 리그 2 2 0 0 0
코파 델 레이 2 2 0 1 0
합계 27 25 2 15 2

거기에 2006-07 시즌을 앞두고 새로 부임한 파비오 카펠로는 느슨한 태도를 가진 선수는 절대 용납하지 않는 감독이었고, 이미 폼이 많이 하락한 호나우두는 새로 영입한 뤼트 판니스텔로이와의 주전 경쟁에서 철저하게 도태된다.[34] 결국 계약기간 만료일인 2008년 6월 20일을 채우지 못하고 시즌 중이던 2007년 1월에 AC 밀란으로 이적했다.

2006/07 시즌: 13경기(선발 6경기) 4골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라리가 7 3 4 1 0
챔피언스 리그 4 1 3 2 0
코파 델 레이 2 2 0 1 0
합계 13 6 7 4 0

7. AC 밀란

20경기 9골 5도움

06-07 시즌 도중, 2007년 1월 이적시장에서 AC 밀란으로 이적하게 된다. 당연히 인테르에서 인상깊은 깽판을 치고 레알로 간터라 공항에서부터 인테르 팬들의 성대한 환영식을 받는다(...).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AC 밀란 의료진들의 도움을 받아 체중 감량에 성공했고 잔부상을 치료하였다. 이후 그라운드에 복귀해 14경기 7골 4도움을 기록하며 다시 폼을 끌어올리기 시작한다.

2006/07 시즌: 14경기(선발 12경기) 7골 5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14 12 2 7 5
합계 14 12 2 7 5

그러나 07-08 시즌을 앞두고 부상이 다시 발목을 잡았다. 반년이 지난 후 칼리아리 원정에서 시즌 첫 경기를 치뤘다. 이후 후배인 카카, 파투 등과 호흡을 맞추며 좋은 모습을 이어갔다. 하지만 2008년 2월 13일 리보르노와의 홈경기에서 그는 또다시 그라운드 위에 쓰러졌다. 이번엔 왼쪽 무릎 슬개건이 끊어진 것.[35] 이는 인테르 시절 그를 괴롭힌 부상과 동일했고, 호나우두는 실려나가며 그때랑 똑같아라며 울먹였다고 한다. 재활에 걸린 시간은 13개월. 처음에는 AC 밀란 측은 부상 재활까지 기다리겠다며 재계약 의사를 내비쳤으나 브라질에서 터진 마약 스캔들[36]로 인해 결국 재계약을 포기하게 된다.

2007/08 시즌: 6경기(선발 4경기) 2골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6 4 2 2 0
합계 6 4 2 2 0

8. 귀향

2008년 12월. 그는 고국 브라질의 코린치안스로 이적하게 된다. 그는 "다시 축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라고 밝히며 욕심없이 순수하게 축구를 즐기는 모습[37]을 보여주고 싶었던 듯 하다.

나이 먹어서도 여전히 빨랐던 호나우두
하지만 슬슬 호나우두도 은퇴 시기가 다가왔는데 09 시즌엔 대표팀 선발 얘기까지 나올 만큼 좋은 활약상을 보여줬으나, 10 시즌에는 주전 경쟁에서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출장하더라도 비만으로 지극히 느리고 부지런하지 못한 플레이를 보여 팬들의 원성을 샀다. 사실 팬들이 분통을 터뜨리는 원인은 그의 지나치게 높은 주급에서 기인할 것이다.저 주급으로 데려올 수 있는 팔팔한 신인이 몇 명이냐 이 소리[38]

그도 자신의 몸상태를 의식했는지 2010년 5월엔 "몸이 멈추라고 명령한다"는 발언을 해 은퇴하려는게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9. 은퇴

그리고 2011년 2월 14일 은퇴 기사가 떴다. 2월 15일 기자 회견을 통해 현역 은퇴를 공식 발표. 이로써 34세의 나이로 축구 황제의 기나긴 여정은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은퇴를 결심한 이유로는 라이언 긱스의 "몸은 느려지는데 머리는 빨라진다" 라는 말과 비슷하면서도 대조적이게 "머리로는 분명 수비수를 제칠 수 있었다. 그러나 몸이 더이상 따라주지 않는다" 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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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라 불리웠던 사나이, 세월 앞에 멈춰서다.


[1] 어린 시절 응원했던 플라멩구에 입단 테스트를 받기 위해 초청장을 가지고 가던 도중 깡패를 만나 초청장을 빼앗기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온 적이 있다. 그래서 입단한 곳이 상 크리스토방.[2] 호나우두가 골을 넣은 후 세레머니를 하지 않자 감독이 이유를 물었다고 한다. 그때 그는 "골을 넣기 위해 제가 여기 있는 것이 아닌가요?"라고 대답했다.발로텔리 before[3] 역사상 최강의 팀이라고 불리우는 1970년 브라질 국가 대표팀에서 1970년 월드컵 전 경기 득점을 기록한 레전드이다.[4] 대표팀 선배 호마리우의 조언이 영향을 미쳤다. 호나우두는 후에 호마리우지쿠와 함께 자신의 우상이라고 밝힐 정도였고 대표팀에서 호마리우를 처음 목격하고는 호마리우가 귀찮아할 정도로 졸졸 따라다녔다.[5] 시즌 36경기 35골[6] 이때 16강 조별리그에서 U23일본에게 첫 패배로 브라질은 모든 연령통틀어 아시아팀에게 첫 1:0 패배를 당했다.[7] 96-97 시즌의 호나우두를 회상하며[8] 이 기록은 2010-11 시즌 리오넬 메시에 의해 경신되기 전까지 바르셀로나 단일 시즌 최다 득점 기록이었다.[9] 당시 시어러, 라울, 히바우두 같은 뛰어난 공격수들이 20골대를 기록한것과 비교해 호나우두가 47골을 넣은것은 시대를 고려하면 정말 엄청난 기록이었다.[10] 마라도나1986년 멕시코 월드컵 잉글랜드전 드리블과 비견될 만한 드리블 돌파로 회자되는데. 다만 엄청난 스피드로 순식간에 치고 나가 득점한 마라도나와는 달리, 호나우두는 적당한 스피드로 달리면서 계속 따라붙은 수비수들을 다 농락하고 골을 넣는다. 과연 어느 쪽 수비수들이 더 허탈할까(...).[11] 1996년의 발롱도르는 PSV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의 후반기와 바르사에서 보낸 전반기가 포함되었는데, PSV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의 후반기는 부상으로 인해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즉, 바르사에서의 전반기 퍼포먼스만으로 1표 차이로 발롱도르 2위를 차지한것.[12] 참고로 이때 호나우두의 국가대표 커리어는 미미하던 시절이다. 고작 리그에서 전반기만 보낸 것만 가지고 유력 축구 전문지에서 만 20살의 선수가 이미 역사상 최고가 아니냐는 설레발을 떤 것.[13] 드리블 돌파가 막히면 적의 빠른 역습으로 이어질 수 있다. 펩 시절 바르셀로나가 지겹게 공 돌렸던 이유와도 조금 통하는 면이 있다.[14] 아이러니하게도 호나우두를 인테르로 보내고 히바우두를 영입한 바르셀로나는 그 후 라리가 2연패를 달성한다.[15] 하지만 정작 호나우두 본인은 퍼거슨과의 갈등에서 자신의 선수 경력에 더할 수 없이 만족한다고 하였다. 물론 감정적으로 격해진 상황에서 한 말이니 진실은 본인만이 알 것이다.[16] 물론 사모라노가 9번의 미련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는지 다른 잡놈이 9번을 달라고 설쳤으면, 축구고 뭐고 다 뒤집어 엎었겠지만 호나우두는 진짜 천재여서 양보한다며 약간의 섭섭함을 드러냈다고 한다. 그리고 은퇴경기때 다른 선수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1+8번이 아닌 9번을 입고 뛰었다.[17] 여담으로 이 사건으로 둘의 사이는 매우 좋아져서, 사모라노 은퇴경기때 호나우두가 모든 일정을 제쳐두고 15시간동안 비행기를 타고 와 쉴 틈도 없이 바로 사모라노의 경기에 들어와 같이 뛰었다. "그는 당연히 이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선배다."라고 말한건 덤.[18] 인테르의 UEFA컵 우승은 93-94 시즌 UEFA컵 우승 이후 4년만에 얻은 메이저 타이틀이었다.[19] 마이클 오언, 리오넬 메시는 22세에 수상.[20]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리오넬 메시를 제외하고 20살의 어린 나이에 세계 최고가 된 경우는 역사상 거의 없다. 대다수의 축구선수들은 20대 중반부터 전성기를 맞이하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펠레, 마라도나에 이어 역대 최고 반열에 올라갈 거라는 기대를 받았지만 너무 일찍부터 불꽃을 태웠다는 점이 그의 커리어에 커다란 치명상으로 작용하고 말았다.[21] 직역을 하자면 현상이지만 의역하면 경이로운 자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22] 19경기 14골로 경기당 득점률은 좋았지만 PK골이 7골에 달했을 정도로 득점 순도가 떨어졌다.[23] 호나우두의 전성기를 끝내버린 이 부상은 인테르 의료진의 판단 미스가 컸다. 호나우두의 무릎 부상이 덜 회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보냈다가 부상이 재발한 것이기 때문. 결국 2년간 쉬면서 다시는 예전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게 된다.[24] 이때 호나우두가 인테르 측에 보여준 태도 때문에 이적 후, 팀동료였던 이반 코르도바는 언론 인터뷰에서 "말도 없이 가서 너무 서운했다."라고 대놓고 디스하기도.[25] 그래도 호나우두 본인은 이때 인테르 팬들에게 크게 섭섭하진 않았는지 당시 '좀 슬프다'정도의 인터뷰만 하고 말았으며 은퇴 후로는 인테르 측과 사이가 회복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인테르 측에서도 2018년부터 선정하고 있는 구단 명예의 전당에 공격수 첫번째 자리로 주세페 메아차를 제치고 호나우두를 헌액시켰다. 반면 현역생활을 연장시켜준 AC밀란과는 소 닭보는듯한 사이가 되었다.[26] vs 브레시아전 2골, vs AC 키에보 베로나전 1골 1어시스트, vs 피아첸차 칼치오전 1골[27]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의 활약이 컸다. 그 해 발롱도르 고득표자들은 FIFA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선수들이었다. 다만 02년 발롱도르에 대해선 논란이 좀 있는 편이다. 그 시즌에 호나우두는 리그에 겨우 7경기밖에 출전을 못했는데, 아무리 월드컵이 최고권위의 대회라지만 클럽에서 활약상 아니 활약상 이전에 경기출전 자체가 거의 없는 선수가 타는게 맞는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28] 여담으로, 4강 다른 조에서는 그의 친정팀 인테르가 AC 밀란에게 합산 스코어는 1:1이지만 원정 다득점으로 아쉽게 패배한다. 장기 부상에서 복귀한 후 가장 좋은 모습을 보였던 시즌이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들에게 예전만 못하고 활동량이 떨어져 게을러졌다는 평을 듣는다. 기나긴 부상으로 오래 쉬면서 체력 자체가 많이 떨어져 버린 것을 알 수 있다.[29] 후반전이 시작되자마자 호베르투 카를루스의 패스를 받은 다음, 디에고 시메오네를 특유의 재치있는 알까기로 넘어뜨리고, 마지막 골키퍼까지 농락하면서 인생골 중 하나를 집어넣었다. #[30] 리그 26라운드까지 22골을 기록하며 전성기급 득점페이스를 보였으나 부상으로 인해 나머지 라운드에서 고작 2골을 추가하는 데 그쳤다. 팀도 시즌 내내 1위를 유지하다가 막판에 5연패를 당하며 순위가 곤두박질쳤다.[31] 갑상선 기능 저하로 인해 체중이 불어났으며, 마드리드 타블로이드 지에 지네딘 지단루이스 피구담배 한 개피씩 피고 같은 테이블에 있던 호나우두가 자기 머리통만한 샌드위치를 우걱우걱 먹는 사진도 도는 걸 보면 그의 식탐도 체중 문제에 일조를 한 듯 하다.[32] 결혼식 때 팀원 전체를 파리로 데려가거나, 생일 파티 때 여자들과 팀 동료 전원을 데려오는 등 파티와 노는 걸 좋아했던 호나우두의 무절제한 사생활로 인해 팀을 탈선시킨다는 여론이 제기된 적도 있었다.[33] 라울과 호나우두가 공존하기 힘든 모습을 보여주자 레알의 팬덤 사이에서는 라울을 중용해야한다는 라울파와 호나우두를 중용해야한다는 호나우두파로 나뉘어서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었다.[34] 이 외에도 자신을 디스하고 놀기 바쁘던 갱생 전의 안토니오 카사노, 언론에 자주 구설수가 나며 심기를 어지럽히던 데이비드 베컴이 내쳐진다. 이 중 베컴은 카펠로와 화해한 후 판 니스텔로이와 콤비를 이뤄 2006-07 시즌 라리가 우승의 주역으로 거듭나게 된다.[35] 인테르 시절에는 오른쪽 무릎 슬개건이 끊어졌었다.[36] 지금은 거의 잊혀졌지만 당시엔 매우 큰 사건이었다. 여자인줄 알았던 여장남자 매춘부(...) 3명이랑 엮이면서 생긴 사건인데 결과만 얘기하자면 호나우두는 마약과 관련된 혐의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이 스캔들로 국제적인 망신을 당했고 유니세프 친선 대사직에서 짤렸다. 호나우두 본인도 인생 최대의 실수라며 부끄럽다고 인터뷰를 했다.[37] 극심한 가난을 겪으며 브라질 리그에서 추악한 일도 겪어서인지 전성기이던 90년대 후반 유럽으로 가면서 다시는 브라질로 오고 싶지 않다고 인터뷰까지 하던 그였다. 뭐 이젠 돈도 충분히 벌었고 나이도 있으니 돈이니 뭐니 걱정도 없이 그냥 축구로 순수하게 즐기고자 돌아온 것도 있겠지만 브라질이 좀 잘나가기 시작하면서 과거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선수들의 페이가 올라갔다. 호나우두도 주급이 한화로 1억이 넘고 1억 5천이 안 되는 정도.[38] 취소선이 쳐지긴 했지만 돈값을 해줬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라서 실제로 저런 의견이 나왔었다. 당시 호나우두는 주급으로 약 당시 한화 약 1억 5천만원를 받았다. 당시 브라질 경제는 고유가등으로 인해 호황기라 돈을 막쓰긴했다. 축구와는 관련없지만 이때 국고비축은 커녕 심해유전을 개발한답시고 무리수를 뒀다가 2014년 하반기부터 유가가 대폭락하면서 경기침체로 이어져 브라질리그는 다시 2000년대 후반 이전처럼 셀링리그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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