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6 11:06:30

호랑이/한국설화

1. 삼국유사의 호랑이 설화2. 기타 호랑이 설화3. 조선왕조실록 속 호랑이 기록
3.1. 호랑이를 통한 기우제에 관한 기록3.2. 호환에 관한 기록
4. 관련 문서

1. 삼국유사의 호랑이 설화

신라에서는 해마다 2월이 되면 초여드렛날부터 보름까지 서울 남녀들이 흥륜사(興輪寺)의 전탑을 돌며 복을 비는 풍속이 있었다.

원성왕 때 김현이란 사람이 밤이 깊도록 홀로 탑을 돌면서 쉬지 않았다. 한 처녀가 염불하면서 따라 돌다가 서로 눈길을 주게 되었다. 마침내 탑돌이를 끝내고 으슥한 곳에서 정을 통했다.

처녀가 돌아가려고 하자 김현이 그를 따라가니, 처녀는 사양하고 거절했지만 억지로 따라갔다. 가다가 산기슭에 이르러 한 초막으로 들어가니, 늙은 할미가 함께 온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처녀가 사정을 말하니, 늙은 할미가 말하기를
“비록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없는 것만 못하다. 그러나 이미 저지른 일이니 나무랄 수도 없구나. 은밀한 곳에 숨겨두어라. 네 형제들이 나쁜 짓을 할까 두렵다.”
처녀는 김현을 숨겨 두었다. 조금 뒤에 세 마리의 범이 으르렁거리며 나타나서 사람처럼 말하기를,
“집안에 비린내가 나니 요기하기 좋겠구나.”
늙은 할미는 처녀와 함께 꾸짖어 말하기를,
“너희들의 코가 어떻게 되었구나. 무슨 미친 소리냐?”

이때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어,“너희들이 즐겨 생명을 해침이 너무도 심하니 마땅히 한 놈을 죽여서 악행을 징계하겠다.” 고 하였다.
세 짐승이 그 소리를 듣고 모두 근심하니, 처녀가, 세 오라버니가 멀리 피해 가서 스스로를 반성하겠다면 자기가 대신 그 벌을 받겠다고 하였다.
이에 호랑이들이 기뻐하며 머리를 숙이고 꼬리를 떨어뜨리고 달아나 버렸다.

처녀가 김현에게 말하기를,
“처음에 저는 당신이 우리 집에 오는 것이 부끄러워서 사양하고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감출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낭군과는 비록 사람은 아니지만, 하루저녁의 즐거움을 얻어 중한 부부의 의를 맺었습니다. 세 오라버니의 죄악은 하늘이 이미 미워하니, 집안의 재앙을 제가 감당하려 합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낭군의 칼날에 죽어서 은덕을 갚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내일 저잣거리에 가서 사람들을 심하게 해치면 나라에서는 반드시 높은 벼슬을 걸고 나를 잡을 사람을 찾을 것입니다. 당신은 겁내지 말고 나를 쫓아서 성 북쪽 숲속까지 오면 제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러나 김현은, 어찌 차마 배필의 죽음을 팔아서 일생의 벼슬을 요행으로 바랄 수 있겠냐며 거절한다. 그러나 처녀는,
“그런 말 마십시오. 지금 제가 일찍 죽는 것은 천명이며, 또한 저의 소원이요, 낭군의 경사요, 우리 일족의 복이요, 나라 사람들의 기쁨입니다. 한번 죽어서 다섯 가지 이로움이 있으니, 어떻게 그것을 어기겠습니까? 다만 저를 위하여 절을 짓고 불경을 강하여 좋은 과보를 얻도록 도와주신다면 낭군의 은혜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드디어 그들은 서로 울면서 헤어졌다.

다음날 과연 사나운 범이 성 안으로 들어왔는데, 매우 사나워서 감당할 수가 없었다. 원성왕이 이 소식을 듣고 명령하기를
“범을 잡는 자에게는 벼슬 2급을 주겠다.”
김현이 대궐로 들어가서 아뢰기를,
“소신이 잡을 수 있습니다.”
이에 먼저 벼슬을 주어 그를 격려하였다. 김현이 단도를 지니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범이 처녀로 변하여 반갑게 웃으면서,
“지난밤에 마음 속 깊이 정을 맺던 일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 내 발톱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흥륜사의 간장을 바르고 그 절의 나발소리를 들으면 다 나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고는 김현이 찼던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러 쓰러지니 곧 범이었다. 김현은 숲에서 나와 소리쳐 “지금 이 범을 쉽게 잡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처녀의 말대로 상한 사람들을 치료하니 그 상처가 모두 나았다. 지금도 세간에서는 그 방법을 쓰고 있다.
김현은 벼슬을 한 후, 서천(西川) 가에 절을 세워 호원사(虎願寺)라고 하고 항상 범망경(梵網經)을 강설하여 범의 저승길을 인도하고, 범이 제 몸을 죽여서 자기를 성공시켜준 은혜에 보답하였다.

김현은 죽음을 앞두고 지나간 일의 기이함에 깊이 감동하여
이를 기록하여 전기를 만드니 세상에서는 드디어 알게 되었고, 이로 하여 그 이름을 ‘논호림(論虎林)’이라고 하여 지금까지도 일컬어 온다.
김현감호

<삼국유사>에 수록된 '김현감호' 설화로, '호랑이 처녀', '호원' 등 으로도 불린다. 등장인물인 김현과 호랑이 처녀는 탑돌이를 하다가 서로 첫눈에 반하여 한적한 곳에서 은밀히 성관계를 한다. 사람과 동물(호랑이)가 사랑했다는 점에서 이물교구설화로 분류되는 설화이다.

구비전승되는 또 다른 설화로는 '사람을 사랑한 호랑이'가 있는데, 김현감호와 줄거리가 비슷하다. 이 이야기가 김현감호 이야기로부터 파생되었는지 아닌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래도 검열삭제를 한다는 건 똑같다
옛날 당진 신평에 사는 성 씨라는 사람이 장가를 가기 위해 열심히 탑을 돌았다. 탑을 돌던 어느 날 문득 앞서서 돌고 있는 예쁜 아가씨를 발견했다. 탑돌이가 끝나자 그는 아가씨에게 자신은 장가가기 위해 탑을 돈다고 하고 아가씨는 어떠한 이유로 탑을 도는지 물었다. 아가씨는 살생을 저질러 이를 참회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가 자기와 결혼해 달라고 하자 그녀는 문득 성 씨의 손을 잡고 숲으로 데리고 가 인연을 맺었다. 그는 그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가씨를 뒤따라 가 그녀의 집에 도착했다. 아가씨의 어머니는 사정 이야기를 듣고 나더니 그를 골방에다 넣었다. 얼마 후 서너 명의 남자가 방으로 들어섰다. 그들이 들어서자, 하늘에서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너희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 아가씨가 하늘을 향해 자신이 죽을 테니 오빠들을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오빠들이 떠난 뒤 그 남자가 골방에서 나와 보니 아가씨의 자태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아가씨는 성 씨에게 자신은 인간이 아니니 자신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다. 성 씨는 인간이 아니어도 상관없다고 하고 죽을 때까지 사랑하겠노라 했다. 아가씨는 마을로 내려가 호랑이를 잡는 사람에게 벼슬을 준다는 방이 붙으면 자신을 죽여 달라고 했다. 다음 날 아침, 마을에는 호랑이를 잡는 사람에게 벼슬과 현상금을 주겠다는 방이 붙었다. 그것을 본 성씨는 마을의 영감에게 찾아가 자신이 호랑이를 잡겠다고 한다. 성 씨가 창과 칼을 들고 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아가씨를 다시 만났다. 아가씨는 전에 만난 절 옆에 고인 물을 상처 난 사람들에게 바르면 낫는다는 것을 알려 주고는 성 씨의 칼을 빼서 스스로 자결했다. 그러자 아름다운 아가씨는 큰 호랑이로 변하여 죽음을 맞이하였다. 성 씨는 호랑이를 잡은 대가로 현상금을 받고 큰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성 씨는 아가씨를 위해 망각산에 망각재 절을 지었다. 그 절은 현재 이름이 신흥사로 바뀌었다.
『사람을 사랑한 호랑이』
정원(貞元) 9년(793)의 일이다.
중국 당나라 신도징(申屠澄)이 야인(野人)으로서 한주 습방현위(漢州什方縣尉)에 임명되었었다.
진부헌(眞符縣)의 동쪽 10리가량 되는 곳에 갔을 때 눈보라와 심한 추위를 만나 말이 앞을 나가지 못했다.
길옆에 초가가 있는데 들어가니 그 속에 불이 피어 있어서 몹시 따뜻했다.
등불을 비추어 나아가 보니 늙은 부모와 처녀가 화로를 둘러싸고 앉아있었다.
그 처녀는 나이 겨우 14~15세쯤 되어 보였다.
비록 헝클어진 머리와 때묻은 옷을 입었으나 눈 같은 살결에 꽃 같은 얼굴로서 동작이 얌전했다.

그 부모는 신도징(申屠澄)이 온 것을 보자 급히 일어나서 말했다.
「손님은 차가운 눈을 무릅쓰고 오셨으니 앞에 와서 불을 쪼이시오.」
신도징이 한참 앉아 있으니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눈보라는 그치지 않았다.
신도징은 청했다.
「서쪽으로 현에 가려면 아직 멉니다. 부디 여기 좀 재워 주십시오.」
그 부모는 말했다.
「초가집을 누추하다고 여기지만 않으신다면 감히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신도징은 마침내 안장을 풀고 침구를 펴니 그 처녀는 손님이 유숙하는 것을 보자 얼굴을 밝고 곱게 단장해서 장막 사이에서 나오는데, 그 한아(閑雅)한 자태가 오히려 처음보다 나았다.
신도징은 말했다.
「소랑자(小狼子)는 총명하고 슬기로움이 남보다 훨씬 뛰어났습니다.
아직 미혼이면 감히 자기와 중매를 청하오니 어떻습니까?」
그 아버지는 말했다.
「뜻밖에 귀한 손님께서 거두어 주신다면 어찌 정한 연분이 아니겠습니까?」
신도징은 마침내 사위의 예를 행했다.

(세월이 흘러 신도징과 처녀는 1남 1녀를 낳고 잘 살던 중)
드디어 함께 그 집에 찾아갔는데 사람은 없었다. 아내는 그리워하는 마음이 커서 하루가 다하도록 울었다. 문득 벽 모퉁이의 호피(虎皮) 한 장을 보고 아내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 물건이 아직 있는 것을 몰랐다.” 마침내 그것을 뒤집어쓰니 곧 변하여 호랑이가 되었고 으르렁거리며 할퀴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신도징이 놀라서 피했다가 두 아이를 데리고 그 길을 찾아 산림을 바라보고 며칠을 크게 울었으나 끝내 간 곳을 알지 못했다.
『삼국유사』

김현감호와 비슷하나 아내인 호랑이가 남편을 등지고 다시 호랑이의 모습으로 돌아가 사라져 버린다는 설화이다.
아아 슬프도다. 신도징과 김현 두 사람이 짐승과 접했는데 변하여 사람의 아내가 된 것은 같다. 그러나 사람을 배반하는 시를 주어 그런 뒤에 으르렁거리고 할퀴고 달아난 것은 김현의 호랑이와 다르다. 김현의 범은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상하게 했으나 좋은 방책을 가르쳐 줘서 사람들을 구했다. 짐승도 어질기가 그와 같은 것이 있는데 사람으로서도 짐승만 못한 자가 있으니 어찌 된 것인가.

이 사적의 처음과 끝을 자세히 살펴보면 절 안을 돌 때 사람을 감동시켰고 하늘에서 외쳐 악을 징계하자 자신으로 그를 대신했으며, 신이한 방책을 전하여 사람을 구하니 절을 지어 불계(佛戒)를 강론한 것이다. 다만 짐승의 본성이 어진 것은 아니다. 대개 부처가 사물에 감응함이 여러 방면이어서 김현이 능히 탑을 돌기에 정성을 다한 것에 감응하여 명익(冥益)을 갚고자 했을 뿐이다. 그 때에 복을 받은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삼국유사』

아니나 다를까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 또한 위의 두 설화를 비교하며 신도징을 동정하고 김현과 맺어졌던 호랑이 처녀에 대해 찬향문을써 논평 했다.

2. 기타 호랑이 설화

호축삼재(虎逐三災)·용수오복(龍輸五福)

호랑이는 3개의 재앙을 쫒아내고 가져오고 용은 다섯개의 복을 불러온다는 뜻으로 조선후기 대문에 걸거나 붙이는, 이른바 문배(門排:새해를 축복하는 뜻으로 그린 그림의 의미이다.
호경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성골장군이라 자칭하며 백두산 각처를 유랑하다가 개성 부소산 왼쪽 골짜기에 정착하고 이 곳 여인과 혼인하여 가정을 마련하였다. 어느날 9명의 동네사람과 평나산에 사냥을 갔다가 날이 저물어 굴속에서 자려 할 때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났는데 온자 물리치려고 굴 밖으로 나갔으나. 이미 호랑이는 자취를 감추었고 별안간 굴이 무너저 굴에 있던 9명은 모두 압사하였다.
집에 돌아가 주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기 위하여 먼저 산신에게 제사를 올리자,산신이 나타나 "나는 이 산을 지키는 과부인데 그대와 혼인하여 그대를 대왕으로 삼아 신정을 베불겠다"고 말한 뒤 그를 데리고 사라졌다

이때부터 주민들을 그를 대왕으로 모시고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호경은 밤마다 꿈에 보이는 사람처럼 본처에게 나타나 동침하니 이어 아들을 낳았다. 이가 강충이며 강충은 서강 영안촌 부자의 딸 구치의와 호인하여 보육을 나았다고 전한다.
『고려사』 첫머리 『편년통록』
구룡산(九龍山) 【현의 남쪽에 있는데, 고려 국조(高麗國祖) 성골 장군 호경 대왕(聖骨將軍虎景大王)의 사당이 있으므로 성거산(聖居山)이라 한다. 혹은 이르기를, "신라 때 도(道)를 깨달은 중 의상(義相)이 살고 있었으므로 산 이름을 ‘성거’라 하였다." 하고, 또 호경(虎景)이 사냥꾼 9사람으로 더불어 이 산에 들어가 짐승을 잡다가, 마침 해가 저물어 바윗굴에 들어가 자는데, 별안간 호랑이가 굴앞에 이르러 크게 소리지르니, 9사람이 서로 이르기를, "호랑이가 우리를 잡아 먹으려 하니,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반드시 제 운에 맞는 자가 있으리니, 각기 갓을 호랑이 앞에 던져, 호랑이가 무는 것이 곧 그 사람이다." 하고, 모두 〈갓을〉 호랑이 앞에 던졌는데, 호랑이가 마침내 호경의 갓을 물었다. 호경이 곧 나가 호랑이와 싸우려 하는데, 호랑이는 보이지 않고, 별안간 굴이 무너져서, 9사람이 모두 치어죽고, 호경만 혼자 살았으므로, 산의 이름을 ‘구룡’이라 하였다."

여기서 고려 국조 호경이란 사람은 왕건의 선조인데, 왕건은 자칭 호랑이의 후대로 일컬으며 고려 초기의 왕권을 굳건히 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용의 딸이라고 주장했다. 즉, 인간(그것도 중국인 혼혈)+호랑이+용 혼혈이다.호랑이가 산신으로 모셔진 흔적또한 알 수 있다.
안효부는 충주의 문벌가의 여인으로 17세에 단장최시에게 시집을 갔다,얼마 후 남편이 죽으니 안씨가 몸소 살림을 하며 눈먼 시아버지를 지극히 공양하였다. 안씨의 부모가 불쌍히 여겨 청병하고 안씨를 불러 개가시키려 하니 거짓 승락하고는 밤에 도주하였다.

안씨가 발이 부르터 못갈 지경에 호랑이가 나타나 안씨를 태우고 집에까지 왔다 며칠 후 동제의 함정에 호랑이가 빠졌다 하기에 안씨가 가보니 바로 그 호랑이이므로 사람들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풀어주었다.

시아버지가 죽어 장례를 치르려 하자 호랑이가 와서 묘자리를 점지해 주고 갔다.

그후 양자를 얻었는데 자손이 번성하고 현달하니 단자으이 최씨가 창대하였다.
『동야휘집』
문화에 류모라는 장수가 있었다.[1] 류모는 안악과 신천 사이의 험한 고개에서 호랑이를 만났다. 류모가 호랑이 입 속에 쇠비녀가 박힌 것을 알고 뽑아주니 호랑이가 무척 고마워했다.

어느날 류모의 아버지가 죽어 장사를 지내려 하였다,호랑이가 묘자리를 지켜서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인도했다,이일이 복이 되어 류모는 후일 승상이 돠었다.
『어우야담』

3. 조선왕조실록 속 호랑이 기록

3.1. 호랑이를 통한 기우제에 관한 기록

승정원에 전지하기를, "지금도 중국에서는 기우할 때에 호랑이 머리를 용이 사는 못에 담그곤 하는데, 이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옛 글에도 있으니 담그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안숭선이 대답하기를, "반드시 예조에 내려 논의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세종실록 52권
호랑이 머리를 한강(漢江)의 양진(楊津)에 넣었다.
세종실록 68권
근시(近侍)를 파견하여 삼각산(三角山)·목멱산(木覓山)에서 비를 내리도록 기도하게 하고, 한강(漢江)에서 침호두(沈虎頭)하면서 제사지내게 하였다. 침호두(沈虎頭)란 호랑이 모양을 만들어 물에 담그고 기우제를 지내는 것.
영조실록 31권

호랑이와 기우제의 관련성을 부여하는 조선왕조의 기록 세종때는 유독 가뭄으로 인해 호랑이 머리를 한강에 던져 기우제를 지냈던 기록이 이밖에도 자주 있다.

3.2. 호환에 관한 기록

조선왕조실록의 호환 기록은 635건이나 된다. 호랑이(범)가 나타났다는 기록은 350건, 표범은 51건이다.
이때 8도(八道)에 모두 호환(虎患)이 있었는데, 영동 지방이 가장 심하여 호랑이에게 물려서 죽은 자가 40여 인에 이르렀다.
영조실록 40권
전라도 남원부(南原府)의 백성 우창(禹昌)이 호랑이에게 물렸는데, 그의 아들이 호랑이의 두 눈을 찔러 죽였으므로, 우창이 살아날 수 있었다. 임금이 이를 가상하게 여겨 급복(給復)하도록 명하였다.
영조실록 31권
의주에 호랑이가 떼를 지어 성을 넘어 들어와 사람과 가축을 해쳤다.
인조실록 36권
이 밖에도 호환에 대한 기록은 셀수 없이 많다 호랑이로 인해 해를 입은 백성이 100명을 넘는 다는 등.
호남 태인현(泰仁縣) 사람 이규(李逵)가 갑자기 미친 병을 앓아 스스로 호랑이 귀신(虎鬼)이라고 하며 제 아들을 물어 죽였다. 도신(道臣)이 계문하였다.
현종개수실록 24권

호귀, 즉 창귀에 관한 조선 왕조 실록 기록이다.

4. 관련 문서



[1] 문화 류씨 족보에 따르면 시조 류차달의 아들 류효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