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15:33:43

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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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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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MVP
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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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과이의 前 축구 선수
파일:external/2.bp.blogspot.com/Andrade001.jpg
이름 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
José Leandro Andrade
출생 1901년 11월 22일
우루과이 살토
사망 1957년 10월 5일 (향년 55세)
국적
[[우루과이|]][[틀:국기|]][[틀:국기|]]
신체 180cm[1] | 체중 77kg
포지션 윙 하프[2]
소속팀 [3] 베야 비스타 (1921~1923)
나시오날 (1924~1930)
CA 페냐롤 (1931~1933)
CA 아틀란타 (1933~1934)
우니온 타예레스 (1934~1935)
몬테비데오 원더러스 FC (1935~1936)
AA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1936)
국가대표 34경기 1골 (우루과이 / 1923~1930)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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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번호 <colbgcolor=#ffffff>-[4]
별명 경이로운 흑인 maravilla negra
가족 조카 빅토르 로드리게스 안드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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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선수 데뷔 전2.2. 초기 선수 생활2.3. 국가대표팀2.4. 초대 월드컵 그리고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뒷이야기5. 수상
5.1. 클럽5.2. 국가대표5.3.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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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루과이의 전 축구선수. 선수 시절 포지션은 수비형 미드필더.

우루과이의 초대 월드컵 우승을 이끈 주역이자 프랑크 레이카르트와 함께 역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꼽히는 인물이다.

2. 생애

2.1. 선수 데뷔 전

아르헨티나 출신 어머니를 둔 그는 당시 축구계에서 보기 드문 흑인이었다.[5] 그래도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는 안드라데가 활약하기 전에 이사벨리노 그라딘이라는 흑인 선배[6]가 있어서 안드라데가 뛰는데 사람들의 편견 같은 건 덜했다. 그라딘이 운동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로잡았다면[7] 안드라데는 특유의 운동 능력에 드럼, 바이올린, 탬버린 등 음악적 재능까지 더해진 쾌남이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가 형편이 좋아서 취미로 배운 것은 아니고 가정 형편이 어려운 바람에 먹고 살기 위해 밴드에서 일하느라 배웠다고... 춤 실력도 있어서 로스 포브레스 네그로스 쿠바노스(Los pobres negros cubanos)[8]이라는 댄스클럽을 이끌기도 하였다. 칸돔베라 불리는 춤을 매우 잘췄고 사람들은 그런 그를 카니발의 왕이라 불렀다. 그 밖에도 구두닦이, 신문배달 일도 하는 등 어렸을 때는 고생을 매우 많이 했다.

2.2. 초기 선수 생활

미시오네스라는 클럽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나사치와 함께 베야 비스타에서 처음 프로생활을 시작했고 여기에서 실력을 드러내 우루과이 국가대표팀에도 선발되었다. 하지만 그는 곧 나시오날로 이적했고 나시오날로 이적한 이후 1924년 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린다. 또한 그는 대표팀 동료들과 대표팀에서 우승컵 사냥을 시작했다. 첫해에는 나시오날에서 우승을 차지하는데 성공했지만 그 이후에 나시오날은 한동안 우승을 못했다. 안드라데가 다시 프로팀에서 우승하는 것은 CA 페냐롤로 옮긴 후였다.

2.3. 국가대표팀

국대에서도 그의 운동 능력은 매우 중요했고, 우루과이의 1선 수비에 있어 그의 존재감은 절대적이었다. 다른 동료들과의 호흡 속에서 그가 속한 우루과이는 세계 최강의 위용을 뽐냈고, 올림픽,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등 닥치는 대로 우승컵을 쓸어 모았다.

1924년 올림픽에서 흑인이 운동한다는 것을 당시 유럽에서는 잘 상상하지 못했다. 안드라데가 모든 축구팀에서 유일한 흑인 선수였을 정도. 하지만 안드라데는 엄청난 실력을 보여주며 유럽 축구팬들을 깜짝 놀라게 해주었다. 우루과이가 5게임에서 20득점과 2실점의 성적으로 우승하는 동안 안드라데는 대활약을 펼쳤다.

1924년의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는 명단에만 올랐고 1926년 대회에 다시 참가하였다. 안드라데는 이 대회에서 MVP에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그리고 1928년 올림픽에서 안드라데는 8강전을 제외한 전 경기에 출전하였다. 결국 우루과이는 라이벌 아르헨티나를 재경기에서 꺾고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하였다.

2.4. 초대 월드컵 그리고 이후

초대 월드컵에서 그는 중원을 장악했고, 우루과이는 파죽지세로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그리고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에는 그의 활약을 기리는 동판이 있다고 한다.

월드컵에서 우승하고 난 후에는 신흥 명문팀 CA 페냐롤에 들어갔고 그 이후에는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여러 팀을 돌아다니다 1936년에 은퇴했다.

안드라데는 은퇴 후 파리에 건너갔지만 방탕한 생활로 인해 파리 올림픽에서 받았던 금메달까지 팔아야 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했다. 그렇게 파리에서 거지꼴로 방황하였고 잊혀져 갔다. 1956년에 독일 기자 프리츠 하크가 발견했을때에는 이미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몬테비데오의 빈민가에서 비참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결핵으로 인해 다음해에 사망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그의 가장 대표되는 장점은 역시 운동 능력. 그의 운동 능력은 대단했고 스피드도 빨랐다. 거기에 흑인 특유의 탄력과 뛰어난 지구력이 더해져 당대 최고의 수비 능력을 보여주었다. 거기에 패스 능력도 뛰어나 창의적인 패스로 볼을 배급해주었고 킥 기술도 좋아서 각종 바이시클 킥 등도 능숙하게 구사했으며 클럽에서 득점 빈도도 높았다고 전해진다. 드리블도 뛰어나서 혼자 뭔가를 돌파해 가는 것이 특징이었으며 심지어 많은 선수들을 제치며 혼자 50미터를 질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엄청난 신체능력에 뛰어난 기술, 거기다 경기의 흐름을 읽는 전술안까지 더해져 혼자서 중원을 지배하며 팀 전체에 영향을 끼쳤던 역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중 한 명이다.[9]

안드라데의 저런 초월적인 능력치를 바탕으로 안드라데를 보유한 팀은 이전과는 다른 형식의 경기를 펼칠 수 있었는데,

그 전까지 축구에서의 포지션은 크게 백과 포워드로 구분되어 백 포지션의 선수들은 수비를, 포워드 포지션의 선수들은 공격작업을 도맡아서 하는 엄격한 분업 체제였다. 물론, 백 포지션에서도 풀백과 하프백으로 나뉘었긴 했지만 이는 골대 앞에서 정적으로 골문을 지키는 수비수와, 동적으로 움직이면서 상대의 플레이를 방해하는 수비수의 구분일 뿐 결국엔 풀백이나 하프백이나 수비수의 느낌이 더욱 강했다. 이때 공격시에 백 포지션의 선수들이 공격에 참여하는것은 그저 전방에 있는 공격수들에게 볼을 길게 차주는 정도였다. 당시에 유행하던 235 포메이션 역시 이러한 롱볼 축구에 특화되어있던 포메이션이었다. 이는 영상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는데, 1924년 안드라데의 플레이스타일이 완전히 확립되기 전까지의 경기 양상을 보면, 공격은 온전히 5명의 공격수들에게만 일임하고, 안드라데를 비롯한 하프백들은 뒤에서 가만히 대기만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허나 안드라데는 여타 공격수들 만큼이나 볼 다루는 스킬이 좋았으며, 경기장 전체를 누빌 수 있는 체력까지 보유한 선수였다. 이렇다 보니 안드라데의 플레이가 무르익어 갈수록 상당히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주기 시작하는데, 안드라데는 직접 볼을 몰고 창의적인 패스 실력으로 공격진들에게 배급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백-포워드로 이원화되어 있던 축구가 지금처럼 수비-미드-공격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는 그동안 단순히 공격과 수비로만 이루어져 있던 축구가 축구의 3요소인 공격, 수비, 전환의 완전한 형태를 갖게 되었음을 의미하며, 수비수와 공격수의 이분법적인 분류에서 미드필더라는 새로운 포지션의 탄생을 의미하기도 했다. 안드라데를 기점으로 그전과는 완전히 다른 중원이 강조되는 시대가 열린 셈이다.

IFFHS는 그를 20세기 최고의 하프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현재 평가도 여전히 역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중 한명으로 거론된다. 유럽에서 레이카르트가 주로 최고로 평가 받는다면 남미는 안드라데가 최고로 평가 받는다. 특히 포포투는 남미 리그를 저평가하는 성향이 있었음에도 역대 순위에서 안드라데에게 레이카르트보다 높은 순위를 주었으며[10] 심지어 네덜란드 언론인 부트발 또한 안드라데를 레이카르트보다 높게 평가했다.

4. 뒷이야기

  • 20년 후우루과이 대표팀에서 같은 하프백으로 활약하여 우루과이를 우승으로 이끈 빅토르 로드리게스 안드라데는 그의 조카이다.
  • 안드라데 역시 인종차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924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아르헨티나와의 시합에서 아르헨티나 팬들은 그에게 돌을 던졌고 우루과이 선수들이 그에 대응해 관중들에게 서로 돌을 던지면서 투석전이 펼쳐졌다. 우루과이 선수들은 체포되었고 3연전 중 3번째 시합은 우루과이 선수들의 거부로 치러지지 않았다.
  •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출전 당시 안드라데는 처음에 출전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안드라데의 대체 선수까지 다 뽑아놓고 출국을 준비했지만 안드라데는 갑자기 마음을 바꿔 출전을 알렸다. 대체 선수 에두아르도 마르티네스는 덕분에 네덜란드 관광만 하고 돌아왔다.

5. 수상

5.1. 클럽

5.2. 국가대표

5.3. 개인


[1] 위키피디아 프로필 기준 180cm 이다.[2] 현재의 포지션으로는 수비형 미드필더[3] 다른 기록들을 보면 페냐롤 이후의 클럽 경력이 크게 갈리는 편이다.[4]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5] 약간의 출생의 비밀이 있는데 안드라데는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 출생증명서에 호세 이그나시오 안드라데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아버지라 추측만 하고 있다.[6] 우루과이 대표팀 최초의 흑인 선수로 알려져 있다.[7] 실제로 그라딘은 400m와 200m 달리기 남미 챔피언이었다.[8] 뜻은 가난한 쿠바 흑인들[9] 프랑크 레이카르트와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의 쌍벽을 이루고 있으며 남미에선 역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평가받는다.[10] 포포투 순위에서 정작 주장이자 안드라데보다 국가대표팀에서 비중이 더 컸었던 호세 나사치는 아예 이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