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2 16:51:50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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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
Battle of Hohenfriedberg
Schlacht bei Hohenfried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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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7-AAA-dragoons-charge-l.jpg

▲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 중 프로이센의 드라군 연대의 돌진
시기 1745년 6월 4일
장소

호엔프리트베르크
교전국 <rowcolor=black> 프로이센
(공세)
오스트리아-작센 연합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프로이센 왕국 국기.svg 프리드리히 대왕
지휘관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카를 알렉산더
파일:작센 왕국 국기.svg 바이센펠스 공작
병력 프로이센군: 58,800명
- 보병: 42,000명
- 중기병: 14,500명
- 후사르: 2,300명

대포: 192문
연합군: 59,000명 ↑
- 오스트리아군: 40,000명 ↑
- 작센군: 19,000명 ↑

대포: 122문
피해 사상자: 5,000명[1] 사상자: 9,000명
포로: 5,000명
결과 프로이센의 대승
영향 수어 전투 발발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4. 결과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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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벌어진 가장 중요한 전투로, 1745년 6월 4일 슐레지엔의 호엔프리트베르크에서 프리드리히 2세가 이끄는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격돌한 전투이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작센을 점령하여 드레스덴에 입성할 때,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대왕 (fredrick the great)'이라는 칭호로 불리게 된다.

2. 배경

프리드리히 대왕은 1741년에서 1742년까지 2년 동안 몰비츠 전투코투지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뒤이은 브레슬라우 조약을 체결해 오스트리아로부터 프로이센 왕국슐레지엔 점유를 인정받는 대가로 오스트리아와 더이상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휴전 중 오스트리아가 프랑스, 바이에른을 상대로 우세를 점하는 것을 지켜보며 그들이 슐레지엔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1742년에서 1744년 사이에 군대를 착실하게 단련시켰다. 특히 기병대와 포병대를 재조직하고 강한 훈련을 시켜서 그들의 전투력을 끌어올렸다.

1744년 8월,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군이 라인강에서 프랑스군과 교전을 벌이느라 신경을 못쓰고 있던 보헤미아를 전격 침공했다. 그해 9월 16일, 대왕은 프라하를 점령하고 보헤미아 전역을 장악하기 위해 병력을 분산시켰다.

이 소식을 접한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 카를 알렉산더 폰 로트링겐은 군대를 보헤미아로 이동시켜서 프리드리히 대왕과 맞섰다. 그는 작센군을 합류시킨 뒤 몇개의 보헤미아 마을들을 탈환했지만 프로이센군과의 정면 대결은 회피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적과 회전을 벌이고 싶어서 여러 차례 도발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데다 보헤미아의 민심이 프로이센에게 극도로 적대적이어서 엘베 강 북쪽 지역으로 철수했고, 오스트리아군은 잃어버린 마을들을 더 많이 되찾았다.

결국 프리드리히 대왕은 프라하에서 철수해 1744년 12월 초 슐레지엔으로 돌아왔다. 그 과정에서 프로이센군의 사상자 및 탈영병은 약 15,000명에 달했다.

1745년 봄, 오스트리아와 작센 연합군 63,000명이 슐레지엔을 전격 침공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59,000명의 군대를 소집했다. 카를 알렉산더는 호엔프리트베르크의 언덕을 장악한 뒤 프리드리히 대왕과의 전면전을 또다시 회피했다.

그러던 1745년 6월 3일, 오스트리아 본부의 프로이센인 요원이 카를에게 프리드리히 대왕이 엘베 강을 따라 브레슬라우로 후퇴할 거라고 알렸다. 과연 프로이센군은 얼마 후에 후퇴하기 시작했고, 오스트리아군은 이를 추격하기 위해 언덕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은 사실 브레슬라우로 후퇴할 생각이 없었고, 적이 언덕에서 내려오는 대로 결전을 벌일 작정으로 거짓 정보를 적에게 전달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6월 4일 새벽, 양측은 호엔프리트베르크에서 격돌한다.

3. 전투 경과

1745년 6월 3일 저녁, 오스트리아군과 작센군은 호엔프리트베르크 앞에 넓은 평원에서 동남동 방향을 바라본 상태로 6km에 걸쳐 길게 진을 쳤다. 작센군이 좌익(북쪽)에서 필그림샤인 마을 근처에 자리했고, 오스트리아군은 중앙과 우익(남남서쪽)에 걸쳐 게른테르스도르프, 토머스발다우, 할벤도르프 마을까지 4 km가 넘는 선상에 넓게 자리를 잡았다. 오스트리아-작센군의 1.5~2km 전방에는 스트리가우어-와세르 강이 흐르고 있었으며, 프로이센군은 오스트리아-작센군에서 남동쪽 방향으로 멀리 자리잡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적의 야영지에서 연기가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며 적의 배치를 파악한 뒤 적의 군대 좌측면에 배치된 작센군을 향해 먼저 야간 공격을 가한 뒤에 오스트리아군을 상대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밤 9시에 진영을 나선 프로이센군은 종대 진형으로 적의 전방을 은밀히 가로지른 뒤에, 스트리가우어-와세르 강을 건너 적과 대치하기 위한 전투 대형을 형성했다. 프랑스 출신 후사르 장교인 두물랑 장군은 척탄병후사르 기병대로 구성된 프로이센군의 우익을 지휘하여 적의 좌익에 배치된 작센군을 향했으며, 보병으로 구성된 프로이센군의 본대와 좌익에 배치된 기병대는 오스트리아군을 향해 진군하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과 작센 연합군은 프리드리히 대왕이 추정했던 위치에만 있지 않았고 강 바로 너머에 퍼져 있었으며, 그들의 좌측면은 프리드리히 대왕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멀리 떨어진 필그림샤인 마을 앞을 가로질러 뻗어 있었다. 그래서 본래 계획은 작센군의 좌측면을 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작센군의 정면을 공격하게 되었다. 한편 오스트리아-작센 연합군은 브레슬라우로 후퇴하고 있다던 적이 난데없이 나타난 것에 경악하며 황급히 사방에 흩어진 군대를 집결시키려 했다. 그들은 일단 필그림샤인, 게른테르스도르프, 토머스발다우, 할벤도르프 등지에 방어선을 형성했지만 대열이 제대로 조정되지 않았고 병사들은 매우 혼란스러워 했다.

새벽 4시경 두물랑 장군이 지휘하는 프로이센 우익은 필그림샤인 마을에 도착하여 공격 대형을 편성하였다. 작센군은 필그림샤인 마을과 근처의 진흙밭을 중심으로 급히 방어선을 구축하는 동시에 기병대를 출격시켰다. 프로이센군의 우익 기병대가 적 기병대를 수적으로 압도하면서 밀어붙이는 동안, 척탄병들은 필그림샤인과 게른테르스도르프 사이에 위치한 작센 보병대를 공격했다. 그들은 작센군 포병대의 포격 세례를 무릅쓰고 진흙밭을 넘어 진격해 작센 보병대와 한동안 격투를 벌인 끝에 새벽 7시경에 완전히 제압했다.

한편, 나사우 중장은 프로이센군 좌익의 중기병대를 이끌고 스트리가우어-와세르 강을 건넜다. 그러나 그 와중에 다리가 무너지면서, 약 1/3의 기병만이 강을 건넜고 나머지 부대와 단절되었다. 어쩔 수 없이 나사우 중장은 강을 건넌 병력만으로 오스트리아 우익의 기병대를 향해 용감히 돌격을 가했으나, 수적으로 열세해 압도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를 지원하러 갈 예정이던 한스 요아힘 폰 치텐 소장은 다리가 붕괴된 걸 보고 경악했지만 곧 얕은 여울을 발견하고 그의 후사르 연대와 용기병 연대와 함께 여울을 건너 오스트리아군 우익의 기병대 측면으로 진격했다. 더 많은 기병대가 여울을 가로질러 왔고, 뒤이어 토머스발다우 마을을 장악한 프로이센군 보병대가 그들을 향해 사격을 가하자, 결국 오스트리아군 기병대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패퇴했다.

여기서, 프리드리히 대왕의 천재성이 나오는데, 프로이센 중앙 보병대는 강을 건너 공격 대형을 편성하였고, 오전 8시 30분경 적의 중앙 보병대와 충돌하였다. 이 때 이미 북쪽에서 작센군을 몰아낸 프로이센군의 우익보병대는 꺾어, 좌익 오스트리아-작센 연합군의 보병을 사선으로 밀어붙히기 시작했다. 또한, 프로이센군의 중앙 보병대 중에 좌익에 배치된 부대는 오스트리아군을 밀어낸 뒤에 여전히 격전중이었던 아군의 좌익 기병대를 지원하여 오스트리아 기병대를 패퇴시켰다.

오스트리아 보병대는 맹렬히 사격을 하며 끝까지 저항하였지만 서서히 전선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때마침 프로이센군 용기병대 1500명이 오스트리아군 보병대 사이에 공백이 생긴 것을 보고 용감히 돌격해오자 전열이 붕괴되었다. 용기병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기마 보병대에 가까웠기 때문에 중기병처럼 검을 뽑아들고 돌격하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이 때의 돌격으로 인해 그때까지 악착같이 버티던 오스트리아군이 무너졌고 용기병대에 무려 66개의 군기를 빼았겼다. 게다가 오스트리아-작센 연합군 좌익과 우익 모두 패주하자, 마침내 카를 알렉산더는 퇴각 명령을 내렸다. 프로이센 기병대는 정신없이 도망치는 적을 맹렬히 추격해 수많은 적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리하여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작센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4. 결과

오스트리아군-작센 연합군은 이 전투에서 8,65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으며 포로는 5,080명에 달했다. 반면 프로이센군의 사상자는 4,800명에 그쳤다. 연합군이 격렬히 저항하였지만 전투는 프로이센군의 계획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 전투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둬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대왕'이라는 칭호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호엔프리트베르크 행진곡(Hohenfriedberger March)을 작곡했다.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까지 계속된 오스트리아의 패전으로 인해서, 당대의 유럽인들은 동수의 군대끼리 맏붙는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이 프로이센군을 상대할 수 없다고 여기게 되었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패주하는 오스트리아군을 섬멸하기 위해 추격하다가 석달 뒤 수어 전투를 치른다.

5. 관련 문서


[1] 대부분 기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