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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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비츠 전투 ,1741년 4월 10일,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
코투지츠 전투 ,1742년 5월 17일,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
데팅겐 전투 ,1743년 6월 27일, | 영국-하노버-오스트리아 | 프랑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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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펠트 전투 ,1747년 7월 2일, | 프랑스 | 오스트리아-영국-하노버-네덜란드 |
코투지츠 전투 (1차 슐레지엔 전쟁) Battle of Chotusitz Schlacht bei Kotujitz | ||
<colbgcolor=#5F85BB,#4A4F5A><colcolor=#F9F9F9,#FFD9E5> 시기 | 1741년 5월 17일 | |
장소 | 코투지츠 | |
교전국 | <rowcolor=black> 프로이센 (공세) 승 | 오스트리아 (수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프리드리히 대왕 슈베린 백작 버든 브룩 | 지휘관 카를 알렉산더 |
병력 | 프로이센군: 27,000명 | 오스트리아군: 30,000명 |
피해 | 사상자: 4,800명 (대부분 기병) | 사상자: 6,400명 포로: 12,000명 |
결과 | 프로이센의 승리 - 1차 슐레지엔 전쟁의 종료 -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략적 목표 달성 | |
영향 | 브레슬라우 협정 체결 - 슐레지엔은 프로이센에 양도, 휴전한다. -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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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42년 5월 17일 보헤미아의 코투지츠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끄는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맞붙은 전투. 프로이센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후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지배를 용인한다.2. 배경
1741년 4월 10일 몰비츠 전투에서 패배한 나이페르크는 본국으로 돌아가 방어전에 치중할 뿐 슐레지엔을 노리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바이에른과 프랑스까지 오스트리아를 전격 침공하는 바람에 오스트리아로선 이들을 막느라 슐레지엔에 더이상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한편 프리드리히 대왕 역시 몰비츠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아군 기병대의 형편없는 전투력에 경악해 이들을 재조직하는 데 온 힘을 쏟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당분간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이는 걸 원치 않았다. 결국 1741년 10월 9일, 양국은 클라인-슈넬렌도르프에서 밀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점유를 용인했고 프로이센은 그 대신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합의했다.그 사이 바이에른과 폴란드 연합군은 1741년 11월 오스트리아령 보헤미아의 수도인 프라하를 점령하였고, 바이에른의 선제후인 카를 알브레히트는 이 기세를 몰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에 올랐다. 하지만 그 동안 오스트리아군이 전격적으로 비어있는 바이에른으로 밀고 들어가서 1742년 2월경에는 바이에른의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1742년 1월,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와 맺었던 비밀 협정을 파기하고 전쟁에 다시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오스트리아가 위기에 빠지자 이를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베를린을 떠나 작센의 수도 드레스덴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작센 선거후를 설득해 작센군을 자신의 지휘하에 배속시키게 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보헤미아로 진격했지만 현지인들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고, 이 때문에 모라비아 남부의 농촌 지대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작센군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강행군을 요구하자 갑자기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5월에 카를 알렉산더 백작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이 프라하를 되찾기 위해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를 요격하기로 결심하고 북서쪽으로 진군하였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대왕의 예상보다 일찍인 5월 15일, 양군은 보헤미아의 코투지츠 마을 인근에서 조우하였다.
3. 전투 경과
1742년 5월 프리드리히 대왕은 약 1만명의 프로이센 군대와 함께 카를 공작이 프라하로 진군하는걸 막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하였고, 동생인 레오폴트 왕자에게 1만 8천명의 본대를 이끌고 뒤따라오게 했다. 5월 15일 프리드리히 대왕은 남쪽 방향에 있는 츠샤슬라우 마을 근처의 한 지점에서 야영하고 있는 오스트리아군을 목격했지만 퇴각하고 있는 단순한 도적떼라고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다. 다음날 같은 길을 통해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위대를 따라가던 레오폴트 왕자는 이들이 단순한 도적떼가 아닌 오스트리아군 본대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급히 메시지를 보냈으며, 전위대와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 새벽 4시까지 강행군한 뒤 코투지츠 마을의 북쪽에서 숙영하였다. 코투지츠 마을은 츠샤슬라우에서 북쪽으로 약 4km 떨어져 있었으므로, 오스트리아군과 레오폴트 왕자의 군대는 상당히 가까운 편이었다.5월 17일 새벽, 프리드리히 대왕은 동생에게 보병대를 이끌고 코투지츠 마을을 점령하고 주변에 군대를 배치하여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레오폴트 왕자는 코투지츠 마을을 옆에 끼고 보병을 남쪽으로 향하게 정렬시키고 좌우에 기병대를 배치하였는데, 공간이 넓은 우익(서쪽)에는 버든브록 중장이 이끄는 다수의 기병대를 배치하였으며 좌익(동쪽)에는 발도우 중장이 이끄는 소수의 기병대를 배치하였다. 그리고 버든브록 중장의 기병대 뒤에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도착하여 부대를 배치할 공간을 확보해 두었다. 자신의 임무를 멋지게 성공시킨 것이다.
한편 카를 공작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은 5월 17일 아침 일찍 프로이센군이 합류하기 전에 모리츠의 본대를 공격하고자 했지만, 오전 7시까지 공격을 시작하지 못했다. 오스트리아군은 남쪽 방향으로부터 진군해 왔는데, 살짝 동쪽으로 틀어진 방향으로 진격했기 때문에 좌익이 버든브록의 기병대에게 노출되었다. 오스트리아군의 중앙에는 보병이 두 줄로 늘어섰으며, 좌익에는 다수의 기병대가 포진했고 우익에는 소규모 기병대가 배치되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부대는 오전 8시 경에 전장에 도착했는데, 보병대를 배치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 버든브룩 중장에게 적을 공격하고 진격을 방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버든브룩은 이 명령을 받들어 2파로 나누어 적의 좌익으로 쳐들어갔지만, 그나마 제대로 대열을 맞추어 돌격한 1파와는 달리 2파는 대열이 흐트러져서 돌격력을 상실했다.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거센 역습을 가했고, 양측은 전장의 서쪽 지역을 둘러싼 난투극을 벌였다.
한편, 오스트리아 보병대는 코투지츠 마을에 배치된 레오플트 대공의 프로이센 보병대를 향한 강력한 공격을 개시했다. 이때 마을의 집들은 목조 건축물이기 때문에 쉽게 불이 붙어서 프로이센군에게 불리했다. 이에 프로이센군은 적의 화공으로 고전하다가 코투지츠 마을에서 떨어져야 했다. 프로이센군의 좌익을 담당한 발도우 중장의 기병대는 전황을 역전시키고자 앞을 가로막은 적의 소규모 기병대를 격파하고 오스트리아군의 후방을 가로지른 뒤에 버든브록 중장의 기병대와 합세해 오스트리아군 좌익 기병대를 패퇴시켰다.
당시 건조한 날씨 때문에 기병대가 흙먼지를 엄청나게 일으켰고, 여기에 코투지츠 마을에서 퍼지는 연기가 더해져서 시야가 매우 불량하였다. 오스트리아군이 코투지츠 공격에 열을 올리는 사이,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의 보병대를 코투지츠 서쪽의 전장 한가운데에 있는 고원에 일부 보병대를 은밀히 이동시켰다. 이후 그는 적이 코투지츠 마을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사이 은밀히 고원에 대포를 옮겼고 오스트리아군의 측면을 향해 발포하였다. 이러한 공격은 오스트리아군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였고, 뿐만 아니라 기병대가 아군의 측면을 보호해 줄 수 없었기 때문에 카를 공작은 오스트리아 보병대를 후퇴시켰다. 이에 부하들은 적을 추격하자고 제의했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은 아군 기병대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이렇게 해서 코투지츠 전투는 프로이센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4. 결과
프로이센군은 코투지츠 전투에서 4,8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으며 포로 천 명을 상실했다. 반면 오스트리아군은 6,400명의 사상자를 입었고 대포 18문을 상실했으며 포로 12,000명이 발생했다. 명불허전의 프로이센 보병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분전했던 것과는 달리 프로이센의 기병대는 여러 유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기대에 못미치는 활약을 보였다.전투는 프로이센군의 판정승으로 끝났지만 전황을 크게 바꾸지는 못했다. 코투지츠 전투 후에 카를 알렉산더의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로부터 프라하를 탈환하기 위해 서쪽으로 진군하였고, 프리드리히 대왕과 그의 군대는 코투지츠 전장에서 약 30마일 떨어진 쿠텐부르크에 주둔지를 건설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기병대가 여전히 훈련이 부족하다는 것을 체험하였고, 오스트리아는 또 다른 강적인 프랑스를 상대하는 동안에는 프로이센군과의 전투를 피하고자 하였다. 결국 코투지츠 전투로부터 한달 후인 1742년 6월 11일,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와 브레슬라우 조약을 맺기로 했다. 이리하여 프리드리히는 슐레지엔 지배권을 인정받는 대신 오스트리아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단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바이에른을 압도하는 걸 지켜보며 언젠가는 저들이 슐레지엔을 되찾으려 들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 1742년부터 1744년까지 군대를 재편성하고 강한 훈련을 통해 기병을 육성하였다. 그리고 1744년 8월,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군이 라인강에서 프랑스군과 교전을 벌이는 틈을 타 보헤미아를 전격 침공했고, 이후 오스트리아군과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를 치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