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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용호

<colbgcolor=#D91122><colcolor=#fff> {{{#ffffff 2대 천주교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프란치스코}}}
洪龍浩 | Francis Yong-ho HONG
파일:홍용호 주교.jpg
출생 1906년 8월 24일
사망 1949년 5월 14일 이후
1. 개요2. 생애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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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 가톨릭주교세례명은 프란치스코 보르지아이다.[1]

천주교 평양교구의 제6대 교구장으로, 1943년 3월 9일부터 1950년 10월까지[2] 재임하였다.

1944년 천주교 평양대목구장 주교로 임명되었지만, 1949년 북한 정부에 의해 체포·감금되어 이후의 소식은 불명이다. 1906년 출생이기에 현재 시점으로는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3]

2. 생애

1906년 10월 12일 평안남도 증산군 초곡면 불일리(現 평원군 화진리) 살구재에서 태어났다. 1933년 5월 25일 아드리앙 조셉 라리보 주교의 집전으로 사제서품을 받고 신부가 되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평양교구를 맡고 있던 미국 메리놀 외방선교회 소속 신부들과 함께 일본 제국 경찰에 간첩 혐의로 체포당해 3개월 동안 수감된다.

1944년 3월 24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평양교구 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일본에 징발되어 있던 평양 관후리 주교좌대성당을 회복하기 위해 북한 공산당 정권과 협상하여 1946년성당 부지를 되찾은 후,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했다.[4]

1949년 5월에 덕원자치수도원 신상원(辛上院)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의 체포 및 베네딕토회 수도원의 몰수에 항의하기 위해 북한 정부 인사와 면담하러 가는 도중 5월 14일에 체포되어 감금된 후 행방불명되었다. 북한 외무성 제1부장을 지낸 박길룡의 증언에 따르면 홍용호 주교는 1950년 국군/UN군의 북진으로 북한군 지도부가 급히 퇴각하는 과정에서 1950년 10월 18일 북한 내무성 정보처 한규만 소좌에 의해 총살당했다고 한다.[5]

1962년 3월 10일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평양교구로 승격되어 설립되었을 때, 초대 교구장 주교에 임명되었다.

2013년 6월 교황청에서 공식적으로 홍용호 주교가 사망한 사실을 인정했으나, 사망 시점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은 바 있다.

북한에는 한국 전쟁 후 성당이 존재하지 않았으나, 1987년 북한 정부 후원 아래 전쟁 전 나이든 신자들을 중심으로 조선카톨릭교협회[6]와 산하 성당건립준비위원회가 결성되고, 그 이름으로 1988년 평양 장충동장충성당이 건립되었다. 성당은 건립 당해 방문한 교황청 사절에 의해 축성되었으나, 수십 년 넘게 상주 사제 없이 가끔 남한 천주교 민족화해위원회 소속 사제나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사제들이 방북하거나 재미동포 사제 등 외부의 사제들이 부정기적으로 사제가 방문할 뿐이고, 평소에는 신도회장과 부회장이 나머지 신자들과 함께 공소예절을 거행하고 있다.

3. 관련 문서


[1] 프란치스코로도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보르지아이다. 관련 자료.[2] 북한수용소에서 선종했을 가능성이 큰데, 관련 기록이 없어 정확한 날짜를 특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3] 사람의 기대 수명이 120살 정도니 생존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으나, 해방 직후 사회주의 혁명 과정에서 국가 무신론을 천명하고 종교를 탄압하던 배경에선 가톨릭주교가 무사할 리가 없고, 한국 전쟁을 거치는 동안에 제대로 된 수용 생활을 받았을 리도 없어서 생존 가능성은 극히 낮다.[4] 그러나 성당은 다 완공되기 전에 다시 공산당에 빼앗기고 만다. 국군의 평양 수복 당시 확인을 해보니 소년궁전으로 쓰이고 있었다고 한다. #[5] 당시 홍용호 주교는 천주교 성직자 및 신자들, 정치범들과 같이 수감되어 있었는데 이 중에는 조만식도 있었다고 하며, 조만식도 이 때 같이 처형되었다고 한다.[6] 가톨릭이 아닌 카톨릭으로 표기한다. 관련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