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7-22 04:37:17

화진선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화진선
化進宣[1]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파일:화진선.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만선(萬善)
본관 진양 화씨[2]
출생 1890년[3] 3월 15일
경상도 진주목 청암면 궁항리
(현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궁항리)
사망 1942년 9월 23일[4] (향년 52세)
경상남도 진주부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363호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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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1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화진선은 1890년 3월 15일 경상도 진주목 청암면 궁항리(현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궁항리)에서 아버지 화재식(化在式, 1847. 8. 5 ~ 1908. 1. 22)과 어머니 인동 장씨(1850. 10. 4 ~ 1912. 11. 12)[5]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산청군 단성면 입석리로 이주하였다.

그는 진주향교의 전교(典校)를 지내다가, 1919년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에서 사람들을 모아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그 뒤 1920년 음력 4월 경상북도 칠곡군에 사는 홍재욱(洪在旭)의 권유로 흠치교 신자가 되었고, 과거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권유해 군자금을 수합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했다. 그러다가 1920년 6월 초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사무소에 가서 17촌 지간의 족숙(族叔)이자 청암면장이던 화창조(化昌兆, 1882. 7. 20 ~ 1936. 3. 19)[6]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흠치교의 주재자 차경석(車京錫) 천자(天子)는 충청남도 계룡산에서 조선의 천자가 될 준비를 하는 자로 측근에는 다수의 인물이 모이고 있다. 흠치교에서는 연월일시각의 비호(秘呼)가 있는데 년(年)은 천자, 월(月)은 재상, 일(日)은 판서, 시(時)는 감사, 각(刻)은 군수이다. 지금은 비호의 각에 해당하는 군수를 모집하고 있으므로 신속히 동교에 가입할 것이며 지금부터 2개월을 거치면 조선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다."

이후 동지를 규합하여 거사를 준비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1921년 5월 3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에 대해 면소 판결을 받았으나, 검사 측의 공소로 1921년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어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고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진주부에서 은거하다가 1942년 9월 23일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3월 1일 3.1절에 화진선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그리고 당초 진주시 옥봉동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던 그의 유해를 2011년 4월 17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했다.

[1][2] 11세.[3] 진양화씨세보 64쪽에는 1889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4] 음력 8월 13일.[5] 장인구(張仁九)의 딸이다.[6] 진양화씨세보 44쪽에는 1881년 4월 16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본관은 진주(晉州). 도독(都督)을 지낸 화섭(化燮)의 12세손으로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궁항동에 거주했다.# 일찍이 한문을 수학하고 대구재무감독국서기를 지냈으며, 1919년부터 1928년까지 초대 하동군 청암면장을 역임했다. 그러다가 1928년 7월 23일 공금횡령 혐의로 청암면 서기와 함께 검거되었고, 7월 25일 배임·횡령죄로 진주검사분국에 송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