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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기선

황기선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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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1.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83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34번
유남호
(1982)
황기선
(1983~1985)
박정일
(1986~1987)
OB 베어스 등번호 28번
오현조
(1984)
<colcolor=#fff> 황기선
(1986~1987)
구재서
(1988~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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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기선
黃起善 | Hwang Ki-Seon
출생 1958년 6월 2일 ([age(1958-06-02)]세)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경서중 - 유한공고
포지션 투수
투타 우사우타
프로 입단 1983년 연습생 (해태)
소속팀 상업은행 야구단
해태 타이거즈 (1983~1985)
OB 베어스 (1986~1987)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실업야구 시절2.2. 해태 타이거즈2.3. OB 베어스
3. 연도별 성적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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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해태 타이거즈, OB 베어스의 사이드암 투수이다.[1]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실업야구 시절

1973년 서울시중·고 춘계리그 B조 3일차 경기에서 장충중을 상대로 4-0의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

1975년 서울시중·고연맹 추계리그에서 성동고를 상대로 9이닝 9탈삼진을 포함한 5-0의 퍼펙트 게임을 기록했다.[2] 또한 황기선은 이 대회에서 최우수선수상과 우수투수상을 얻었고 그가 속한 유한공고는 선린상고를 꺾어 우승을 차지했다. [3]

1977년 상업은행에 입단한 뒤 제4회 부산시장기쟁탈 전국 실업대회에서 철도청을 상대로 9탈삼진을 뽑아내며 3-0으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했고, 대통령배쟁탈 전국실업연맹전에서 7승을 기록해 김재박과 함께 신인왕 타이틀을 따냈다.

2.2. 해태 타이거즈

이후 1983년, 해태 타이거즈에 25살의 나이로 입단하였다. 등번호는 34번. 이 해에는 선발 3경기 포함 19경기에 출전해 66⅓이닝 4승 4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31을 기록했고 그 활약으로 1983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어 우승반지를 손에 넣었다.[4]

이듬해인 1984년에는 전년도보다 더 많은 38경기에 출전해 124⅓이닝 4승 7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3.76을 기록했다. 심지어 선발로도 완투 2회를 포함한 6경기에 출전해서 전천후 투수로 활약했다.[5][6]

그러나 1985년부터 혹사의 영향으로 부진하더니 1986년 3월 25일에 한대화의 2-1 트레이드 대상이 되며 결국 3천 9백만원에 내야수 양승호와 함께 OB로 트레이드 됐다.[7]

2.3. OB 베어스

그렇게 트레이드된 OB에서는 1986년 11경기 24⅓이닝, 1987년 2경기 1⅔이닝만 던진채 별 존재감 없이 지내다 1988년 은퇴를 했다.

3.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3 해태 19 66⅓ 4 4 1 2.31 50 3 14 34 27 17 0.97
1984 38 124⅓ 4 7 1 3.76 110 10 55 65 70 52 1.33
1985 17 34⅔ 0 1 0 6.49 40 3 19 15 27 25 1.70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6 OB 11 24⅓ 0 0 0 4.44 26 1 15 6 14 12 1.69
1987 2 1⅔ 0 0 0 0.00 3 0 0 2 3 0 1.80
KBO 통산
(5시즌)
87 251⅓ 8 12 2 3.80 229 17 103 122 141 106 1.31

1984년 성적을 보면 잘 알려지지 않은 투수지만 혹사의 흔적이 보인다

특기할 사항으로는 프로로 뛴 기간이 5시즌밖에 되지 않는데도 통산 보크가 4개나 된다.

4. 관련 문서



[1] 이 영상의 13분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어깨선보다 낮지만 허리보단 높은 선의 위치에서 던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타자는 삼미의 장정기.[2] 참고로 이 경기는 1시간 31분 만에 끝났는데 이 기록은 1985년 9월 21일 구덕야구장에서 열린 롯데 - 청보전의 1시간 33분보다 2분이나 빠른 기록이다.[3] 그러나 유한공고 야구부는 1976년을 끝으로 해체됐다.[4] 당시 영상을 자세히 보면 백넘버 34번이 보인다.[5] 그러나 이 해의 선발승은 단 1승 밖에 없었고 이 1승이 커리어 유일의 선발승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완투로 이뤄낸 것이다.[6] 그의 유일한 완투승은 1984년 8월 30일 광주에서 열린 MBC청룡전 5-1 완투승이다. 참고로 이 경기는 8회 강우 콜드게임으로 끝났다.[7] 1985년 주동식의 재계약 불발과 1986년 황기선의 OB행으로 사이드암 스로-언더핸드 스로 투수 쪽에 공백이 생기자 해태에서 김성길 영입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동식이 김성길에게 어떻게든 기를 써서 그의 해태행을 만류했고 그렇게 김성길은 1987년 시즌 중반이 되어서야 해태가 아닌 삼성에 입단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