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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1. 개요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현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한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여성용 금동신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2. 내용
길이 348mm[1]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의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금동제 신발로, 제작 연대는 대략 4세기 후반~5세기 초반(서기 300~400년대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같은 시기에 제작되어 황남대총에 함께 묻힌 황남대총 북분 금관,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 황남대총 북분 금팔찌 및 금반지, 황남대총 북분 유리잔,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 황남대총 북분 은제 관식, 황남대총 북분 금제 고배, 황남대총 북분 은잔, 황남대총 북분 금은제 그릇 일괄, 황남대총 남분 금제 허리띠, 황남대총 남분 금제 관식, 황남대총 남분 은관, 황남대총 남분 은제 팔뚝가리개 등 7만여점에 이르는 유물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발굴 당시 남성왕의 무덤인 남분에서는 황남대총 남분 금동신발이 발견되었고, 여성왕의 무덤인 북분에서는 이 금동못신이 발견되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역사카페 부흥
이 신발의 특징은 바닥에 수많은 금속 못이 박혀있는 스파이크 형이라는 것인데, 이는 고구려 지역 금동신발의 고유 양식으로, 고구려 문화권 이외의 지역에서는 오직 신라 황남대총에서만 발견된 것이다. 특히 이 신발은 북한 평양 대성산성에서 발견된 고구려 금동신발과 거의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못신들은 오늘날의 아이젠과 같이 미끄럼 방지의 목적이 있었는데, 경사가 급한 산성, 특히 눈덮인 산성에서 주로 활동하던 고구려 무사들의 모습에서 자주 보이는 고구려 고유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환도산성, 용마산 보루, 집안 마선구, 집안 우산묘, 집안 삼실총 등에서 확인된다.
이와 같이 고구려에서 유행하던 신발이 뜬금없이 신라 무덤에서 발견된 이유로는 여러가지가 논의되고 있다. 우선 신라인들은 동시기 다른 국가의 사람들과는 달리 영육일치사상(靈肉一致思想)의 형성으로 인해 남다른 미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남녀노소 구분 없이 굉장히 패션에 민감했는데, 이 때문에 신발 또한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다양한 형태와 재질의 것들이 유행하였다.
사진 출처 : 경주 황남대총 북분 출토 금동못신 연구
삼국시대의 신발은 고급형태의 '화'와 저급형태의 '리'로 나뉘어지는데, 간단하게 짚신이나 나막신을 주로 사용하던 타국과는 달리 신라는 '리'를 사용하는 최하층 계급마저도 가죽과 비단 등을 사용한 아름다운 신발들을 신고 다녔음이 중국과 일본, 한국의 문헌에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패션에 대한 열정이 타국의 신발양식을 수입해온 이유로 추정되기도 한다.
또한 이 당시 신라가 고구려와 각별한 동맹 관계였다는 점도 고구려 양식의 신발이 신라 무덤에서 발견되는 이유로 꼽힌다. 4세기 경 신라와 고구려는 우호 관계였는데 이 시기 고구려는 372년에 고구려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전쟁에서 전사하는 등 백제와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정치역학적인 측면에서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고구려와 신라는 서로 연합하여 백제를 견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관계는 399년 백제와 왜의 신라 연합공격을 고구려가 보기 5만명을 보내 막아준 후부터 고구려가 신라에 내정 간섭을 하기 시작하면서 일방적인 주종형식으로 변질되었고, 이후 고구려가 신라를 완전히 자신들의 영향력 안에 넣기 위해 신라 왕자를 질자로 보낼 것을 요구하면서 완전히 틀어지게 되었다. 자신들을 마치 식민지처럼 대하는 고구려에 매우 화가 나버린 신라는 이후 고구려가 5세기부터 남진정책을 펼치기 시작해 475년 백제의 수도인 한성까지 공격해 백제의 개로왕이 죽고 망국의 위기에 빠지자 대규모의 백제 구원군을 보내 백제를 지켜주면서 고구려에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사진 출처 : 경주 황남대총 북분 출토 금동못신 연구
이 사건 이후로 신라권에서는 더 이상 고구려 양식의 유물들이 발견되지 않는다. 신발 또한 마찬가지로 황남대총에서는 고구려 양식의 이 못신이 발견되었지만 이후 축조된 금관총과 식리총 등에서는 신발에서 고구려 양식이 점차 사라져간다. 이는 황남대총이 축조될 당시에는 신라가 고구려와 우호 관계였으나 이후 금관총, 식리총 축조 때에는 고구려와 점차 대립하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 한중일 학계에서는 황남대총의 축조 시기를 5세기로 잡았었으나, 2020년대의 최근에는 내물 마립간 시기인 4세기, 즉 서기 300년대 무렵으로 한세기 앞당겨 보고 있는데, 이 못신 또한 신라와 고구려가 우호 관계이던 300년대에 이 무덤이 축조되었음을 보여주는 주요 증거 중 하나이다.
사진 출처 : 경주 황남대총 북분 출토 금동못신 연구
이 황남대총 북분 못신은 고구려 문화권 이외의 지역에서 발견된 유일한 못신이다. 이후 고구려 문화의 영향에서 벗어난 신라에서는 5세기 중반부터 이 신발 바닥의 못이 점차 동그란 황금 달개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모습으로 변화되었고, 이웃 가야와 일본으로 넘어가 6~7세기 일본 금동신발의 모태가 되었다.
4세기~5세기 경 신라의 정교한 황금 세공 기술을 보여주는 유물로, 신라시대 금세공기술 및 금속공예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