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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홍/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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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선홍의 클럽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바이어 04 레버쿠젠

건국대학교를 졸업 후 1991년 K리그의 드래프트 제도를 거부하고 차범근이 활약했던 독일 분데스리가 소속 레버쿠젠에 진출하나 2군 리저브팀이었다. [1]

3. 부퍼탈 SV

1992년 2부리그 부퍼탈로 이적한 후 5경기에서 3골 3도움을 몰아치며 재능을 입증했으나 6번째 경기에서 십자인대가 파열된 후 6개월을 재활로 보낸 뒤에 복귀하였는데, 다시 세 경기만에 무릎 연골 파열로 2차 수술을 받았다. 결국 안정적인 환경 속에서 국가대표 생활을 하기 위해 한국으로 리턴.[2][3]

이때 K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기록 하나를 남기게 되는데 바로 "1 VS 8 지명권 트레이드". 이전 해의 드래프트 결과로 황선홍을 지명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완산 푸마[4]포항제철 아톰즈소속 팀 선수 8명과 황선홍 한 명을 바꾸는 사상 초유의 트레이드를 제안하게 된다. 당시 신생 팀이던 완산 푸마는 한 명이라도 선수가 아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결국 황선홍은 1993년부터 포항 소속으로 뛰게 된다.[5]

4. 포항제철 아톰즈-포항 아톰즈/스틸러스

파일:황선홍선수.jpg

1993년부터 1998년 7월까지 포항에서 활약하며, 홍명보, 라데 보그다노비치, 최문식, 박창현, 박태하 등의 전설적인 동료들과 함께 포항의 1990년대 황금콩라인시대의 한 축을 이뤘다. 특히 라데와의 공격 투톱은 지금도 회자가 될 정도이며 둘이서 16골을 합작했다.[6] 본인도 신문 인터뷰에서 "나와 라데의 투톱을 능가하는 투톱은 이후로 K리그에 없는 듯 하다."라고 인정했다. 국가대표 차출이 없었던 1995시즌에 8경기 연속골 기록을 포함, 11골 6도움을 기록하며 득점 3위에 오른 것이 커리어 하이.

1997~1998년 포항 스틸러스의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現 AFC 챔피언스 리그) 2연패에 일조했지만, 아쉽게도 정규리그와 FA컵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7] 95 코리안리그 챔피언 결정전에서의 준우승이 전부.

5. 세레소 오사카

1999년 J리그 득점왕 시절

프랑스 월드컵 이후 1998년 7월, 황선홍은 포항에서 J리그세레소 오사카로 이적, 그 이듬해인 1999 시즌 26골로 J리그 득점왕을 차지한다.[8] 이는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한국인 선수가 외국 리그에서 득점왕을 차지한 사례다.[9]

그리고 한국인 선수 최초의 J리그 베스트11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J리그 유일의 한국인 득점왕으로 현재까지도 이 기록은 안 깨지고 있다.

6.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0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국내 무대에 복귀하나 부상으로 정규 리그에서 뛰지 못하고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에서 같은 팀이었던 데니스와 경기 중 드잡이질[10]을 한 끝에 맞트레이드 형식[11]으로 J리그의 가시와 레이솔로 임대를 가게 된다.

7. 가시와 레이솔 (임대 후 완전 이적)

파일:attachment/Hwang_Sun-Hong_Kashiwa_Reysol.jpg
2000년 5월 샤샤와 임대 형식의 맞트레이드가 성사되어 J리그가시와 레이솔에 2001년 말까지 임대되었다. 韓日 빅트레이드 황선홍-샤샤 그러나 2000년 7월 샤샤수원 삼성 블루윙즈에서 방출되면서 수원 유고용병 샤샤 방출키로 황선홍 역시 2000년 7월 가시와 레이솔에 완전이적 하는 것으로 신분이 정리되었다. 황선홍, 지난해 가시와 레이솔로 완적이적.

당시 같은 팀에 있던 홍명보, 유상철과 함께 코리안 트리오로서 맹활약했다.

그러나 월드컵이 끝나고 1달 후인 2002년 8월, 월드컵 때 입은 부상으로 결장이 계속되고 나이가 나이인지라 회복자체가 불투명하자 방출되었고 8월 17일 고별전을 끝으로 일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8. 전남 드래곤즈

가시와 레이솔에서 방출된 이후 황선홍은 흔히 말해 국제미아 신세가 되었다. 초반에는 미국 진출을 타진했으나 찾아주는 구단이 없어 포기했고, 터키진출은 계약기간에서(자서전에 따르면 선수본인은 단기계약을 원했으나 팀은 더 긴 계약기간을 원했다고 한다) 조건이 맞지 않아 무산되었다. 이후 월드컵에서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나이와 부상으로 인해 다른 나라 구단에서도 찾아주지 않아 은퇴 위기까지 몰렸다. 그러나 2002년 9월 귀국 후 K리그에 발길을 돌렸고, 대전 시티즌과 전남 드래곤즈 중 전남 드래곤즈를 선택해 이회택 감독과 면담을 하고 2002년 10월 월봉 2000만원에 계약을 했다.

그러나 정강이 뼈 부상이 심각해 재활훈련에도 불구, 단 1경기도 출전하지 못하고 시즌을 마감했다.

9. 현역 은퇴

황선홍은 시즌 종료 후인 2002년 12월 정확한 진단을 받기 위해 독일로 건너갔는데, 의사에게서 "6개월 이상의 안정이 필요하다" 라는 진단을 받고 은퇴를 결심, 2003년 2월 9일 기자회견을 통해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지도자의 길을 갈 것을 발표하였다.[12]

K리그 통산 성적은 64경기 31골 16어시스트. 해외에 나가있었던 시즌도 꽤 되고 부상으로 허비한 시즌도 상당하며, 90년대에는 리그에 대한 배려가 너무 부족해서 항상 국대 차출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8게임 연속골 기록이나 라데와의 투톱이 준 임팩트를 제외하면 명성에 비해 K리그 커리어는 빈약한 편이다. 그래서 선수 황선홍이 한국축구의 레전드라는 점은 모두가 인정하지만 K리그 레전드라고 하기는 힘들다. 이 때문에 2023년 프로축구연맹이 선정한 K리그 명예의 전당 후보에서 탈락하는 굴욕을 당했다. 거기다가 감독으로서도 용두사미 행보를 보이고 있는지라 어느쪽으로나 K리그의 레전드가 되기에는 아쉬운 모습만 보이고 있다.[13][14]


[1] 전반기 10경기 10골을 득점하며 좋은 활약을 보여서 후반기 1군 선수들과 함께 훈련했지만 경기에는 내보내주지 않았다고.[2] 첫번째 십자인대 파열로 인해 6개월을 재활로 보낸 뒤 복귀하였는데 다시 두 경기만에 무릎 연골 파열로 2차 수술행. 황선홍은 이때 지금의 아내인, 당시 독일어학연수를 와있던 정지원 씨를 만나게 된다. 아는 후배들을 따라 대학 축제에 놀러갔던 그는 정지원 씨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고, 후배를 보채서 소개팅까지 성공. 첫 만남 후 무릎 부상을 당해버려 거동이 힘들다고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정지원 씨는 어학연수 일정이 끝났음에도 6개월간 귀국을 늦춰가며 병수발을 했다. 귀국 후 그 해 크리스마스에 결혼식을 올린다.[3] 군 얘기가 안 나오는 걸로 봐서는 저 십자인대 파열로 면제된 듯 하다.[4] 이 때는 사실상의 전신인 완산 푸마. 이듬해 전북 버팔로로 구단명이 변경되었고 자금난으로 해체된 후 현대자동차의 스폰서로 현재의 전북 현대 모터스로 재창단된다. 그러나 전북 버팔로와는 엄연히 별개의 팀으로 되어 있다.[5] 이 때 포항에서 트레이드된 선수 중 한 명이 이흥실이었다. 그러나 이흥실은 전북에서 한 경기도 뛰지 않고 바로 은퇴했다.[6] 김현석-신홍기, 우성용-마니치 콤비와 함께 데몰리션 듀오의 27골, 신태용-박남열의 17골을 잇는 공동 3위 기록을 보유중이다.[7] 포항이 1996년 제1회 FA CUP 축구대회에서 우승했지만, 정작 본인은 아시안컵과 일정이 겹쳐 불참했고, 유일하게 출전한 1997년 제2회 FA CUP 축구대회 준결승에서 천안 일화 천마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8] 이로부터 16년이 지난 2014년의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포항 스틸러스의 감독으로 세레소와 경기를 치르자 적장임에도 엄청난 콜을 받을 정도로 사랑받았다.[9] 무려 23년이 지나고서야 프리미어 리그에서 손흥민이 득점왕을 거머쥐면서 유일 타이틀은 사라지게 됐다.[10] 그 경기때 황선홍은 어깨 탈골 부상을 당했다. 그런데 부상 정도를 자세히 모르는 데니스가 황선홍을 건드리고 말았고, 황선홍은 데니스의 멱살을 잡았다. 데니스로서는 걱정해서 그랬다가 드잡이를 잡힌 나머지 빡쳐서 성질을 냈고 그 결과 황선홍의 임대가 결정되었다. 수원 입장에선 팀에 온지 얼마 안 되는 황선홍 보다 데니스가 전력적으로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남겼다.[11] 이 트레이드가 이후 개그적인 상황을 야기했다. 이 트레이드 전에 수원은 당시 유고 특급 용병 샤샤를 가시와로 먼저 보냈다. 샤샤와 절친이었던 박건하는 매우 아쉬워 했는데, 얼마 후 박건하도 가시와로 임대갔다.(...) 그러다 일본에서 적응하지 못하던 샤샤가 황선홍과 맞트레이드 되면서 두 사람은 다시 작별을 나누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박건하도 다시 수원으로 돌아왔다.(...) 덕분에 둘 다 상당히 멋쩍은 반응이었다고. 박건하는 샤샤보고 '이제 너 얼굴 보는 것도 질림ㅋ'라는 반응을 보였다.[12] 원래는 2003년 시즌 일부를 뛸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상으로 무산되었다.[13] 비슷한 케이스가 홍명보. 황선홍처럼 부상이나 여론의 비난으로 부침이 있진 않았지만 명성에 비해 K리그 커리어가 빈약한 편이고 J리그 활약상이 더 돋보인다는 점은 황선홍과 같다. 게다가 K리그 입단과정에서 파문을 일으키고(이거야 포항구단도 한 통속이었다지만) 선수생활 말년에 LA갤럭시 이적을 통해 포항을 엿먹이며 K리그를 완전히 물로 보는 행동을 했기에 지도자로서의 행보를 빼더라도 황선홍보다 평가가 훨씬 안 좋다. 그래서 이쪽도 국대팬, 라이트팬이 아니면 한국축구 레전드 대우는 해줘도 K리그 레전드로 꼽지는 않는다.[14] 아이러니하다면 아이러니한게, 당시 국가대표와 K리그의 환경을 생각하면 오히려 국가대표에 뽑히지 않은 선수들이 K리그 레전드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운재나 김병지 같은 골키퍼들 뿐 아니라 롱런한 이동국 같은 예외도 있긴 하나 다수의 국가대표급 선수들은 시도때도 없이 국대에 뽑히니 K리그 경력을 쌓을 시간 자체가 별로 없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국가대표로 뛰는 경기가 더 많아지고 국가대표에서 활약하다보면 아무래도 외국 스카우터들 눈에 띄니 J리그든 짧은 유럽파 생활이든 뭐든 바깥으로 나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에 비해 국가대표로 뽑히지 못한 선수들은 아직 신생아에 가깝던 프로리그인 K리그에서만 활약하니 가까운 J리그 정도를 제외하곤 스카우터들의 눈에 띌 기회조차 별로 없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K리그에 오래 머물게 되고 이런 순환이 반복되고.. 타 국가대표들도 그렇듯 무조건 자국 리그 레전드 = 자국 대표 레전드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90년대 ~ 2000년대 초반 K리그와 국가대표의 환경은 더욱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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