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2 14:34:45

효숙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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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영종의 서후
효숙황후 | 孝肅皇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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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헌종조 황태후 | 헌종의 생모
성자황태후 | 聖慈皇太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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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명효숙황후.jpg
출생 1430년 10월 14일
북경 순천부 창평현
(現 베이징시)
사망 1504년 3월 16일 (향년 74세)
북경 순천부 자금성
(現 베이징시 둥청구 징산첸제4호)
능묘 유릉(裕陵)
재위기간 명 귀비
1457년 ~ 1464년 2월 23일
명 황태후
1464년 2월 23일 ~ 1487년 9월 9일
명 태황태후
1487년 9월 9일 ~ 1504년 3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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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성씨 주(周)
부모 부친 영국영정공 주능
(寧國榮靖公 周能, ? ~ ?)
모친 영국부인 견씨
(寧國夫人 甄氏, ? ~ ?)
형제자매 2남 1녀 중 장녀
배우자 영종 예황제
자녀 2남 1녀
작호 귀비(貴妃) → 황태후(皇太后)
→ 태황태후(太皇太后)
존호
1477년 헌상 [ 펼치기 · 접기 ]
성자인수황태후
(聖慈仁壽皇太后)
1487년 헌상 [ 펼치기 · 접기 ]
성자인수태황태후
(聖慈仁壽太皇太后)
시호
1504년 추증 [ 펼치기 · 접기 ]
효숙정순강의광렬보천승성예황후
(孝肅貞順康懿光烈輔天承聖睿皇后)
1536년 추증 [ 펼치기 · 접기 ]
효숙정순강의광렬보천승성황후
(孝肅貞順康懿光烈輔天承聖皇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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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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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나라 제6대 황제 정통제 주기진의 서후(庶后)이다. 성화제의 생모(生母)이자 홍치제의 할머니이다.

증조부는 주득청, 조부는 주복산, 아버지는 영국영정공 주능이다.

주씨는 창평현의 가난한 농민의 딸이었다. 『죄유록』에 따르면 영종이 사냥을 나갔다가 창평에 이르렀을 때 그녀의 집에 잘못 들어갔다고 한다. 가족 모두가 놀라 피신했으나 주씨만 나와서 대응하며 태연하게 행동했다. 이로 인해 영종이 그녀를 궁에 들였다고 한다. 명 영종 정통 11년(1446년), 주씨는 황제의 둘째 딸 중경공주를 낳았다. 정통 12년(1447년), 황장자 주견심을 낳았다.

1449년, 토목의 변으로 영종이 에센에게 포로로 잡혔고, 손태후가 그녀의 아들 주견심(후일의 성화제)을 황태자로 삼았다. 경태 원년에 영종이 북경으로 돌아왔고, 남궁에 거주했다. 경태 3년, 태자 주견심이 폐위되었다. 경태 6년(1455년), 주씨는 영종의 여섯째 아들 주견택을 낳았다. 이 사이에 주씨의 비빈 지위는 알려지지 않았다.

천순 원년(1457년), 영종이 복위하면서 주씨를 귀비로 봉했다. 당시 전황후가 영종이 토목보의 변으로 인해 포로 생활을 할 때 슬퍼하다 눈이 멀고 질병을 얻어 더이상 출산능력이 없다고 하며, 주씨는 손태후의 전례에 따라 황태자의 생모인 자신이 황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를 위해 손태후를 설득하였고 태후는 이것을 옳다고 생각해서 장면이라는 태감(환관)을 통해 관철시키려 하였으나 영종이 크게 화를 내며 물리쳤다.

그 이후에도 주귀비가 전황후에게 여러 차례 불손한 행동을 했다. 어느 날 태자 앞에서 황후에게 매우 무례하게 행동하자 영종이 화를 내며 그녀를 꾸짖었고, 전황후는 “태자를 위해 용서해주세요”라고 청하였다(『죄유록』 참조).

명 헌종이 즉위한 후, 그는 적모인 전황후와 생모인 주귀비를 모두 황태후로 존칭하고, 호칭을 정하려 했다. 당시 환관 하시가 주귀비에게 아첨하기 위해 주귀비만을 황태후로 존칭하려 하였으나, 대학사 이현과 팽시가 강력히 반대하여 두 황태후를 함께 존칭하게 되었으나, 주태후에게는 호칭을 주지 않아 적서의 구별을 나타냈다.

성화 23년 4월, 존호를 성자인수황태후로 하였다. 헌종이 재위하는 동안 태후를 매우 효성스럽게 모셨으며, 사서에 “다섯 날에 한 번 조회하고, 잔치를 베풀 때마다 반드시 참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후의 요구를 헌종은 두려워하며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홍치제가 서궁에서 태어났고, 생모인 기비가 사망한 후, 주태후가 궁중에서 만귀비의 탄압으로부터 홍치제를 양육하며 보살폈다. 효종이 즉위한 후, 주씨를 태황태후로 존칭하였고, 태황태후를 매우 효성스럽게 모셨다. 심지어 할머니를 위해 예외적으로 숭왕 견택(주태후의 아들)을 소환하여 축하를 받게 하려 했다.[1] 홍치 11년 겨울, 청녕궁이 화재로 피해를 입어 태황태후는 인수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음 해, 청녕궁이 재건되자 다시 청녕궁으로 돌아왔다. 방사 이광의 죽음은 태황태후와 관련이 있다.

명나라 영종 이전에는 적후와 순장 비빈만 황제와 함께 합장될 수 있었으며, 영종이 생전에 주태후가 아들로 인해 전황후의 지위를 격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전황후의 지위는 고정되어 변경할 수 없다고 명하였다. 전황후가 사망한 후, 주씨는 전황후의 합장을 막으려 했고, 헌종이 타협하여 결국 합장될 수 있었다. 그러나 주태후는 은밀히 영종의 능침 설계를 변경하여 자신도 장차 영종과 합장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전태후는 영종과 같은 능묘에 있지만 다른 터널에 묻혀 있었고, 두 능 사이의 통로는 채워져 있었다. 오른쪽 주태후의 터널은 비어 있었다

명나라 제도에 따라 적후만이 황제의 시호와 함께 태묘에 배향될 수 있으며, 계후와 황제의 생모는 황제의 시호와 더하지 않고, 별도로 묘를 세워 제사를 받았다. 홍치 17년 3월, 주태황태후가 붕어하자 대신들이 논의하여 주태황태후를 효숙정순강의광렬보천승성황후로 시호를 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대학사 유건, 사천, 이동양은 주태황태후가 적후가 아니라며 반대하였고, 효종이 이를 따랐다. 주태황태후의 시호는 효숙정순강의광렬보천승성태황태후로 정하고, 합장하되 별도로 봉사하고 태묘에는 배향하지 않았다. 주씨가 사망한 후, 효종은 전황후의 능묘 통로가 막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열려고 했으나, 흠천감의 반대에 따라 실행하지 않았다. 이로써, 주씨 이후로는 황제의 생모도 황제와 합장될 수 있게 되었다.

가정 15년, 명 세종이 명하여 기태후와 소태후 두 사람을 함께 능묘에 배향하고, 주태후를 황후로 칭하되 황제의 시호를 함께 하지 않아 적서의 구별을 두었다. 이후 목종의 생모 효각황태후, 신종의 생모 효정황태후, 광종의 생모 효정황태후, 희종의 생모 효화황태후, 사종의 생모 효순황태후도 이 제도를 따랐다. 주귀비의 최종 시호는 효숙정순강의광렬보천승성황후였다.

여러 동생이 귀하게 되었으나 막내 동생 길상만이(그의 당숙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주길상탑 참조) 외방에 나가 오랫동안 승려 생활을 하다 돌아왔다. 누이는 태자의 생모로 영종이 그녀를 환속시키려 했으나 거절하고 서산에 거주하며 자연스럽게 살다가 사망하였다.



[1] 명의 법제에 따르면 제후왕은 봉지로 떠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봉지에 머무르고 베이징으로 올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