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09 08:57:52

효정현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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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cd21><colcolor=#00386a> 청 함풍제의 계후
孝貞顯皇后 | 효정현황후
청 동치제 · 광서제조 모후황태후
자안황태후 | 慈安皇太后
파일:자안황태후.png
존호 자안단유강경소화장경황태후
(慈安端裕康慶昭和莊敬皇太后)
시호 효정자안유경화경성정의천조성현황후
(孝貞慈安裕慶和敬誠靖儀天祚聖顯皇后)
출생 1837년 8월 20일
사망 1881년 4월 8일 (향년 43세)
베이징 자금성 동육궁 종수궁
(현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자금성)
능묘 정릉
본관 니오후루(鈕祜祿)
부모 니오후루 목창아, 강가씨
형제 1남 1녀
배우자 청 문종 현황제
재위 청 황후
1852년 ~ 1861년
청 황태후
1861년 ~ 1881년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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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함풍제의 두 번째 황후인 효정현황후 니오후루(뉴호록)씨(孝貞顯皇后 鈕祜祿氏). 자안황태후라고도 불린다. 동시대의 성모황태후인 서태후(西太后)와 비교하여 동태후(東太后)라는 칭호로 가장 유명하다.[1]

2. 생애

삼등승은공 목창아의 딸로 적모는 극군양군왕 경항[2]의 손녀다. 언니는 장친왕 혁인[3]의 처이고, 여동생은 봉은장군 면림의 후처이다. 고모는 정친왕 단화의 처이다. 함풍제 등극 후 1852년 2월, 후궁 서열 제4위인 정빈(貞嬪)에 봉해졌고 동년 5월에 정비를 거쳐 정귀비로 승진, 6월에 황후로 책봉되었다. 초고속 승진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함풍제의 양모인 효정성황후의 의중이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자금성에서 서태후의 관저가 서쪽에 있었기에 서태후라고 불렀고 동태후의 관저는 동쪽에 있었기에 동태후라고 불렀다.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고 하며 동치제가 재위할 때 서태후와 함께 섭정을 했다. 본래 청 황실에서는 후궁이라 할지라도 친아들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그 황제의 친모라는 자격으로 황태후가 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그래서 서태후 또한 황태후가 된 것. 물론 같은 황태후라 할지라도 함풍제의 정실인 효정현황후가 서태후보다 지위도 높고, 법적 정당성이나 명령의 권위에서도 훨씬 우월했다. 하지만 문제는 동태후가 서태후만큼 정치적으로 영민하지 못하다보니[4] 항상 서태후의 의도대로 끌려다녔고, 종국에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져 아예 서태후에게 모든 걸 맡겨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함풍제의 정실이라는 지위 덕분에 서태후를 제어할 권능은 넘치도록 충분했고[5] 그 때문에 서태후는 동태후가 살아있을 때 그토록 싫어하는 동치제의 정실 효철의황후를 죽이질 못했고[6] 광서제가 즉위해서 6년 동안 공동 통치를 할 때도 서태후가 자신을 무시하고 권위를 뽐내려하자 제재를 가하기도 했다.

1881년 당시 43세의 이르다면 이른 나이에 급사하는데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사고로 계단에서 떨어져서 생긴 뇌진탕이 악화되어서 사망한 병사이다. 한편, 당시 권력을 분점하던 서태후의 성격을 아는 사람들은 동태후의 죽음에 당연히 그녀를 의심했고 독살설도 끊이지 않았지만 병상 기록 등이 발견되고 서태후가 동태후를 암살해야 할 정치적 타당성이 없다는 점 등이 지적되면서 이를 부정하는 의견도 많다.[7]

3. 여담

  • 동치제는 친어머니이지만 엄격한 서태후보다 양어머니지만 다정하게 대해주던 동태후를 더 따랐다고 한다. 동치제가 주색잡기에 빠진 것도 지나치게 엄격한 양육 방식만 고집하던 서태후 뿐만 아니라 동태후의 지나치게 부드럽기만 한 자유방임형 양육도 한몫 했다는 주장도 있다. 동태후를 함부로 제어할 수 없었던 서태후의 한계와 동치제의 황제라는 특수한 지위 때문에 양육 방식의 밸런스 조정이 이뤄지지 못했다는 식의 주장. 허나 이에 대해선 반론도 있는게, 애초에 서태후가 그렇다고 교육을 잘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 당장 서태후가 믿고 황제를 맡긴 사부 우키거리 워신(오제격리 왜인, 烏齊格里 倭仁)은 정통 보수파 유학자로 동치제의 양육과 교육에 있어 구시대적 제왕 교육에만 골몰하고 근대적 양무운동에 힘쓰는 공친왕과 그 밑에서 일하는 총리아문 관리들은 까내리며 매국노로 매도하는 인물이었고 서태후는 그런 인물을 갈아치우기는커녕 자신의 정적격인 공친왕 제어하기에 좋은 도구처럼 쏠쏠하게 써먹었다. 동치제가 주색잡기에 골몰하게 된건 성인이 되어감에도 자신에게 실권을 주지 않고 섭정을 계속 하던 서태후에 대한 실망감 역시 크게 작용했고 결국 1875년 고작 만 18세의 나이로 병사한다.
  • 만약 동태후가 광서제가 성년이 될 때까지 살다가 정석대로 섭정에서 물러났으면, 서태후도 섭정에 간섭할 명분이 없어서 이후 개혁 의지가 있던 광서제가 친정을 무사히 본인 뜻대로 할 수도 있었다. 어찌보면 권력욕이 적으면서 권위가 높았던 동태후[8][9]의 이른 죽음은 광서제에게 무척 악운이라 할 수 있다.

[1] 같은 동태후로 유명한 사람은 삼국지에 나오는 효인황후 동씨가 있는데, 이쪽은 성이 동씨라 동태후(太后)인 케이스.[2] 예친왕 아이신기오로 다이샨의 아들 아이신기오로 요토의 후손[3] 강희제의 16남이자 옹정제의 측근 윤록의 후손이다. 정확히는 차남인 봉은보국공 홍융(1738~1802)의 증손으로 원래 장친왕작은 윤록의 장남인 이혁패자 홍보(1713~1743)의 후손이 보유하다가 8대 장친왕인 혁매가 아편을 피다가 도광제임칙서에게 걸려 작위를 추탈당하는 바람에 혁인의 아버지인 면호가 작위를 계승한다. 여담이지만 혁인의 아들인 장친왕 재훈은 의화단의 난당시 육장, 단군왕 재의 등과 함께 의화단에 가담했으나 신축조약직후 작위를 추탈당하고 자결한다.[4] 실제로도 서태후는 동치제와 광서제가 권력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청나라 조정과 군대를 철저하게 장악하고 권력을 되찾으려는 두 황제를 역으로 당하게 만들었을 정도로 매우 교활하고 영악한 성격이었다.[5] 청에서 황제의 친모를 성모황태후로 올려 태후로 대접을 해주긴 했지만, 출신성분부터가 황후인 모후황태후와는 모든 부분에서 그 격이 다른 부분이였다.[6] 직접 죽이지 못했기에 심리적으로만 압박하여 자살을 하도록 유도했다.[7] 생전에 동태후는 서태후에게 유일하게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인물이었기에, 서태후에게는 걸림돌이라면 걸림돌이었다. 그리고 서태후는 성격상 그런 동태후를 없애고자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충분히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전까지 동태후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은, 정치적 판단 때문이든 사적으로 정이 들어서든 그녀를 죽일 생각이 없었기 때문 아니냐는 추측이다. 애초에 동태후는 서태후가 암살을 꾀해야 할 정도의 야심가도 아니었다.[8] 이 부분은 다소 이견의 여지가 있다. 동태후 본인도 태황태후로 물러나고 효철의황후가 권력을 잡을 것을 걱정해서, 동치제 아랫항렬이 아닌 동일 항렬인 광서제를 즉위시키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즉, 광서제의 즉위는 서태후의 독단이 아니라 동태후도 깊게 관여한 일이었다. 다만 어찌됐든 동태후가 서태후보단 그 정도가 덜했다는 것은 분명해보인다.[9] 사실 어이없는 점은 동태후가 태황태후가 되어도 본인이 정실황후이기에 똑같은 정실 황후여도 효철의황후는 본인이 죽지 않는한 권력을 잡을 수 없다. 심지어 효철의황후는 몽골인 출신이기에 더더욱. 말하자면 광서제를 어거지로 즉위시키고, 효철의황후가 선황제 정실황후 자격으로 태후로 승격되어도 태황태후이자 정실황후이자 내국인인 동태후가 살아있는한 효철의황후는 아무것도 못한다. 더군다나 어찌보면 가장 중요하고도 아이러니한 점은 효철의황후는 동태후 본인이 직접 간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