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16:27:27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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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섭정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藤原道長
파일:후지와라노 미치나가.jpg
출생 966년
사망 1028년 1월 3일 (향년 62세)
재임기간 섭정
1016년 3월 10일 ~ 1017년 4월 15일
태정대신
1017년 12월 24일 ~ 1018년 2월 27일
1. 개요2. 세계(世系)3. 생애4. 약력5. 가계6. 와카7. 창작물

[clearfix]

1. 개요

一家立三后 未曾有也.
(한 집에서 세 황후를 세웠으니 일찍이 없었던 일이로다.)
《소우기》[小右記], 관인(寬仁) 2년(1018) 10월 16일자(11월 26일), 후지와라노 사네스케[藤原實資]

일본 헤이안 시대귀족이자 외척으로 섭정을 역임했다.

2. 세계(世系)

부모가 족내혼을 했기 때문에 친가외가가 한 겨레다.
후지와라노 카마타리후지와라노 후히토 → 후사사키(房前) → 마타테(眞楯) → 우치마로(內麻呂) → 후유츠구(冬嗣) → 나가요시(長良) → 모토츠네(基經)[3]
후지와라노 카마타리 → 후지와라노 후히토 → 후사사키(房前) → 마타테(眞楯) → 우치마로(內麻呂) → 후유츠구(冬嗣) → 요시후사(良房) → 모토츠네(基經)[4] → 타다히라(忠平) → 모로요리(師賴) → 카네이에(兼家) → 미치나가(道長)
후지와라노 카마타리후지와라노 후히토 → 후사사키(房前) → 우오나(魚名) → 타카토리(鷹取) → 후지츠구(藤嗣) → 타카후사(高房) → 야마카게(山蔭) → 나카마사(中正) → 토키히메(時姬) → 미치나가(道長)

미치나가의 어머니면서 16촌 고모할머니인 후지와라노 토키히메(藤原時姬)는 비록 후지와라노 카네이에(藤原兼家)와 종족이 같지만 지방관을 지낸 집안의 딸이라 한 겨레임에도 괴리가 컸다. 그럼에도 토키히메는 카네이에의 첫째 아내가 되어 여러 자식들을 낳아서 그 공로로 정실로 받아들여졌으며 사후 정1위에 추증되었다. 당대 웬만한 모노가타리 주인공들도 명함을 못 내밀 정도의 신데렐라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다.[5]

3. 생애

966년 후지와라노 카네이에의 5남으로 태어났다. 이 때문에 형들에게 서열이 밀렸다.[6] 후지와라노 카네이에는 이치조 덴노의 외조부로서 역사상 두 번째로 천황의 외조부로서 섭정한 인물로, 가잔 덴노를 속여서 즉위 2년만에 출가시켜 사실상 폐위시켰는데 이를 주도한 게 3남 미치카네(道兼)였다. 미치카네는 카네이에가 자신에게 섭관직을 물려주길 원했으나 카네이에는 장남인 미치카타(道隆)를 후계자로 지정하고 사망한다. 이에 불만을 가진 미치카네는 아버지의 장례 기간에 연회를 여는 등 물의를 빚었다고 한다.

미치타카는 후지와라노 테이시를 이치죠 덴노에게 입궐시켰고 이에 맞서 미치카네는 후지와라노 나카코(藤原尊子)를 여어로 입궐시킨다. 테이시의 어머니는 원래 여방(女房) 이력이 있던 중류 계층 출신이었지만 한학에 능해 자식들에게 한학을 전수했고, 나카코의 어머니는 <마쿠라노소시>에도 기록이 남을 정도의 여장부였다고 전해진다.

미치타카와 미치카네의 대립이 그대로 유지되었다면 미치나가는 방계로 끝났겠지만 미치카타와 미치카네가 995년 잇달아 으로 사망해서 미치나가에게 권력을 잡을 기회가 온다. 미치나가는 미치타카의 아들로 8살 연하의 조카인 코레치카(伊周)와 대립하게 된다. 미치나가는 미치타카 시절부터 스스로 섭정과 관백에 오르고 천황의 외조부가 되리라는 포부를 공공연히 말할 정도로 야심이 컸고 결국 이치조 덴노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누이인 후지와라노 아키코(藤原詮子)와 손을 잡고 코레치카를 현재의 후쿠오카 일대인 다자이후(大宰府)로 쫓아내서 숙청해 버린다.[7]

통칭 미도칸파쿠(御堂關白) 또는 호죠지셋쇼(法成寺攝政)로 불렸다. 이 지위에 오르는 것은 자신의 외손자인 고이치조 덴노가 즉위한 시점에서였고, 이치조 덴노와 산조 덴노 시절에는 조정권력을 확실히 쥐고 있었지만 관백은 아니었다. 제63대 레이제이 덴노와 제64대 엔유 덴노처남으로 시조를 기준으로 12세였으며 후지와라 홋케 미도류(藤原 北家 御堂流)의 파조(派祖)였다.

4명의 딸을 황실에 시집 보내 고이치죠 덴노, 고스자쿠 덴노, 고레이제이 덴노삼조(三朝)의 국구가 되어, 후지와라노 아소미외척으로 전횡하는 섭관정치의 절정기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또한 헤이안 시대뿐만 아니라 일본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막강했던 권력자였다. 미치나가 사후에도 그의 적통인 미도류(御堂流)가 대대로 셋칸직을 독점하면서 자연스럽게 헤이안 시대 이후에도 공가 중 최고위인 셋케(섭가)를 이루게 되었다.

한국사로 치면 한 세대 뒤의 인물인 고려시대 경원 이씨 세도 권력자인 이자연이미지가 겹치는 인물이었다. 《겐지모노가타리》의 주인공히카루 겐지의 모티브가 된 인물 중 한 명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산조 덴노에게 시집보낸 차녀 겐시는 테이시 내친왕(禎子内親王)밖에 못 낳았기 때문에 실망해서 탄생 축하에서 도중에 나가버리기도 했다. 테이시 내친왕은 고스자쿠 덴노의 황후가 되어 고산조 덴노를 낳았고 고산조 덴노는 헤이안 후기 원정기의 시작을 고하게 된다.

4. 약력

  • 966년 후지와라노 카네이에의 5남으로 태어났다.
  • 980년 종5위하(從五位下).
    이후 본인에게는 큰형이기도 한 후지와라노 미치타카의 셋째 아들 코레치카와 경쟁했고, 제1천년기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에는 미치나가가 확고히 우위를 점했다.
  • 1000년후지와라노 쇼시이치조 덴노의 중궁으로 들였다.
    이후 무라사키 시키부 등 뇨보(女房)들을 후원했다.
  • 1017년 태정대신이 되었다.
  • 1019년 호죠지(法成寺)로 출가했다.
  • 1028년 세상을 떠났다.

33세부터 56세까지 일기를 남겼으니 바로 《미도간파쿠기》[御堂關白記]이다. 정작 미치나가는 태정대신을 역임했었지만 관백[關白]을 지낸 적은 없었다.[10] 다만 헤이안 시대 당시의 귀족 사회나 생활상, 풍습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취급되어 일본의 국보가 되었고, 2011년에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다만 일기가 비문투성이라서 지금도 해석이 매우 어렵다고 한다.

5. 가계

  • 부인 : 미나모토노 린시/미치코(源倫子)
  • 부인 : 미나모토노 메이시(源明子)
    • 차남: 요리무네(頼宗)
    • 3남: 아키노부(顕信)
    • 4남: 요시노부(能信)
    • 3녀: 간시(寛子) : 아쓰아키라 친왕(산조 덴노의 장남)과 결혼
    • 5녀: 손시(尊子) : 미나모토노 모로후사(源師房)의 부인
    • 6남: 나가이에(長家)

6. 와카

この [ruby(世,ruby=よ)]をば わが [ruby(世,ruby=よ)]とぞ [ruby(思,ruby=おも)]ふ [ruby(望月,ruby=もちづき)]の [ruby(虧,ruby=か)]けたる ことも なしと [ruby(思,ruby=おも)]へば
이 누리가 내 누리라고 생각하니 보름달이 이지러지는 일이 없는 듯 하다고 생각하노라.[11]

7. 창작물

7.1. Fate/Grand Order

Fate/Grand Order에 등장했다. 자세한 내요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Fate 시리즈) 참조.

7.2. 빛나는 그대에게

에모토 타스쿠가 배역을 맡았다.


[小右記] 후지와라노 사네스케의 일기이다. 총 61권으로 982년부터 1032년까지 쓴 게 남아있다. 본인은 스스로 제목을 『역기』(曆記)라고 지었는데 『야부기』(野府記)를 비롯한 다른 이름이 많다. 원문은 산일(散逸)했고, 필사본만 남았다.[藤原實資]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재종형이자 정적이다. 미치나가의 3녀이자 재종질녀인 이시/타케코(威子)가 제68대 고이치죠 덴노의 중궁으로 책봉되자 일기에 썼던 글이다. 이 '일가립삼후'란 문장도 후술된 와카와 함께 당시 미치나가의 권력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알려져 있다. 재종형제끼리 정적이라는 것에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지만 사네스케의 조부 사네요리는 타다히라의 장남으로 미치나가의 조부 모로스케의 형이었음에도 덴노의 후계자를 낳은 딸을 가진 모로스케에게 후궁에서의 파워게임에 밀려 사실상 적통임에도 주도권을 빼앗긴 과거가 있었다. 그런데 그 손자인 미치나가 또한 똑같이 후궁 싸움으로 자기 아버지 카네이에가 정한 후계자인 사실상의 장조카 코레치카를 밀어버리는 역사를 반복하고 있으니 저런 반응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3] 중부(仲父) 요시후사에게 출계(出系)[4] 친부는 나가요시[5] 겐지모노가타리에서도 이 정도로 성공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은 없다. 속편의 또 다른 주인공 니오노미야의 어머니이자 히카루 겐지의 외동딸인 아카시 중궁의 어머니인 아카시노카타는 평생 자신보다 높은 신분의 부인들에게 서열이 밀렸다.[6]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서열이 훨씬 위였던 형들보다 황실 혈통까지 물려받은 미나모토씨출신 여인들을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반면 형들인 미치타카와 미치카네는 그 부인들이 중류 출신에 불과했다.[7] 이후 누이 후지와라노 테이시를 사랑했던 이치죠 덴노가 잠깐 다시 교토로 불러들여 테이시의 친오빠이자 아츠야스 친왕의 외숙인 점을 감안해서 다시 관직에 제수해주지만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숙부 미치나가의 견제를 받다가 쇼시와 그 아들 아츠히라 친왕을 저주했다는 음모사건에 휘말리면서 이모가 투옥되는 등 고초를 겪다가 관직에서도 해임되고 3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御堂關白記] 《호죠지셋쇼기》(法成寺攝政記)라고도 한다.[關白] 뒷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받았던 직위로 유명하다. 물론 히데요시만 관백이 되었던 것은 아니지만.[10] 그래서 일본사 시험에서 함정문제로 자주 출제된다. 에도시대에 붙인 낚시성 제목이다.[11] 출처는 위의 인용문과 같다. 1018년 11월 26일에 이시/타케코(威子)가 중궁으로 책봉된 걸 기념해서 잔치를 벌이면서 재종형인 후지와라노 사네스케 앞에서 이 시를 읊었다고 한다. 위의 각주에 쓰인 이 재종형제의 조부들끼리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티배깅이고 인성질이다. 후지와라노 사네스케도 그래서 재종제의 시에 답시를 읊기를 속으로는 빡쳤겠지만 정중하게 거절했다.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일기에서는 잔치만 썼고 즉흥시는 안 썼는데 본인도 일기에 적기에는 부끄러웠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