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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섭정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藤原道長 | |
출생 | 966년 |
사망 | 1028년 1월 3일 (향년 62세) |
재임기간 | 섭정 |
1016년 3월 10일 ~ 1017년 4월 15일 | |
태정대신 | |
1017년 12월 24일 ~ 1018년 2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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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一家立三后 未曾有也.
(한 집에서 세 황후를 세웠으니 일찍이 없었던 일이로다.)
『소우기(小右記)』[1], 관인(寬仁) 2년(1018) 10월 16일자(11월 26일), 후지와라노 사네스케(藤原實資)[2]
(한 집에서 세 황후를 세웠으니 일찍이 없었던 일이로다.)
『소우기(小右記)』[1], 관인(寬仁) 2년(1018) 10월 16일자(11월 26일), 후지와라노 사네스케(藤原實資)[2]
일본 헤이안 시대의 귀족이자 외척으로 섭정을 역임했다.
2. 세계(世系)
부모가 족내혼을 했기 때문에 친가와 외가가 한 겨레다. 미치나가는 친가쪽을 기준으로 시조로부터 12세가 되며, 북가(北家) 9대손으로 어당류御堂流의 파조派祖다.후지와라노 카마타리 → 후지와라노 후히토 → 후사사키(房前) → 마타테(眞楯) → 우치마로(內麻呂) → 후유츠구(冬嗣) → 나가요시(長良) → 후지와라노 카마타리 → 후지와라노 후히토 → 후사사키(房前) → 마타테(眞楯) → 우치마로(內麻呂) → 후유츠구(冬嗣) → 요시후사(良房) → 모토츠네(基經)[4] → 타다히라(忠平) → 모로스케(師輔) → 카네이에(兼家) → 미치나가(道長) |
후지와라노 카마타리 → 후지와라노 후히토 → 후사사키(房前) → 우오나(魚名) → 타카토리(鷹取) → 후지츠구(藤嗣) → 타카후사(高房) → 야마카게(山蔭) → 나카마사(中正) → 토키히메(時姬) → 미치나가(道長) |
미치나가의 어머니면서 16촌 고모할머니인 후지와라노 토키히메(藤原時姬)는 비록 후지와라노 카네이에(藤原兼家)와 종족이 같지만 지방관을 지낸 집안의 딸이라 겨레붙이면서도 괴리가 컸다. 그럼에도 토키히메는 카네이에의 첫째 아내가 되어 여러 자식들을 낳아서 그 공로로 정실로 받아들여졌으며 사후 정1위에 추증되었다. 당대에 손꼽히는 신데렐라라 할 수 있는데 다만 이 때는 후대보다도 상대적으로 모친의 신분에 관대한 분위기라서 지방관 계급의 딸들이 상류귀족과 혼인하고 정실취급 받는 것도 드물지 않았다.[5][6]
3. 생애
966년 후지와라노 카네이에의 5남으로 태어났다. 이 때문에 초기에는 형들에게 서열이 밀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서열이 훨씬 위였던 형들보다 황실 혈통까지 물려받은 미나모토씨 출신 여인들을 부인으로 맞아들여 처가의 뒷배가 제일 든든했다. 반면 형들인 미치타카와 미치카네는 그 부인들이 중류 출신에 불과했다. 이렇게 된 것은 미치타카, 미치카네가 장성한 시기가 아버지 카네이에가 권력투쟁에 밀려 암울한 시절을 보내던 때와 겹쳐서 그렇다. 반면 막내뻘이었던 미치나가는 아버지가 복권된 후 권력의 절정기에 있을 때 장성한 덕에 훨씬 더 좋은 가문과 혼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후지와라노 카네이에는 이치조 덴노의 외조부[7]로서 역사상 두 번째로 천황의 외조부로서 섭정한 인물로, 가잔 덴노를 속여서 즉위 2년만에 출가시켜 사실상 폐위시켰는데 이를 주도한 게 3남 미치카네(道兼)였다. 미치카네는 카네이에가 자신에게 섭관직을 물려주길 원했으나 카네이에는 장남인 미치카타(道隆)를 후계자로 지정하고 사망한다. 이에 불만을 가진 미치카네는 아버지의 장례 기간에 연회를 여는 등 물의를 빚었다고 한다.미치타카는 장차 덴노의 외조부가 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딸 후지와라노 테이시를 이치조 덴노에게 입궐시켰다. 테이시의 어머니는 원래 여방(女房) 이력이 있던 중류 계층 출신이었지만 한학에 능해 자식들에게 한학을 전수했다. 그러나 형과 경쟁하던 미치카네는 궁중에 들여보낼만한 나이의 딸이 없어 경쟁에서 불리한 처지였다. 이 때 큰 형의 행동에 큰 불만을 갖고 있던 미치나가는 둘째형 미치카네와 함께 미치타카와 대립한다.
그러나 미치타카의 딸 테이시가 이치조 덴노의 황후가 되고 총애를 받으면서 미치나가는 방계로 끝날 것처럼 보였으나 미치타카와 미치카네가 995년 잇달아 병으로 사망하면서 미치나가에게 권력을 잡을 기회가 온다. 미치타카와 그 아들 코레치카는 평소 경솔하고 오만한 면이 많아 귀족들 사이에서 평이 나빴기에 미치타카 사후 권력 승계구도에서 미치나가는 일찍 죽은 둘째 형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는다.[8] 결국 코레치카가 출가한 가잔 덴노에게 활을 쏘는 엄청난 짓을 저지른 탓에 현재의 후쿠오카 일대인 다자이후(大宰府)로 유배를 가는 쵸토쿠의 변이 일어나면서 미치나가가 결정적으로 승리한다.[9]
1000년 후지와라노 쇼시를 이치조 덴노의 중궁으로 보내면서 무라사키 시키부 등 뇨보(女房)들을 후원하는 것을 시작으로, 총 4명의 딸을 황실에 시집 보내 고이치조 덴노, 고스자쿠 덴노, 고레이제이 덴노 등 삼조(三朝)의 국구가 되어, 후지와라 가문이 외척으로 전횡하는 섭관정치의 절정기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또한 헤이안 시대뿐만 아니라 일본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막강했던 권력자였다. 미치나가 사후에도 그의 적통인 미도류(御堂流)가 대대로 셋칸직을 독점하면서 자연스럽게 헤이안 시대 이후에도 공가 중 최고위인 셋케(섭가)를 이루게 되었다.
산조 덴노에게 시집보낸 차녀 키요코는 테이시 내친왕(禎子內親王)밖에 못 낳았기 때문에 실망해서 탄생 축하에서 도중에 나가버리기도 했다. 테이시 내친왕은 고스자쿠 덴노의 황후가 되어 고산조 덴노를 낳았고 고산조 덴노는 헤이안 후기 원정기의 시작을 고하게 된다.
통칭 미도칸파쿠(御堂關白) 또는 호조지셋쇼(法成寺攝政)로 불렸다. 이렇게 불리는 것은 자신의 외손자인 고이치조 덴노가 즉위한 시점에서였고, 이치조 덴노와 산조 덴노 시절에는 조정의 권력을 확실히 쥐고 있었으나, 재미있게도 그는 칸파쿠(관백)가 된 적이 없다.[10][11] 1019년에 호조지(法成寺)로 출가했고, 1028년에 세상을 떠났다.
4. 가계
- 부인 : 미나모토노 린시/미치코/토모코(源倫子)
- 장녀: 아키코/쇼시(彰子) : 제66대 이치조 덴노의 중궁
- 장남: 요리미치(賴通)
- 차녀: 겐시/키요코(姸子) : 제67대 산조 덴노의 중궁
- 5남: 노리미치(敎通)
- 4녀 이시/다케코(威子): 제68대 고이치조 덴노의 중궁
- 6녀 기시/요시코(嬉子): 제69대 고스자쿠 덴노의 동궁비(요절)
- 부인 : 미나모토노 메이시/아키코(源明子)
- 차남: 요리무네(賴宗)
- 3남: 아키노부(顯信)
- 4남: 요시노부(能信)
- 3녀: 간시/히로코(寛子) : 아쓰아키라 친왕(산조 덴노의 장남)과 결혼
- 5녀: 손시/타카코(尊子) : 미나모토노 모로후사(源師房)의 부인
- 6남: 나가이에(長家)
5. 기타
- 33세부터 56세까지 일기를 남겼으니 바로 『미도칸파쿠기(御堂關白記)』[12]다. 그런데 위에도 적혀 있지만, 정작 미치나가는 칸파쿠(관백)가 된 적이 없다.[13] 이 일기는 헤이안 시대 당시의 귀족 사회나 생활상, 풍습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취급되어 일본의 국보가 되었고, 2011년에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다만 비문투성이라서 지금도 해석이 매우 어렵다고 한다.
- 미치나가가 형 미치타카의 자식들을 제치고 권력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누나 후지와라노 센시 덕분이었다. 원래부터 미치타카와 그 가족은 귀족사회에서 반감을 많이 산 상태였는데 센시 또한 그러했다. 그래서 미치타카가 죽자 원래부터 귀여워하던 막내동생인 미치나가에게 장차 권력이 돌아가게 할 목적으로, 센시는 아들 이치조 덴노에게 다음 실권자의 자리는 미치타카의 자식이 아닌 형제순으로 돌아가야한다고 매우 강하게 밀어붙어 이를 성사시켰다.[14] 그 뒤에도 미치나가의 딸 후지와라노 쇼시가 미치타카의 딸 후지와라노 테이시가 있는데도 중궁으로 책립되게 도우는 등, 온갖 편의를 봐줬다. 이 때문에 센시가 죽자 정작 친아들인 이치조 덴노는 무덤덤한 반면 미치나가는 몹시 슬퍼했고 그녀를 위해서 제사를 모셨다는 기록이 미도칸파쿠기에 남아있다.[15]
- 의외로 형 미치타카 일족의 몰락에 적극적으로 뭘 하거나 음모를 꾸민 적이 없다. 미치나가가 권력을 잡은 과정도 잘 보면 누나 센시의 원맨쇼에 가까웠고 이후로도 미치타카의 아들들은 여전히 고관대작이었고, 미치타카의 딸 테이시도 유일한 황후 자리를 지키며 남편 이치조 덴노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조용히 시간만 기다리면 다시 그들이 권력을 회복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미치타카의 아들들인 코레치카와 타카이에가 여자 문제로 카잔 상황에게 활을 쏘고 그의 시동을 살해한다거나, 황태후인 센시와 숙부인 미치나가를 저주하는 주술을 행한다든가, 덴노의 칙서를 위조하려고 한다거나, 집안의 배경을 등에 업고 다른 귀족들을 깔보고 말을 함부로 하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르며 몰락을 자초했다. 테이시 또한 카잔 상황에게 화살을 쏘는 대형사고를 저지른 형제들을 부군인 이치조 덴노의 명마저 거역하고 처소에 몰래 숨겨주다가 역으로 집안을 때려부술 정도로 대대적인 수색을 당했고, 그 충격으로 홧김에 출가해버리면서 황후로서의 정당성과 입지를 스스로 약화시키고 이후 이치조의 총애만 믿고 무리하게 복위하여 본인의 평판까지 떨어뜨리면서 상당히 생각없고 경솔한 면을 보였다.[16][17] 덕분에 그 시대에 권력을 잡은 사람치고 미치나가는 손을 더럽힌 게 거의 없다.
심지어 나중에는 알아서 병사해주기까지 했다오히려 자신을 저주하다시피 했던 조카 코레치카의 장녀는 자신의 차남 요리무네의 정실로 삼고 코레치카의 차녀는 딸 쇼시의 궁정시녀로 삼는 등, 나름 조카 일가와의 관계를 개선하는데 힘쓰기도 했다.[18]
- 아래는 그가 남긴 와카다.この [ruby(世, ruby=よ)]をば わが [ruby(世, ruby=よ)]とぞ [ruby(思, ruby=おも)]ふ [ruby(望月, ruby=もちづき)]の [ruby(虧, ruby=か)]けたる ことも なしと [ruby(思, ruby=おも)]へば이 누리가 내 누리라고 생각하니 보름달이 이지러지는 일이 없는 듯 하다고 생각하노라.[19]
- 한국사로 치면 한 세대 뒤의 인물인 고려 시대 경원 이씨 세도 권력자인 이자연과 이미지가 겹치는 인물이었다.
- 《겐지모노가타리》의 주인공인 히카루 겐지의 모티브가 된 인물 중 한 명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6. 창작물
6.1. Fate/Grand Order
Fate/Grand Order에 등장했다. 자세한 내요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Fate 시리즈) 참조.6.2. 빛나는 그대에게
에모토 타스쿠가 배역을 맡았다.[1] 후지와라노 사네스케의 일기다. 총 61권으로 982년부터 1032년까지 쓴 게 남아있다. 본인은 스스로 제목을 『역기(曆記)』라고 지었는데 『야부기(野府記)』를 비롯한 다른 이름이 많다. 원본은 산일(散逸)했고, 필사본만 남았다.[2]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재종형이자 정적이다. 미치나가의 3녀이자 재종질녀인 이시/타케코(威子)가 제68대 고이치조 덴노의 중궁으로 책봉되자 일기에 썼던 글이다. 이 '일가립삼후'란 문장도 후술된 와카와 함께 당시 미치나가의 권력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알려져 있다. 재종형제끼리 정적이라는 것에 의문을 들수도 있는데 사네스케의 조부 사네요리(實賴)는 타다히라의 장남으로 미치나가의 조부 모로스케(師輔)의 형이었음에도 덴노의 후계자를 낳은 딸을 가진 모로스케에게 후궁에서의 파워게임에 밀려 탈적(奪嫡)당했다.. 그런데 그 손자인 미치나가 또한 똑같이 후궁 싸움으로 자기 아버지 카네이에가 정한 후계자인 사실상의 장조카 코레치카를 밀어내기도 했다.더 위로 올라가면 모로스케의 아버지도 형의 가문을 몰락시키기도 했는데 한마디로 이 시대에는 형제끼리도 정적으로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이는게 보통이었다.[3] 중부仲父 요시후사에게 출계出系[4] 친부는 나가요시[5] 비슷한 사례로 미치나가의 형수이자 후지와라노 테이시의 어머니도 지방관 계급 출신이었지만 섭정인 후지와라노 미치타카의 정실이 되었고 딸들도 모두 황후, 황태자비, 친왕비가 되어서 어떻게 보면 토키히메보다 더 출세했다. 다만 불운과 아들들의 어리석음으로 그 부귀영화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했고 결국 아들들인 코레치카와 타카이에가 유배를 간 후 병사했다.[6] 겐지모노가타리에서도 이 정도로 성공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은 없다. 속편의 또 다른 주인공 니오노미야의 어머니이자 히카루 겐지의 외동딸인 아카시 중궁의 어머니인 아카시노카타는 평생 자신보다 높은 신분의 부인들에게 서열이 밀렸다.[7] 딸들을 레이제이 덴노와 엔유 덴노에게 시집보냈다. 이 중 엔유 덴노의 아들이 이치조 덴노다.[8] 여기에는 이치조 덴노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누나 후지와라노 센시(藤原詮子)의 도움이 매우 컸다. 센시는 미치타카 일가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에 분노했고 그게 아니더라도 조카 코레치카의 평이 매우 나쁜 것도 있었다.[9] 이후 코레치카의 누이 후지와라노 테이시를 사랑했던 이치조 덴노가 잠깐 다시 교토로 불러들이고 제1황자인 아츠야스 친왕의 외숙인 점을 감안해서 다시 관직에 제수해주지만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숙부 미치나가의 견제를 받다가 쇼시와 그 아들 아츠히라 친왕을 저주했다는 음모사건에 휘말리면서 이모가 투옥되는 등 고초를 겪다가 관직에서도 해임되고 3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10] 그의 마지막 지위는 1017년에 된 태정대신이다.[11] 사실 산조 덴노가 관백 임명을 권유했었지만 본인이 거절했다.[12] 『호조지셋쇼기(法成寺攝政記)』라고도 한다.[13] 그래서 일본사 시험에서 함정문제로 자주 출제된다. 에도시대에 붙인 낚시성 제목이다.[14] 이치조가 망설이자 한밤중에 처소에 밀고들어가 읍소까지 했을 정도였다.[15] 미치나가가 제사를 챙긴 건 자신의 부모와 센시 뿐이다. 부모도 아닌 누나의 제사를 모셨다는 점 때문에 기록에는 없지만 센시가 미치나가를 양자로 들였던게 아니냐는 추측도 나오는 모양.[16] 이렇다보니 미치나가의 정적들마저 테이시에 대해 '비구니를 궁에 들이다니 전대미문의 사태'라고 비난할 정도로 당시 테이시의 평판은 그녀를 무리하게 복위시킨 이치조 덴노마저 욕을 먹을만큼 바닥이었고 되려 과욕으로 보일 수 있는 미치나가의 딸 쇼시의 입궁과 중궁 책봉이 지지를 얻었을 정도였다.[17] 이 당시 일본의 황후들은 나름 궁궐의 안주인으로서 신궁에서 제사를 지낼 막중한 의무가 있었는데 문제는 테이시처럼 출가를 한 이는 신토와의 인연은 끊어졌다 여겨져서 신궁 제사를 담당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테이시가 다시 환속되어 복위가 되고도 몇년 간 제사가 치루어지지 않았는데 설상가상으로 이 시기 홍수, 지진 등 각종 자연재해들이 터져버리면서 “이게 다 출가한 테이시가 환속되어서 신궁 제사가 치루어지지 않은 탓이다”란 여론이 생겨버린 것. 결국 미치나가의 친딸 쇼시가 제2황후가 되고나서야 비로소 이 제사가 치루어지게 된다.[18] 다만 코레치카의 딸들과는 달리 아들들은 아버지의 팔자를 그대로 물려받아 여러모로 꼬인 인생을 살기는 했다.[19] 출처는 위의 인용문과 같다. 1018년 11월 26일에 이시/타케코(威子)가 중궁으로 책봉된 걸 기념해서 잔치를 벌이면서 재종형인 후지와라노 사네스케 앞에서 이 시를 읊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시대에는 친형제끼리도 가문의 존망을 걸고 권력투쟁하던 시대라 재종형제끼리쯤 되면 그 정도가 더해서 그냥 정적이다. 실제로 사네스케는 미치나가의 미도류와 경쟁하던 오노노미야류의 핵심인물이라 은근히 그를 까면서 견제하던 사이라서 딱히 인성을 논할 사건이 아니다. 다만 같은 오노미야류여도 사네스케의 종제 후지와라노 긴토는 미치나가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는데 아마 재종조부 요리타다의 양손자라서 그런 듯 하다.